다시 태어난 베토벤 249화
55. 사기꾼들(5)
배도빈이 암스테르담과 가우왕의 협연에 크게 만족하고 있을 때, 콘서트홀을 방문한 인사들은 하나같이 감탄할 뿐이었다.
‘좋다.’
‘ 멋있잖아.’
귀가 즐겁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손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다.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와 가우왕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가 극도로 발전하면 어떤 앙상블을 들려줄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마리 얀스는 모험적인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이 가지고 있는 정열적이고 장대한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각 악기가 역할을 충실이 이행했고 그로 인해 고전을 대표하는 불멸의 음악가, 베토벤의 의도가 청중들의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그와 대화하는 가우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건은 세밀했고 동시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놀라울 정도의 빠른 템포로 연주함 에도 모든 음계가 귀로 파고드니 심상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었다.
한이슬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실하면서도 세련되었다는 말이 딱 어울리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는 베토벤이 남긴 피아노 협주곡 중 유일하게 단조로 작곡되었다.
분산화음과 빠른 진행을 활용하여 피아니스트에게 기교를 요구하는 곡으로.
오케스트라 역시 그전 시대의 곡들 과 달리 피아노와 동등한 입장에서 어울리기에 바이올린은 말할 것도 없으며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와 같이 주선율을 담당하는 관악기의 역할이 컸다.
마리 얀스와 가우왕은 이와 같은 곡의 특성과 그들의 연주 실력을 잘 활용해 고도로 정밀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춤추는 거 같아.’
한이슬 기자는 마리 얀스와 가우왕 의 연주가 마치 정열적인 춤을 추는 것 같이 느낄 정도였다.
과연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히는 로얄 콘세트르허바우와 피아노의 황제 가우왕다운 공연 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텐션 엄청 높잖아.’
이시하라 린은 힘껏 치고 나오는 피아노와 그에 질세라 날렵하게 휘감는 바이올린에 손을 꼭 쥐었다.
‘오보에랑 클라리넷이 반복하는 부분이 좋은데.’
이필호 편집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러나 음악을 직접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훨씬 놀라고 있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최지훈은 2악장에 들어서 여덟 마디의 피아노 독주에서 가우왕의 진가를 여실히 느꼈다.
가우왕은 2악장을 시작하기 전 천천히 몸을 숙였다. 건반에 닿을 듯 했고 감정이 충만해졌을 때 조심스레 건반을 눌렀다.
고요했고.
애절함이 묻어나오는 피아노 소리만이 회장을 채웠다.
빠른 곡보다 느린 곡이 연주하기 까다롭고 감동을 주기도 힘들다. 지 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러지 않기 위해서는 음을 표현하는 데 능숙해야만 했다.
그 어떤 피아니스트라도 난감한 일이었으나 가우왕은 그 분위기를 확 실히 전달해냈다.
그 뒤에 로얄 콘세르트허바우는 베토벤이 16분 음표, 32분 음표, 62분 음표, 128음표를 사용해 섬세하게 표현한 E장조 I 부분을 마치 봄바 람이 일듯 따사로이 표현하며 분위 기를 확장해 나갔다.
1악장의 장대하고 정열적인 분위기 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는 쉬는 구간처럼 느껴졌지만 최지훈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오늘 베를린 필하모닉과 출연하기 로 예정된 거장 글렌 골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푸르트벵글러는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눈과 귀는 무대로 향한 채 고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현시대에 가능한 가장 뛰어난 기술적 연주라는 것을 모든 음악 가가 인정했다.
‘저런 연주를 어떻게 이기라는 말이야.’
‘이번에도 1등이네.’
‘높다.’
참가 악단 연주자와 다른 음악가들 모두 너무도 높은 벽을 맞이한 듯했다.
연주는 이제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가우왕의 독주.
풍부한 소리를 내며 저음계에서 고음계로 올라가 그곳에서 아름답게 울리는 가우왕의 피아노 소리가 이내 멈추었다.
잠시 빠졌던 왼손이 함께했고.
동시에 오케스트라가 그 음을 따라 소리 내었다.
다시 피아노 독주.
가우왕은 마치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건반을 때려 냈다.
본래보다 훨씬 많은 음을 더욱 빠른 속도로 연주했고 그 즉흥적인 퍼포먼스는 오케스트라의 도움을 받아 더욱 힘차게 대미를 장식했다.
약 40분에 해당하는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의 연주가 끝나고.
“브라보!”
배도빈이 그 누구보다 먼저 일어섰다.
* * *
OOTY 오케스트라 대전 2라운드 의 빅 매치답게 언론은 뜨거웠다.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수백 개의 기사 가 연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에스트로 마리 얀스. 왕가의 전 통을 알리다】
[현대 클래식 음악은 어디까지 발 전했나, OOTY 오케스트라 대전 2 라운드 3조]
【미카엘 블레하츠. “놀랍도록 정밀 한 연주였다. 베토벤이 남긴 장치가 되살아난 듯하다.”]
【황제를 연주한 황제 가우왕]
[배도빈, 경쟁 악단의 연주를 듣고 가장 먼저 박수를 보내다1
[OOTY 오케스트라 대전 동시 접속자 1,700만 기록!]
쏟아지는 기사와 동시 접속자 수에 비례해 실황 중계 중인 채팅방도 무 서운 속도로 글이 누적되었다.
10분 전에 올라온 기사에는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고 그런 현상은 지 구 각지에서 공통되어 일어났다.
ㄴ 뭐야. 내 40분 돌려줘요.
ㄴ 고막에 꿀 발라주네;;
ㄴ 크…… 이게 마리 얀스지. 유채 화같이 다채롭고 음마다 선명하다.
ㄴ 진짜 음악이 이렇게까지 명료할 수 있나? 그러면서도 깊이감이 있으니 다 이해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ㄴ 가우왕 진짜 대박이네. 저런 속 도로 연주하는데 벨로시티 조절 미친 수준 아님?
ㄴ 괜히 황제겠냐. 배도빈한테 발린 뒤로 제대로 각성했지.
ㄴ 까다롭고 성격 나쁘기로 유명한 데도 피아니스트 중에 티켓 파워는 현재 원탑인 것만 봐도 뭐…….
ㄴ 도빈이 경쟁하고 있는 악단에게 진심으로 박수 보내는 거 너무 멋있다.
ㄴ 정말 가슴 울리는 연주네요. 듣는 내내 너무 행복했어요.
ㄴ ㅇㅇ. 나도 그거 보고 역시 배도빈이라 생각함. 인성이 됨.
ㄴ 배도빈 인성? 이 기사 보고 하는 말임?
ㄴ 기본적으로 애가 어렸을 적부터 주변에서 오구오구 해주면 기고만장 할 텐데 이런 거 보면 좀 대단한 것 같음.
ㄴ 도빈이만큼 자부심 돋는 사람도 드문데?
ㄴ 입덕을 늦게 하신 분인 듯.
ㄴ[링크] 봐라. 왜 가우왕이랑 안 하냐는 질문에 눈 부라리면서 공개 적으로 무안 주는 애가 인성이 되었다고?
ㄴ 오늘부로 암스테르담 디지털 콘서트홀 정기 구독한다ㅠㅠ
ㄴ 근데 원래 이 곡이 저렇게 이어 졌나 싶네. 피아노랑 오케스트라랑 이어지는 부분이 다른 연주랑 다르게 엄청 부드러운데.
ㄴ 마리 얀스랑 가우왕이 그 부분을 엄청 신경 쓴 듯. 지휘자마다 다르겠지만 의도적으로 연결성을 더 준 거 같음.
ㄴ 저기 누가 분탕 치려고 하는 거 같은데.
ㄴ 먹이 주지 마. 원래 도빈이 까서 관심받으려는 애들 가끔 있음.
ㄴ 와 미쳤다. 1,700만 명이 들었다고?
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리 얀스와 가우왕의 연주에 깊이 감동한 최지훈은 가슴이 무거워 졌다.
‘이게…… 세계 최고의 무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상대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 오니 어깨가 짓눌리는 듯했다.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나 쇼팽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등 어려서부터 국제무대에서 활약했지만 이런 거장들의 세계에는 아직 미치 지 못했었다.
이제 막 프로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최지훈에게 이미 긴 시간 최고로 추앙받는 이들과의 경쟁은 아무 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을 추스르려 핸드폰을 꺼냈는 데, 마침 배도빈의 인터뷰 태도 논란에 관한 기사가 떠 있었다.
화가 날 걸 알면서도 최지훈은 그 것을 눌렀고 곧 배도빈이 무슨 이유로 화를 냈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도 즐거워하는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저질 질문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최지훈이 무시당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더욱 무거워졌다.
‘안 돼.’
그러나 최지훈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사소한 걱정 때문에 포기하면 배도빈과 함께 음악을 하고 싶다는 바람 도 최고의 연주를 하고 싶다는 꿈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되뇌면 되뇔수록 진심을 다해 환호한 배도빈이 더 대단해 보였다.
“왜 그렇게 봐?”
“대단해서.”
“……난 대단하긴 하지만 갑자기?”
“경쟁이잖아. 난 방금 연주 듣고 막막했는데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 니까 아직 멀었구나 싶네.”
최지훈의 말을 들은 배도빈은 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그리고 투덜댔다.
“언제까지 꿈만 꿀 거야?”
“어?”
“마리 얀스랑 가우왕 대단했지?”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고 배도빈은 빈 무대를 보고 있었다.
“다음 차례인 런던 필하모닉도 대단할 거고 오후에 베를린 필하모닉 이랑 글렌 골드는 훨씬 더 멋질 거야.”
배도빈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의아해하는 최지훈을 보며 배도빈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저 무대에 오를 사람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인정해서. 내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 피아노 가 필요하다면 사카모토도 아니고 가우왕도 아니고 니나도 아니야.”
“도빈아.”
배도빈이 시선을 다시 무대로 옮겼다.
“내년 이맘때면 오케스트라를 만들거야. 그때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아 니라 내가 뽑은 사람들과 이 무대에 서겠지.”
“어?”
“지금은 그때를 위한 연습이야.”
‘그런 생각이었구나.’
최지훈은 오케스트라를 만든다는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슷한 또래가 악단을 구성하고 세 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모이는 이 무대에 오를 것을 말하고 있었다.
와닿을 리 없다.
하지만 배도빈의 말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베를린을 떠난다고 했구나.’
멀다.
아직 그림자도 찾지 못했는데 배도빈은 또 한 번 멀찍이 달아나버린 듯했다.
“그러니까 널 못 믿겠으면 날 믿어. 넌 지금 그대로도 충분해.”
최지훈이 슬며시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쿡쿡 소리를 냈다. 곧 공연이 시작될 터라 최대한 참으려 했지만 자꾸만 삐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배도빈이 인상을 쓰고 물었다.
“뭐야?”
“아니. 그게 사기꾼 같잖아.”
“뭐?”
“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믿으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는 사람일수록 믿지 말라 하셨어.”
“난 그래도 돼.”
“그 말도 조심하라 하셨어.”
심통 난 배도빈이 다리를 꼬았고 간격을 두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뭐가?”
“들어올 거냐고.”
“생각해 볼게.”
최지훈이 싱글싱글 웃으며 답했다.
힘든 일은 많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나아가는 길은 험하지만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에.
최지훈은 마침내 마음의 짐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