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48화 (24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48화

    55. 사기꾼들(4)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이 앞으로 계속된다 할지라도 이만한 음악가들 이 한 조에 모여, 최고의 피아니스트와 함께 경쟁하는 일은 흔치 않을 터였고.

    그와 같은 생각에 콘서트홀 주변은 이른 아침부터 북적였다.

    “근데 2라운드 곡은 왜 현장 발표하는 거예요?”

    “글쎄……. 아마 피아니스트 구하는 것부터 문제여서 그러지 않았을까? 그 전부터 협의하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수도 있을 테니까.”

    “확정된 곳도 있었을 텐데 아마 발 표하는 곳과 하지 않는 곳이 갈리면 여러모로 안 좋으니 일괄적으로 현 장 공개를 하나 봐.”

    “패자부활 제도 도입도 그렇고 처 음이라 그런지 문제가 좀 보이긴 하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이필호, 정세윤, 차채은이 이것저것 대화하고 있을 때, 한 여성이 그들 에게 다가갔다.

    “대리님.”

    이필호 편집장이 돌아섰다.

    “아,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대리님은 늙지도 않으시나 봐요. 세윤 씨도 잘 지내셨죠?”

    “아……. 네.”

    이필호와 여성이 대화를 나누기 시 작했고 걸으며 이야기하다 보니 자 연스레 이필호와 정세윤 사이에 거

    리가 생겼다.

    차채은이 정세윤에게 붙어 물었다.

    “누구예요?”

    “한이슬이라고 기자 겸 평론가.”

    정세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이 슬 기자를 노려보며 답했다.

    ‘한이슬?’

    들어본 이름이라 기억을 더듬는데 정세윤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원래 관중석 기자였는데 음악기행으로 넘어갔어. 10년쯤 되었으려나.”

    정세윤이 묘하게 거리감이 없는 이 필호와 한이슬 사이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차채은이 보기에 몹시 불쾌한 듯했다.

    “편집장 진급하신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대리님, 대리님이야. 차라리 이름으로 부르든가.”

    괜히 건드렸다가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차채은은 마침내 한이슬이란 이름을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렸다.

    “아.”

    “왜?”

    “아니에요.”

    ‘그때였지.’

    2014년 배도빈과 홍승일의 연주회는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큰 파장을 남겼었다.

    더 이상 들을 수 없기에 더욱 아 련한 공연이었고 차채은도 기억에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

    유명한 공연이었던 만큼 관련한 여 러 기사와 칼럼, 평론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았던 글이 바로 한이슬의 칼럼이었다.

    공연장을 찾은 일화를 담담한 어조 로 솔직하게 적어낸 그것은 당시 방 문했던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샀고 그러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당시의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었다.

    차채은 역시 좋게 읽었기에 기억하 고 있었다.

    ‘ 예쁘다.’

    그걸 떠올리니 차채은의 눈에도 한 이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턱선 아래로 좀 더 길게 내려온 중단발에 살짝 뻗친 웨이브.

    겉에는 더블 버튼의 카멜색 롱코트를 걸쳤고 낮은 굽의 단화를 신고 있었는데 16살의 차채은에게는 어 른이라는 느낌이 크게 들었다.

    “정말? 대회 끝날 때까지 있는 거 예요?”

    “그래. 제대로 해봐야지. 이 기회에 외국물 좀 마셔보고.”

    “아하하. 그게 뭐야. 대리님 진짜 못 말린다니까.”

    “권력이 좋지.”

    “아〜 진짜 부럽다.”

    이필호와 정세윤은 ‘관중석’에서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내 OOTY 오케스트라 대전 기간 내내 잘츠부르크에 머물 수 있었다.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정세윤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으으. 말을 놓을 거면 그냥 다 놓으라고오. 진짜 재수 없어.”

    차채은도 그 부분에는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콘서트홀에 도 착했는데 다른 날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러지 않아도 피곤한데 사람이 많은 건 질색이라 돌아서 가려던 차, 누군가 내 이름을 외쳤다.

    “배도빈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자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최지훈, 소소, 나윤희, 진달 래와 떨어지고 말았다.

    최지훈이 손으로 콘서트홀을 가리 켜 먼저 들어가 있겠다고 전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일단은 멈춰 섰다.

    “배도빈 씨, 오늘 경연 예측 어떻게 하십니까?”

    “푸르트벵글러가 오늘 어떤 연주를 들려주는지 들으신 것 있으십니까?”

    “최근까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가우왕이 암스테르담과 함께하였습니다. 두 분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여러 질문을 들어주다가 가우왕과 사이가 나빠졌다는 질문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 질문을 한 기자를 봤더니 슬금 슬금 뒤로 물러났다.

    “오늘 공연에 대해 아는 건 없습니다. 팬으로서 즐길 생각입니다.”

    적당히 대답해 주고 다시 발을 옮기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조금 떨어 진 곳에서 났다.

    “2라운드 목표는 어떻게 되십니까!”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시하라 린이 끙끙대며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다른 기자들 사이에 껴 얼굴이 보였다가 만다. 어지간히 힘든지 인상을 잔뜩 쓰고 있다.

    좀 재밌다.

    “당연히 1등이죠.”

    푸르트벵글러와 마리 얀스가 어떤 연주를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양보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시드권도 점수도 말이다.

    “최와는 어떤 곡을 준비하셨습니까?”

    “2라운드 참가하는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최의 참전이 이르다는 평이 있습니다! 가우왕과 함께하지 않은 이 유가 무엇입니까!”

    신경 거슬리는 이야기를 누군가 했다. 가우왕가 틀어졌다는 헛소리를 했던 사람과 같은 목소리인 듯하다.

    “최지훈은 훌륭한 피아니스트입니다. 오래 준비했고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성을 찾고 차분히 대답했더니.

    “최와 같은 피아니스트를 데리고도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우승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순간 열이 뻗쳤다.

    “뭐?”

    주변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조 금 떨어진 곳에 아까 그놈이 있다.

    시끄럽게 물어보던 기자들이 입을 닫았고 시선을 피하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당신 어디서 나왔어.”

    다가가자 기자들이 슬금슬금 물러났고 놈의 목에 걸린 패스를 볼 수 있었다.

    들어보지 못한 곳이다.

    “리드릭지의 릭 페티크루 씨. 말 좀 가려 합시다.”

    클래식 음악의 발전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라는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의의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 무 례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 리 없다.

    ‘한심한 놈.’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최지훈은 최고 의 연주를 들려드릴 겁니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받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피곤한데 별 거지 같은 놈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뒤에서 기자들의 불만이 들렸다.

    “너 어디서 나온 놈이야?”

    “배도빈 인터뷰 따는 게 얼마나 힘 든 일인 줄 알아?”

    “여기 해먼 쇼익이 대표로 있는데 아니야? 거 아직도 옛날 버릇 못 고쳤어?”

    기가 찬다.

    “도빈아, 여기!”

    콘서트홀 안으로 들어섰는데, 최지훈이 손을 흔들었다. 기자들 때문에 헤어졌던 일행도 함께 있다.

    “으아. 너 진짜 엄청 유명하네. 난 그런 거 TV에서밖에 못 봤어.”

    진달래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있던 일이 라 혼자서는 괜찮지만 이렇게 일행 이 피해를 받거나, 무례한 말을 들을 때면 넌덜머리가 난다.

    최지훈이 웃으며 다가왔다.

    “큰일이었네.”

    “아니. 별일 아니었어. 들어가자.”

    공연장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지훈이 내빈에게만 주어지는 팸플릿을 주었는데 그것을 보니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마리 얀스와 가우왕이 내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준비한 모양이다.

    ‘재밌겠는데.’

    장대한 느낌을 주었던 3번과 기교 파의 가우왕이 어떤 식으로 어울릴지 기대된다.

    “가우왕 씨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 곡 3번이라니. 엄청 멋질 거 같아.”

    “그러게.”

    “오빠 어릴 때 많이 듣던 곡이야.”

    소소가 한마디 거들었다.

    평소에 쇼팽이나 리스트의 곡을 많이 연주하기도 하고 본인도 속주를 기반으로 한 기교에 자신을 보여서 그런 줄은 몰랐다.

    기대된다.

    “아, 세프도 베토벤으로 준비하셨구나.”

    나윤희의 말과 동시에 나도 푸르트벵글러와 글렌 골드가 준비한 곡을 확인했다.

    피아노 협주곡 5번이다.

    선정곡만으로도 푸르트벵글러가 피아니스트 글렌 골드를 얼마나 신뢰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섯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황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런 제목을 붙인 기억은 없다.

    또 멋대로 누군가 적어 넣은 게 널리 알려진 모양인데 빌어먹을 돼지 녀석이 빈을 점령할 당시 만든 곡이라 마음에 안 든다.

    “암스테르담이랑 베를린이 같은 생각인 거 같네.”

    “그러게.”

    최지훈의 말대로 마리 얀스와 푸르트벵글러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앙상블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듯하다.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인 5번은 3 번과 같이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만남에 초점을 맞췄었다.

    “으음. 런던 필하모닉은 멘델스존 2번이네.”

    “알아?”

    진달래의 중얼거림을 나윤희가 반갑게 물었다.

    “아니. 다들 말해보니까 아는 척 해봤어.”

    나는 진달래가 독일어를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잠시 후.

    사회자가 나와 오늘 일정을 간략히 소개했고 그 뒤에 첫 번째 연주를 맡은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트르허바 우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품이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하다.

    단원들 모두 행동거지가 반듯하다.

    “진짜 기대된다. 가우왕 씨와 암스 테르담의 협연이라니. 처음이지?”

    “모르겠어.”

    “아마 그럴 거야.”

    클래식 음악에 관련된 정보라면, 특히 좋아하는 분야라면 중독자로 보일 만큼 수집하는 최지훈의 말이 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 성격을 받아주는 악단이 있는 게 신기하지.’

    까다로운 스타일이라 가우왕 본인 도 남과 어울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니 협주곡 연주가 적을 것 같다.

    박수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마리 얀스와 가우왕이 함께 무대에 올라 있었다.

    두 거장을 향한 환호가 열렬하다.

    나와 일행도 박수를 보내 오늘의 만남을 축복했다.

    그나저나 하얀 정장이라니.

    아리엘 얀스가 누구 영향을 받았는지 알 것 같다.

    “가우왕 씨 멋있다……

    “저 사람이 언니 오빠 OK? 잘생겼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는지, 벌레를 봐도 표정 변화가 없던 소소의 얼굴이 있는 대로 뒤틀렸다.

    푼수데기 같은 모습만 봤던 나도 소소만큼은 아니지만 의아하다.

    이해할 순 없지만 남들이 볼 때는 멋진가 보다.

    고개를 돌려 최지훈을 보니 녀석도 반쯤 넋이 나가 있다.

    어렸을 적부터 팬이었으니 무리도 아니겠지만.

    하지만 나도 소소도 그리고 세계가 인정하는 피아노의 거장이다.

    장내가 고요해졌고 이내 마리 얀스가 악장과 가우왕을 차례로 보았고 가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마리 얀스가 톡톡 아기를 달래듯 손을 움직였다.

    그에 따라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묵직한 음으로 시작해 강약을 주어 드러나는 리듬감과 곧이어 이어지는 관악기로 동기가 반복된다.

    그 뒤에는 모든 악기가 주제를 확장시 킨다.

    음량이 풍부할수록 더 효과적인데 마리 얀스가 그 부분을 잘 의식한 듯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훨씬 장대 한 느낌을 잘 살렸다.

    ‘지금 생각해도 잘 만들었단 말이지.’

    역시 나다.

    작게. 작게.

    마리 얀스가 지휘봉을 든 손을 잽싸게 거두었고 로얄 콘세르트허바우는 당차게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 조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연주 했다.

    정확함과 풍부한 음량을 기반으로 하여 힘찬 느낌을 주는 연주다.

    ‘제1바이올린 수준이 높아.’

    다른 악기도 충실하지만 중간중간 돌출되는 제1바이올린이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이만한 연주는 베를린 필하모닉 A 정도에서나 느껴봤을 정도로 흔치 않은, 정제된 솜씨다.

    피아노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마리 얀스는 뒷모습만 봐도 매우 즐 겁게 보인다.

    주먹을 쥐고 두 손을 부드럽게 밀 고 당기며 악단을 조율해 나갔다.

    바이올린이 빠르게 현을 켜 긴장감을 높여주고 관악기와 목관악기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한 번 차분해진 뒤에는 다시 팀파 니와 함께 바이올린이 현을 빠르게 놀려 긴장감을 더한다.

    이렇게 점층적으로 준비한 음악적 구성을 마리 얀스와 로얄 콘세르트 허바우는 너무도 잘 표현했다.

    그리고.

    마리 얀스가 힘주어 소리를 잡아낸 뒤 가우왕을 향했다.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멈추고 동시에 시작되는 가우왕의 차례.

    타건에 무게가 실려 있다.

    마음을 담아 연주하고 있다는 뜻.

    악단과 피아노의 대화가 아름답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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