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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47화 (24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47화

    55. 사기꾼들(3)

    오늘 연습한 걸 정리하고 있는데 노이어가 찾아왔다.

    꽤 늦은 시간인데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온 듯하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요. 자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이 시간이면 한창이잖아?”

    마누엘 노이어가 숙소를 둘러보고 말했다.

    “어지러운 건 어떻게 안 되는구만? 적당히 해. 너 같은 애가 열심히 하 면 단원들 따라가기 버겁다고.”

    “그럼 A로 돌아가면 되겠네요.”

    “그건 좀 참아주라.”

    잠깐 농담을 나누는 동안 커피를 준비했다. 괜찮게 내린 것 같다.

    노이어가 향을 맡고는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내려놓았다.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일 때문에 왔어. 지금 이야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보고 있으니 말을 이어나갔다.

    “A도 그렇고 B도 그렇고 종종 너랑 세프의 내기 때문에 걱정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으면 농담이겠거니 해도 너나 세프나 소고집이잖아.”

    “아.”

    “그래서. 어떤데?”

    “아마 말 그대로지 않을까 싶어요.”

    “ 싶다?”

    “결과는 같겠지만.”

    “그건 무슨 말이야?”

    레몽 도네크의 일도 있었고 마침 루트비히 오케스트라에 관해 말할 적당한 때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먼저 물어주니 차라리 잘됐다 싶다.

    “적어도 전 최선을 다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아마 세프도 마찬 가지일 거예요.”

    “그럼 다행이지만…… 뭔가 말이 더 남은 것 같은데?”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네. 아마 내년쯤엔 떠날 거 같아요.”

    “뭐라고?”

    잘못 들었을 리 없다.

    놀라서 되묻는 것을 알기에 대답 않고 마누엘 노이어를 바라볼 뿐이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가 말을 삼 켰고 주변을 둘러보다 짧게 숨을 내 뱉었다.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물었다.

    “나한테는, 아니, 우리한테는 갑작 스럽지만…… 너한테는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네.”

    노이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유는 들려주겠지?”

    비록 실제로 함께한 시간은 3년이 채 안 되지만 이들을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내 삶의 일부분인 이들에게 감출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게 도리고 말이다.

    “오케스트라를 만들 거예요.”

    “뭐? 진심이야?”

    “준비는 꽤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번 오케스트라 대전을 하면서 더 늦으면 안 되겠단 생 각이 들었고요.”

    “늦다니? 너 이제 겨우 17살이잖아.”

    고개를 저었다.

    마누엘 노이어나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만 17세의 꼬맹이가 조급해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태어나고 17년.

    이 삶에 적응하고, 이 시대의 음악 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운영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 하기 위해 들인 17년은 결코 짧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도움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수입을 악단을 준비하는 데 투자했다.

    단지 곡을 만들고 지휘했을 뿐이라 면 한참 전에 가능했겠지만 전과 다른 상황과 소리를 되찾은 기적 그리 고 그때의 빈보다 더욱 많은 인재와 복잡해진 여건 등이 나로 하여금 욕 심을 내게 했다.

    오랜 기다림이었고.

    준비하는 내내 즐거웠다.

    이제는 더 참을 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의 건강과 사카모토의 성성하게 센 머리카락이 마음에 걸 린다.

    어렸을 적부터 음악에 대해 마음껏 대화할 수 있었던 두 사람도 벌써 일흔을 넘겼다.

    만날 때마다 세월의 흔적이 짙어졌고 나는 더 늦기 전에 그들에게 내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이 시대와 위대한 두 음악가와의 대화를 통해 만든, 이 루트비히의 음악이 어떤지 들려주고 싶다.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가 아니 면, 그 음악을 바닥까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없을 테니까.

    ‘같은 세대로, 아니,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좋았을 텐데.’

    두 사람을 생각하면 죽어가고 있을 무렵 만난 슈베르트와의 안타까운 만남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이 런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겠지.

    “더 기다릴 수 없으니까요.”

    “……진심이네. 서운하지만 응원해 줘야겠지. 당장은 미안. 좀 충격이 라.”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응원이든 서운함이든 모두 진심일 거라 생각한다.

    그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리 없다.

    도리어 서운해하지 않으면 이쪽이 불쾌할 거다.

    그만큼 진심으로 대했고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함께했으니까.

    노이어가 다소 침울하게 말했다.

    “다들 슬퍼하겠네. 떠나기 전까지 후회 없이 해보자.”

    “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요.”

    “아쉽다.”

    “언제까지나 베를린에 있을 순 없으니까요.”

    마누엘 노이어가 일어났고 악수를 나눈 뒤 배웅했다.

    다시 혼자 남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도빈이는 쇼팽 콩쿠르 이후 폴란드 에 있던 내게 전화를 걸어 종종 투 덜대곤 했다.

    수학이 어렵다.

    빨리 베를린에 가고 싶다.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 준비했던 몇 년이 도빈이에게는 무척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음악만 해왔던 탓인지 음악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조금 심 하다 싶을 정도로 상식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도빈이는 중학교, 고등학 교 검정고시를 3년 만에 합격했고.

    그것은 모두 최대한 빨리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표현은 잘 안 하지만 베를린에서 생활하는 도빈이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도빈이가 내기에서 일부러 지고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는 일은 상상 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럴 거라면 나를 불렀을 리도 없다.

    그러니 더 걱정이다.

    대체 무슨 일일까?

    도빈이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헤어 지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희미하게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 했다.

    6월의 고요한 밤과 낡은 호텔 그리 고 찬 새벽 공기를 통해 들리는 차 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 이건.’

    오늘 합동 연습 때 내가 했던 연주다.

    의식할수록 신경 썼던 곳과 놓쳤던 부분까지 똑같다.

    이런 연주가 가능한 사람이 달리 있을 리 없다.

    연주는 때때로 끊어졌다.

    사이마다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고 졸음이 몰려드는 것에 맞춰 피아노 소리가 조금씩 작아진다.

    실수와 부족함마저 기억하고 연주 하여 아마 내일은 또 악보가 달라져 있겠지.

    이름 모를 벌레의 울음소리와 어울 려 들리는 협주곡의 편린이 조금씩 멀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윤희는 바에 퀭하니 앉아 있는 배도빈과 최지훈을 발견했다.

    두 사람 모두 잠을 잘 못 잤는지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고 배도빈 앞 에는 오늘도 커피 잔이 반쯤 비어 있었다.

    “무, 무슨 일 있어?”

    이제 겨우 막 2라운드가 시작되는 데, 나윤희는 벌써부터 무척 피곤해 보이는 배도빈이 걱정되었다.

    “ 없어요.”

    커피도 그리 도움이 안 되는지 배도빈은 힘이 없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 네, 네. 안녕하세요.”

    최지훈이 자리를 권했고 나윤희는 조심스레 합석했다.

    ‘……바로 일어나면 예의가 아닌가.’

    음식을 가져와야 하는데 자리를 권 유받아 앉아버린지라 언제 일어나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심드렁하게 있던 배도빈이 칠 리소스를 베이스로 고기와 야채 밥을 싼 랩을 가리켰다.

    “이거 먹을 만해요.”

    “아, 응. 고마워.”

    나윤희가 일어서 뷔페로 향했고 배도빈은 포크로 애꿎은 접시를 괴롭혔다.

    “되게 조심스러우신 분 같아.”

    최지훈이 작게 말했다.

    9살이나 차이가 있는데도 항상 존 대해 주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조금은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불편하신 걸까?”

    배도빈 덕에 사석에서도 몇 번 일 면식이 있었고 함께 공연도 준비했던 만큼 살갑게 대했는데,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바람에 최지훈도 조심스러워졌다.

    “아냐. 원래 저래.”

    배도빈이 포크를 내려놓고 커피 잔을 들었다.

    “알고 보면 멋진 사람이야.”

    최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최지훈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직전, 배도빈이 감탄사를 냈다.

    “2악장 도입 말이야. 이런 바이올린을 좀 더 당길 거야.”

    배도빈이 흥얼거리며 수정한 부분을 설명했고 최지훈은 문득 어젯밤 잠들기 전의 기억이 떠올라 웃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그만두려는 이 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말해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자신의 버릇과 실수까지 기 억해 복기하고 조율할 정도로 열정 적인 형제와 함께 전력을 다할 때라 여겼다.

    “응.”

    “왜?”

    “아니. 평소보다 헤실대는 거 같아 서.”

    “그게 무슨 말이야?”

    “바보처럼 웃는 거.”

    “뭐? 바보처럼?”

    “매일 그런데 방금은 좀 더 그랬어.”

    “그러는 넌 매일 인상 쓰고 다니잖아! 성경 정말 못돼 보여!”

    “난 성격 안 좋은 거 맞아.”

    방금까지만 해도 조용히 아침 햇살을 맞이하던 두 사람이 난데없이 다 투기 시작했다.

    음식을 가져온 나윤희는 그것을 보고 갈팡질팡하다가 조용히 구석에 자리 잡았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 2라운드의 세 번째 날이 밝았다.

    지난 1조의 경우 런던 심포니와 그레고리 소콜라브가 74점으로 1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와 안나 피에르 바가 20.7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2조는 1위와 2위의 점수 차이가 거의 없는 수준으로 치열했는데 시 카고 심포니가 37.8점으로 1위, 부 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36.9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두 조 모두 3위와 4위의 점수는 1, 2위에 비해 턱없이 낮아, 엄선된 24강에서도 각 악단 사이의 격차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2라운드 3일차.

    빅 매치가 예정되었다.

    정세윤 기자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콘서트홀 안에 카메라와 노트북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기에 제한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정보를 기록하기 위해 체크리스트를 확인하 고 또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이필호 편집장과 차채은과 함께 콘서트홀로 향하니 공연

    시작 2시간 전이었다.

    “ 아하아암.”

    “많이 졸려?”

    “괜찮아요. 밤을 새웠어도 오늘은 놓칠 수 없죠.”

    차채은의 말에 정세윤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와 베를린 필하모닉 A 그리고 런던 필하모닉이 경쟁하기 때문이었다.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백작 마리 얀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중의 거장들 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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