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46화 (24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46화

    55. 사기꾼들(2)

    ‘진짜 못됐어.’

    도빈이가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자신만만한지 모르겠다.

    상대는 모두 거장 중의 거장들이고 심지어 어렸을 적부터 존경해 왔던 분들이다.

    가우왕 씨는 물론이고 글렌 골드와 크리스틴 지메르만, 그레고리 소콜 라브라니.

    도빈이면 모를까.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어쩔 거야. 정말.’

    이번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야 하면서 위기의식이라고는 조 금도 없어 보였다.

    도리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하니 답답하다.

    조바심내는 도빈이는 왠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심각하게 받아들여 줬으면 한다.

    “왜 그렇게 봐? 먹을래?”

    “됐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이거 들려줘.”

    “ 뭘?”

    악보를 들어 보이자 도빈이가 무심 하게 빵을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심술궂게 말했다.

    “피아니스트는 너야.”

    조금 화가 나서 일어났다.

    “어디 가?”

    “몰라!”

    연습하자.

    연습실에 도착하니 관리인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도 왔구나.”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쩌지. 오늘은 늦게까지 못 있을 거 같은데.”

    이곳에 온 지도 벌써 2주나 되었는데 그간 나 때문에 퇴근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열쇠 주시면 나갈 때 잠그고 나갈게요.”

    “으음……. 그럼 경비실에 두고 가 줄래?”

    “네.”

    열쇠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준비해 준 연습실은 채광이 좋아 포근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기분을 느낄 여유는 없다. 조금이라도 더 준비해야만 하기에 서둘러 피아노 앞에 앉았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러시아의 위대한 천재가 남긴 세 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로 만들어진 지 벌써 150년이나 되는,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는 교양이나 마찬 가지다.

    피아니스트라면 연주할 수 있는 것 은 물론이고, 반드시 연주해야 하며 동시에 프로로서 예술성과 가능성을 증명하는 곡이기도 하다.

    나도 몇 번 연주해 봤지만 이번만 큼은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복잡해.’

    도빈이가 재해석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그중에서도 피아노 파트는 단순히 음계가 많은 것 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늘림음과 당김음이 많아 박자 변형 이 많아 어떻게 연주하는지에 따라 차이가 클 것 같다.

    도빈이가 생각한 걸 들어볼 수 있다면 따라서 연주하기 편할 텐데, 정말 못됐다.

    우선 쳐보자.

    도빈이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상상하며 건반에 손을 올렸다.

    깊은 절망과 그 아래 숨겨진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처음은 호른과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연주로 시작해, 그 무거움을 피아노가 이어나간다.

    바이올린은 아마 이렇게 어울리겠지.

    새기듯이 연주하면서도 조금씩 소리를 죽인다. 연주는 차차 공백을 두면서 깊숙이 파고들 것이다.

    역시 너무나 좋은 곡이다.

    ‘이 부분은 의식하자.’

    실수 없이 연주하는 일은 쉽다. 틀리지 않을 때까지 연습하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렇게 연습을 반복하고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어떻게 연주했는지 찾아 듣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이 어 두워져 있었다.

    ‘벌써 11시네.’

    조 추첨은 벌써 끝났겠다.

    핸드폰을 꺼내 찾아보니 베를린 필하모닉 B는 5조에 배정이 되었다. 2라운드는 내일 하루 쉬고 모레부터 진행되니 5일이 남은 건데 그나마 시간을 번 듯하다.

    같은 조에 있는 악단은.

    ‘ 아.’

    모스코바 방송 차이코프스키 오케스트라와 션윈 심포니 그리고 시카고 심포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와 성신 형 그리고 톰 앤드류.

    2라운드라 그런지 같이 배정된 악 단도 피아니스트도 대단한 사람만 모였다.

    게다가 성신 형과 톰 앤드류라니.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젓고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쯤 흘렀을까.

    틀이 잡힌 듯해 혹시나 놓친 부분 이 없을까 하고 악보를 다시 보는데 보면 볼수록 도빈이가 왜 이 곡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얼핏 장중한 음에 속을 수 있지만 알면 알수록 무척 슬픈 곡이다.

    하강하는 음계를 음미하다 보면 무 겁게 배치된 도발적인 음들이 차이 코프스키의 절규인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점차 고조되고 하강하길 반복하며 마음을 들었다 놓는데 마지막에 이 르러서는 높은 음계의 피아노와 함께 그렇게 아름다울 수도 없다.

    도빈이의 첫 모습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 곡을 더욱 잘 연주하지 못하는 게 분하다.

    ‘어떤 느낌인지 들려주면 좋을 텐데.’

    최근 1년 사이에 지휘자로서 자리 잡은 도빈이는 지금도 피아니스트로 서 나보다 훨씬 앞서 있을 거다.

    도빈이를 위해서라도 적어도 그만 큼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 는데 무슨 생각으로 날 이렇게 믿는 지 모르겠다.

    내가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것 정 도는 잘 알고 있을 텐데.

    정말 못됐다.

    연습하자.

    다음 날, 베를린 필하모닉 B와 함께 연습했다.

    “지훈, 잘해.”

    지켜보고 있던 소소 누나가 엄지를 보여주었다. 1라운드 때 참가했던 소소 누나는 3라운드를 준비하기 위 해 잠시 빠져 있는데 그런 와중에도 연습마다 함께한다.

    “이 정도로는 곤란하지.”

    “아.”

    찰스 브라움 씨가 다가왔다.

    “단원들도 너도 부족해. 합동 연습 은 이틀밖에 안 남았으니 잘 준비해 야 할 거야.”

    “ 네.”

    “브라움 재수 없어.”

    “뭐, 뭐?”

    소소 누나 덕분에 웃었지만 찰스 브라움 씨의 말이 맞다.

    찰스 브라움 씨나 소소 누나는 말 할 것도 없고 윤희 누나, 디스카우 씨, 마르코 씨도 멋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베를린 필하모닉 B나 나나 도빈이를 따라가기엔 부족하다.

    소소 누나와 찰스 브라움 씨도 라 운드를 번갈아 준비하는데 도빈이는 연주마다 악보를 새로 쓰듯이 하니 감탄하면서도 조금 걱정이기도 하다.

    ‘찰스 브라움 씨 말이 맞아. 나라 도 더 열심히 해야 해.’

    개인 연습실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지훈! 지훈! 잠깐만!”

    리스텀지의 사라 씨다.

    나와 관련한 기사는 모두 작성해 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사라 씨.”

    “어휴. 어제 숙소 앞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아니? 대체 연습을 몇 시 까지 하는 거야?”

    난감해서 웃음으로 넘겼다.

    “잠깐 괜찮아? 시간 오래 빼앗진 않을게.”

    “네. 저녁 먹으면서 괜찮죠?”

    인터뷰로 시간을 뺏기는 건 그리 반갑지 않다.

    더군다나 지금은 더더욱.

    “그럼. 가자.”

    주문을 하자마자 사라 씨가 수첩과 녹음기를 꺼냈다.

    여러 번 만나기도 했지만 이렇게 서둘러 줘서 좋다.

    “그럼 베를린 필하모닉 B와 함께 하기로 한 것부터 물어볼게. 어떻게 된 거야?”

    “도빈이가 연락을 줬어요. OOTY 오케스트라 대전 2라운드 때 오라 고.”

    “어?”

    “처음에는 초대하는 줄 알았는데 악보부터 주더라고요.”

    “둘이 친한 건 여전하구나.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심플하네.”

    “저도 가끔 당황해요.”

    사라 씨가 펜을 돌리며 물었다.

    “그럼 다음 질문.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을 본 감상은?”

    “정말 대단해요. 이만한 규모는 처음 보고 1라운드 연주마다 감동했고 많이 배웠어요.”

    “그중에서 최고라면?”

    사라 씨가 얼굴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요.”

    “B겠지?”

    답하지 않고 웃었다.

    “자, 그럼 2라운드 때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최성신, 톰 앤드류를 상대하게 되었어. 대진은 어때?”

    “잘 준비해야겠죠.”

    “그다지 감흥이 없구나?”

    대답하지 않자 사라 씨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피아니스트로서는 최성신과 톰 앤드류가 우세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 두 사람 모두 여러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티켓 파워도 갖 췄으니까. 그런 상대를 만났는데도 감흥이 없다는 건, 역시 천재라는 걸까?”

    인터뷰마다 했던 말들로 인해 나를 잘 아는 편인 사라 씨도 이런 질문을 한다.

    아무도 내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모른다.

    작년에 도빈이와 협연을 했을 때도 슬럼프라 고생했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알려지는 것도 반갑지 않다.

    다만, 지금 내가 대진 상대에 대해 그렇게 감흥이 없는 건 그들을 넘어서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이다.

    “도빈이가 구상한 연주를 표현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할 뿐이에요.”

    “음음. 모범적인 대답이야.”

    사라 씨가 펜을 들어 몇 마디 간단히 적었다.

    이런 내 생각이 언론에서 보면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거다.

    어렸을 적부터 음악 팬이나 언론에게 그런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진심을 속이고 싶지는 않다.

    사라 씨와 몇 마디 더 나누고 헤 어진 뒤 연습실로 향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2시가 조금 넘어 숙소로 들어왔는 데 도빈이가 머무는 방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아직 준비하고 있나.’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는데 안에 서 큰 소리가 났다.

    “뭐? 진심이야?”

    마누엘 노이어 씨의 목소리다.

    무척 놀란 듯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인지 심각한 대화를 하는 듯해 방해하지 않으려고 돌아서려는 찰나.

    도빈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요. 언제까지나 베를린에 있을 순 없으니 까.”

    무슨…….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왜 있을 수 없는 건데?”

    마누엘 노이어 씨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는 도빈이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날 거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갑작스러워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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