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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44화 (24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44화

    54. 다른 누구도 아닌(10)

    연습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배도빈을 찾은 최지훈은 악보에 파 묻혀 있는 배도빈을 볼 수 있었다.

    테이블은 물론이고 바닥 이곳저곳 에 악보가 널려 있었다.

    최지훈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살피고는 작게 웃었다.

    ‘여전하네.’

    어렸을 적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배도빈의 악보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본인은 기호와 지시문만으로는 이 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필체라고 하지만 최지훈은 어쩌면 단순히 악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악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은 뒤 배도빈에게 다가갔다.

    “연습은 언제부터야?”

    “지금부터.”

    최지훈이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물었다.

    “여기서?”

    “응.”

    “다른 분들은?”

    “너만 있으면 돼.”

    배도빈이 막 완성한 악보를 최지훈 에게 넘겨주었다.

    최지훈은 의아해했지만 그것을 받 아 들고는 훑어보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의 입이 벌어졌다.

    “카덴차를 다시 잡아봤어. 네게 맡기겠지만 참고해 보라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은 독주 피아노의 카덴차와 코다로 마무리되는 만큼 피아니스트의 부담 이 많은 곡이었다.

    더군다나 배도빈은 본인을 기준으로 잡기에 일반적인 경우보다 까다 로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 연습했을 때가 그러했고.

    이제 와 악보를 수정하는 것도 가 혹한 요구였다.

    최지훈은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자 리를 잡고 앉았다.

    ‘지시문이 너무 많아.’

    얼마간 악보를 탐독하던 그가 일어 나 피아노 앞으로 갔고 건반을 누르 기 시작했다.

    ‘ 아.’

    초견이었지만 최지훈은 배도빈이 어떤 이유로 카덴차를 수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름답고 다소 차분했던 부분에 템포의 강약이 강조되어 있었다.

    공백이 있어 음을 깊이 있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부분이 생겼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는 음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감성 적인 멜로디였다.

    ‘여태 이런 걸 만들었구나.’

    악보로 봤을 때는 와닿지 않았던 부분도 막상 연주를 해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도빈이는 천재야.’

    십 년 넘게 봐왔지만 이번에도 감 탄할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천재라는 단어에 집착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배도빈이 란 천재 덕분이었고, 한편으로는 더욱 갈망하게 된 이유도 배도빈 때문 이었다.

    이처럼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설레 게 하니 말이다.

    “좋네.”

    배도빈이 연주를 마친 최지훈에게 다가갔다.

    “이 부분은 좀 더 비워도 될 거 같은데.”

    “더 안달하게?”

    “맞아.”

    최지훈이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고 배도빈은 눈을 감고 그의 연주를 곱 씹었다.

    최지훈이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다소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처음 연주하는 데도 제법이다.

    어렸을 적부터 소리를 표현하는 일 에 남달랐던 만큼 잘 다듬으면 좋은 연주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천재라고 추앙받는 사람이든 자칭하는 사람이든 인정하지 않지만 이 녀석만큼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 야 할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슬럼프를 겪으며 약해졌던 녀석이 몇 달 사이 부 쩍 성장해 지금은 내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

    최지훈이 방금 지적했던 부분을 요 구한 대로 적당히 쉰 다음 연주를 이어나갔다.

    ‘좋네.’

    악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그런 지시문을 달았는지 이해하고 자신의 색을 덧칠해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지금 막 쉰 다음에 스타카토를 넣는 것도 좋은 느낌이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불평부터 했을텐데.’

    다른 피아니스트였다면 공연을 며칠 남겨둔 지금, 악보를 대대적으로 고친 것에 불만을 가질 것이다.

    내게 직접적으로 말하진 못해도 속으로는 궁시렁댔을 텐데 어찌 보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기껏 준비했던 것이 허사가 되는 거니 불만을 가질 수밖에.

    하지만 더 멋진 연주를 하기 위해 서라는 대명제 앞에 타협과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자세는 나나 아마데나 하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최고의 지휘자로 인정받는 푸르트벵글러와 마리 얀스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1라운드를 통해 왜 그들이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최고의 음악가라 불렸는지 증명해냈다.

    제아무리 대단한 지휘자라 해도 처 음부터 그런 연주가 가능할 리 없다.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곡을 쓴 나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연주를 완 성시 켰으리라.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현대의 거장들과 겨루는 것이다.

    내가 2라운드 협주자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최지훈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녀석만큼은 나와 같은 마음이다.

    가우왕도 니나 케베리히도 부쩍 성장한 최성신도 훌륭하지만 ‘성장’에 대한 열정만큼은 최지훈만 못하다.

    가우왕은 이미 본인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가다듬는 중이고 니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완성된 상태였다.

    자신이 개척하고 도달한 경지에서 스스로를 가다듬는 단계다.

    그러나 최지훈은 다르다.

    음색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타건을 조절함에 있어서도 악보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데 있어 모든 요소를 흡수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내 스타일을 포함해 가우왕처럼 연주하기도 하고 니나 케 베리히의 유니크함도 곧잘 따라 해 써먹는다.

    간혹 몇몇 사람이 최지훈에게 색이 없다고 비평하지만 모든 연주가 가능 하다는 것 자체가 녀석의 특징이다.

    과거, 아니, 지금 당장은 그것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어도 시 간이 흐른 뒤에 최지훈의 가치는 빛을 볼 것이다.

    욕심 많은 녀석에게 ‘범위’라는 것 은 없다.

    확신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간절 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 없는 녀석이야말로, 진정한 음악가라고.

    ‘천재’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그러 했다고 녀석을 보며 생각을 굳힐 수 있다.

    최지훈이 연주를 끝냈다.

    피아노에서 떨어져 테이블 앞에 앉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아아.”

    “왜 그래?”

    “너무 어렵잖아. 며칠이나 남았지?”

    최지훈이 손가락을 접으며 날짜를 헤아렸다.

    “내일까지 패자부활전이고 모레가 조 추첨……. 짧으면 4일밖에 안 남았네?”

    “할 수 있어.”

    “나 느린 거 알잖아.”

    녀석이 테이블 위에 쓰러지며 궁시 렁댔다. 그런 뒤에는 손가락을 튕기 며 새로 받은 악보를 복기했다.

    “다 하려고 하니까 느리지.”

    “그래야지!”

    나도 모르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잘 준비해. 푸르트벵글러랑 마리 얀스한테 보여주자고.”

    “으으. 그런 말 하지 마. 그러지 않아도 엄청 부담스럽다구.”

    “가우왕이 들으면 화내겠네.”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이하자고 했는데 너랑 한다고 거절했었어. 그 양반 성격에 자기 자리 빼앗은 네가 그런 말 하면 다신 안 볼지도 몰라.”

    장난스럽게 말하자 최지훈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말도 안 돼.”

    “그러니 열심히 해서 1등 하자.”

    “1등? 가우왕 씨랑 암스테르담이 있는데?”

    마리 얀스와 가우왕은 분명 가슴이 뛰는 만남이다.

    그들이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퍽 기대된다.

    “좋은 연주를 들려주겠지. 그래도 1등은 우리야. 3라운드 시드도 걸린 만큼 중요하단 말이야.”

    “……나 속이 좀 안 좋아지는 거 같아.”

    최지훈을 좋아하는 이유는 녀석이 진심으로 이런 상황을 걱정하고 또 두려워하면서도 의지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앞에서는 칭얼거려도 뒤에 가서는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응원차 동기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니나는 우승할 생각뿐이던데.”

    “니나 누나도 잘하니까. ……그러 고 보니 로스앤젤레스의 아리엘도 대단하더라. 그런 사람이 왜 지금까 지 잘 안 알려졌는지 신기하지 않아?”

    알려지는 게 LA 필하모닉에 해가 될 테니 잠시 쉬고 있는 구스타프 하나엘이 의도적으로 언론과 떨어뜨 려 놓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무대에서 제대로 보 여줘야지.”

    “ 뭘?”

    “언제까지 애 취급당할 거야. 좋아 하잖아, 니나.”

    “ 아.”

    최지훈이 가만히 있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게……. 아니야.”

    “뭐가?”

    “좋아하긴 해도 그런 게 아니야. 동경이라고 해야 하나.”

    최지훈이 묘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 했다. 쑥스러운 모양이다.

    “난 니나 누나처럼 재밌지도 않고 또 밋밋하잖아. 사람으로서도 피아니스트로서도 그렇게 분명한 게 진짜 멋지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좋아하는 줄 알고 이것저것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조금 미안해진다.

    “그래도 가우왕 씨나 니나 누나한테 인정받으려면 열심히 해야겠다. 아, 이따 LA 필하모닉 연주 들으러 갈래?”

    최지훈이 밝게 웃었다.

    응원 따위는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싫어.”

    “어? 왜?”

    “그놈 재수 없어.”

    “그놈? 아리엘 얀스? 왜?”

    대답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의 카덴차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틀간의 패자부활전 끝에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2라운드 진출 악단이 모두 정해졌다.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와 시카고 필하모닉이라는 공룡들과 같은 조에 배정되어 안타깝게 탈락했던 프랑스 국립방송 오케스트라가 패자부활전 1위로 무대에 복귀했다.

    잡지 르 몽드 드 라 무지크는 홈 페이지를 통해 오케스트라 내셔널 (프랑스 국립방송 오케스트라)이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진수를 보여줄 거라 선전했다.

    2위는 아리엘 핀 얀스의 로스앤젤 레스 필하모닉이 차지하면서 그들의 명예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 헝가 리의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패자부활에 성공하며 2라운드 (24강)의 마지막 자리를 채웠다.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각 언론사는 저마다 2023년 베스트 오케스트라 라는 제목으로 2라운드 진출 악단에 대해 소개하고 나섰다.

    1차전에서 획득한 점수 순으로 나 열한 이름들은 단어만으로도 묵직함 이 느껴지는 듯했다.

    1. 베를린 필하모닉 A

    2.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3. 베를린 필하모닉 B

    4.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5. 모스코바 방송 차이코프스키 오케스트라

    6. 빈 필하모닉

    7.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8. 므라빈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9.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0.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각 조에서 1위로 진출한 악단들은 대부분 조 2위와 큰 점수 차를 보였다.

    그러나 런던 필하모닉, 뮌헨 바이 에른 방송 교향악단, 드레스덴 슈타 츠카펠레 등은 10년 넘게 최고의 악단으로 손꼽혔던 곳이었고.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등도 유명하기로는 마찬가 지였다.

    몇몇 악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악단 이 상위 10개 악단과 크게 차이 난 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ㄴ 진짜 박 터진다.

    ㄴ 오매…….

    ㄴ 베를린 필하모닉은 왜 A랑 으랑 나뉘어서 들어가 있냨ㅋㅋㅋ 그것 도 베스트 3에 두 자리씩이낰ㅋㅋ

    ㄴ 그러게ㅋㅋㅋ 진짜 요즘 다 해먹고 다니는 듯.

    ㄴ 솔직히 한쪽만 나왔으면 개손해지.

    ㄴ 맞아. 잘하니까 순위에 오른 거지. 난 그보다 저기에 대한국립교향 악단이 있는 게 너무 신기하다.

    ㄴ 그러게. 진짜 소름 돋는 라인업인데 저기에 대한국립교향이 있네.

    ㄴ 1라운드 너무 많아서 유명한데만 골라 들었는데 2라운드부터는 그 냥 다 들어야겠다.

    ㄴ 피아니스트도 발표됨.

    ㄴ [링크]

    조 추첨 일정에 앞서 그간 비공개 했던 악단들도 2라운드에 함께할 피아니스트를 공개했고, 이에 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라모폰과 무지카, 포노 포룸 등 클래식 음악 전문 잡지에서는 이를 두고 지상 최대, 최고의 경합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대서특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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