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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42화 (242/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42화

    54. 다른 누구도 아닌(8)

    “니아 발그레이가 은퇴하고 얼마 안 된 일이었다.”

    푸르트벵글러는 평소와 달리 힘겹 게 말을 이어나갔다.

    “녀석에게는 어떤 사명감이 있었던 것 같았다. 니아의 공백이 컸던 만 큼 아마 책임감을 느꼈던 거겠지.”

    푸르트벵글러의 시선을 받은 케르 바 슈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악장 모두 같은 생각을 하 고 있었을 거라 쉽게 생각할 수 있었다.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을 사랑하니까.

    “녀석은 하루도 빠짐없이 연주회를 치른 날이면 악보를 가져왔다. 내 지휘를 분석한 것이었고 내가 보기 에도 완벽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알 수 있었지. 레몽 도네크가 니아의 빈자리를 채우려 하는 거라는걸.”

    고마운 일이다.

    매 연주를 준비하면서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법을 분석해 공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가 얼마나 베를린 필하모닉을 아 꼈는지,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 지 알 수 있었다.

    케르바 슈타인은 탄식했다.

    “레몽도……

    다들 케르바 슈타인을 보았다.

    “악장도 그랬어요?”

    한스 이안이 물었고 케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같은 생각이었을 테니까. 발 그레이 씨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어.”

    마누엘 노이어와 이승희가 길게 숨을 뱉었다. 당시의 일을 떠올린 듯 했다.

    한스 이안도 이를 꽉 깨물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헨리와 파울도 마찬가지였어.”

    “ 아.”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니.

    그걸 7〜8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서로 공유하다니 이 답답한 인간들이 얼마나 대화가 적은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의 말을 들을 수록 레몽 도네크가 왜 떠났는지 더욱 알 수 없어졌다.

    “힘이 되었다. 이렇게 다들 노력한 다면 계속 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줄어들고 있었죠.”

    케르바 슈타인이 푸르트벵글러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대신했다.

    니아 발그레이의 은퇴 후 베를린 필하모닉은 알게 모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악단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최고의 악단이 어디냐는 질 문에 베를린 필하모닉을 꼽는 사람 은 줄어들었다.

    마리 얀스의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와 빈 필하모닉은 날로 발전했고 런 던 필하모닉과 런던 심포니는 새롭 게 부상했다.

    매출은 늘어나고 있었지만 시장 확 대의 영향을 부인할 순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변 해야 했다.”

    “세프••••••

    이승희가 안타깝게 푸르트벵글러를 불렀다.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속으로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단원들에게 완고했던 만큼 그들의 지침서이자 스승이자 리더였던 푸르트벵글러였기에 상임 지휘자이자 총 감독으로서 단원들이 불안하지 않도 록 그 위치를 고수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서 지휘자로서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레몽 도네크가 지휘 봉을 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

    케르바 슈타인이 탄성을 냈다. 저도 모르게 낸 듯하다.

    “나는. 나는……

    푸르트벵글러의 목소리는 이제 잘 들리지 않았다. 너무 지쳐 보여 그 가 얼마나 고뇌했는지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다.

    “뭐가 문제예요? 설마 세프를 끌어 내리기라도 하려 했단 뜻이에요?”

    한스 이안이 물었다.

    푸르트벵글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문제될 게 없잖아요. 레몽 도네크라면 세프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훌륭한 지휘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요.”

    마누엘 노이어가 한스 이안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뒤돌아보자 고개를 저었다.

    이승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케르바 슈타인은 고개를 숙인 채 간혹 한숨을 뱉었다.

    나와 같이 다들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대충 이해하는 듯했다.

    나서서 물었다.

    “레몽 도네크는 인정받고 싶었던 거네요.”

    “••••••그래.”

    “세프는 선택할 수 없었고요.”

    푸르트벵글러도 난감했을 거라던 사카모토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니아 발그레이 뒤에 남은 악장들은 푸르트벵글러의 아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랜 세월 그와 함께했다.

    깐깐하다 못해 병적인 그의 완벽주 의에 부응해 수십 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서 활동했던 만큼 그들의 음악적 재능과 능력은 최고 수준이었다.

    당장 어떤 무대에 올라도 찬사를 받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한스 이안의 말이 정확했다.

    푸르트벵글러만 못하다.

    “시대는 변하고 나는 늙어갔다. 차기 지휘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몽은 분명 뛰어났지만 그건 헨리와 파울도 마찬가지였어. 그리 고 케르바 자네도.”

    네 명의 악장은 모두 비슷하여 어느 누가 더 뛰어나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케르바 슈타인은 가장 많이 신뢰받는 악장으로서 단원들은 문제가 생 기면 케르바 슈타인에게 상담 받았다.

    레몽 도네크는 다정했던 만큼 단원들이 감정적으로 가장 많이 의지했던 악장이었다.

    헨리 빈프스키는 과묵했지만 성실하여 단원들이 새로운 과제에 빨리 적응하도록 매번 작은 공책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다.

    파울 리히터는 사교적이라 단원들이 가장 편하게 여기는 악장이었다.

    음악적 소양은 비슷하고 각자의 장점도 달라 푸르트벵글러로서는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마도.

    “내가 가르쳤지만 모든 것을 판단 할 수는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어떤 식으로 운영해 나갈지는 본인 들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레몽 도 네크에게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어떤••••••

    “레몽 도네크가 보여준 악보는 내 가 고쳤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방식이었고 내 버릇까지 남아 있었어. ……녀석은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키고 싶었던 거다. 지금 까지 나와 우리가 했던 음악을 지키 고 싶었던 거야.”

    푸르트벵글러가 허탈하게 웃었다.

    “고마운 일이지. 너무도 고마웠지 만 그래서는 안 됐어. 그래서는 우 리의 무대가 떨어질 뿐이었어. 함께 했던 성을 지키기 위했던 레몽 도네 크의 진심은 너무나 고마웠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스 이안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그도 이해한 것이다.

    그들 스스로 가꾸고 번성시켰던 베를린 필하모닉.

    위기가 도래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 서든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레몽 도네크의 진심과 노력은 잘못 되지 않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저, 단지, 애석하게도 한계에 부 딪쳤을 뿐이다.

    너무나 오래 함께했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스승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가슴 깊이 존경했기에 레몽 도네크는 푸르트벵글러가 이룬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럴 때 네가 돌아왔다.”

    푸르트벵글러가 나를 보았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지. 몇 년간 지휘자가 되고 싶어 내게 어필 했던 녀석에게. 녀석에게……

    케르바 슈타인이 다시 한번 탄식했다. 그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레몽으로서는 어려웠을 테니까요.”

    푸르트벵글러가 강제 휴식기를 맞이했을 때 그 자리를 채웠던 케르바 슈타인의 말이었기에 무게가 실렸다.

    푸르트벵글러가 얼마나 많은 일을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 잘 아는 만큼 레몽 도네크로서는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그래.”

    푸르트벵글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직접 가르쳤고 베를린을 함께 지켜왔고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녀석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레몽 도네크만큼 대단한 사람도 드물잖아요. 그라면 분명 더 노력해서 나아질 수 있었을 거예요.”

    한스 이안이 고개를 세차게 젓고 푸르트벵글러의 말을 부정했다.

    마누엘 노이어가 괴로운 듯 눈썹을 좁힌 채 말했다.

    “레몽이 뛰어난 건 사실이야.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야. 세프는…… 자 신을 닮은 레몽이 앞으로의 베를린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거야.”

    노이어의 말이 맞을 것이다.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스승인 푸르트벵글러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푸르트벵글러 본인이 직접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녀석은 이내 포기하는 듯했다. 그 리고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것 같았다. 여러 차례 내게 메시지를 보냈 고 내 눈에도 평소와 다른 행동이 보였지만 나는 말릴 수 없었다. 녀 석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피어날 수 없다 해도 레몽은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도 부끄럽지 않은 녀석이었어. 그런 녀석이 지휘봉을 잡고 싶어 떠나려는 걸 내가 어떻게.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이냐.”

    그 이유가 그런 것이라면 더더욱.

    말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말을 마친 푸르트벵글러가 의자에 몸을 파묻듯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부탁했다.

    “녀석을 존중한다면 다들 이 이야 기는 가슴에 묻어주길 바란다.”

    다들 대답하진 않았지만 고개를 무 겁게 끄덕였다.

    배도빈과 케르바 슈타인 일행이 돌 아간 뒤 푸르트벵글러는 그간 어디 에도 말할 수 없어 쌓아왔던 짙은 슬픔에 눈물을 홀렸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자신을 향한 레 몽 도네크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를 선택할 수 없었다.

    시대는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음악은 시대를 노래하는 일이었다.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 중한 보물이나 과거에 살아서는 더 이상 발전은 있을 수 없기에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의 정기 연주회를 누 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레몽 도네크를 지휘자로 올릴 수 없었다.

    그것만이 답이라 생각하는 게 잘못 이라는 걸 알면서도 레몽 도네크의 음악적 지향점을 고칠 순 없었다.

    모두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기 때문 이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진심으로 그를 가 장 아끼는 제자라 생각했고 자식처럼 헤아렸지만 그 전에 하나의 음악 가로 여겼다.

    그저 언젠가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랄 뿐 레몽 도네크가 어렸던 시절처럼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사흘이 홀러 7일차에 접어든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는 또 다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바로 최명운 지휘자가 이끄는 대한 국립교향악단이 바르샤바 국립 필하모닉과 치열한 접전 끝에 조 2위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것이었다.

    점수가 발표되고 주먹을 꽉 쥔 최 명운 지휘자와 눈과 코와 두 발을 있는 대로 펼쳐 환호하는 대한국립 교향악단의 사진은 그날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 홈페이지의 메인을 장 식했다.

    현재까지 2라운드 진출이 확정된 악단은 총 14개로 모두 각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악단이었다.

    은난새, 최명운, 박건호, 홍승일.

    이승희, 남궁예건, 손가을, 최성신, 이승훈, 나윤희.

    최지훈, 배도빈까지.

    종종 뛰어난 음악가를 배출하면서 도 클래식 음악의 불모지라 여겨졌던, 그리하여 오케스트라 운영이 힘 들었던 대한민국에서 세계 수준급 악단이 있다는 사실에 이목이 집중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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