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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41화 (24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41화

    54. 다른 누구도 아닌(7)

    “편 가르기라. ……그 부분에 대해 서는 다른 생각이네. 의미 없지 않아.”

    사카모토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오케스트라 대전도 그러하고 각 콩쿠르도 그러하고 애초에 사람은 경쟁자를 통해 성장하기 마련이네. 전통을 중시하든 변화를 추구하 든 그 경쟁 속에서 발전이 생기는 게지. 실제로 런던 심포니와 런던 필하모닉 모두 브루노와 토스카니니 가 합류하면서 더 완성도 있는 악단 이 되지 않았는가.”

    사카모토가 턱을 당겼다. 그가 쓴 안경이 살짝 내려왔고 사카모토의 맑은 눈이 그대로 내게 향했다.

    “베를린 필하모닉도 마찬가지고 말일세.”

    사카모토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웃었다.

    어쩌면 사카모토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야 상황이 어떠하든 내 할 일을 했겠지만 실제로 베를린 필하모닉은 위기감을 느껴 단 1, 2년 사이에 많은 부분에서 개혁해 왔다.

    푸르트벵글러 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 기준에 충족하는 후보가 없다는 이유로 단원 한 명을 받는 일조차 몇 년간 미뤄왔던 고집불통 이었다.

    단원들이 만성피로에 찌든 것도 모 두 그 탓.

    하지만 2년 사이에 단원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났고 정기 연주회만 고집했던 예전과 달리 이벤트성 공연 도 잘 이어오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생기면서 가 능했던 일이기도 하나, 그 외에도 콘서트홀을 대대적으로 확장한 것부 터 디지털 콘서트홀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까지.

    2010년대까지의 베를린 필하모닉 과 지금의 베를린 필은 전혀 다른 악단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떤 음악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곡을 쓰고 지휘를 하는 내 영향이 컸 지만 이런 식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의 태도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마도.

    아니, 분명 사카모토의 말대로 런 던과 인터플레이를 의식한 탓일 것 이다.

    “그러네요.”

    순순히 인정했다.

    인터플레이가 거지 같고 하찮은 놈 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과 직원 모 두 더욱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 런던 심포니와 런던 필하모닉 도 그들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 여러 모로 힘썼을 것이다.

    두 악단 모두 최근에 인터플레이에 게서 완전히 독립한 것만 봐도 그들 에 대해서는 분명 느끼는 바가 있어 보인다.

    “음..."

    대화가 어느 정도 맞닿아 마무리 되고 있는데 히무라가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 인상을 쓰고 있다.

    “왜 그래요?”

    “아니, 뭐.”

    아니라고 말하면서 탐탁지 않은 느낌이 얼굴 가득이다.

    “우리 사이에 편하게 말해요.”

    “그래서 더 불편하지. 네가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아니까.”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요?”

    "음."

    “히무라.”

    “……레몽 도네크 씨 이야기야. 잠깐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푸르트벵글러와 네가, 아니,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레몽 도네크 씨는 대체 왜 런던으로 향했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난 실은 추구하는 음악이 달랐기 때문이라 생각했거든.”

    그건 나도 다른 모든 단원도 모르는 일이다.

    경제적 문제일 수도 있다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을 뿐 사실 단원들 사이 에서도 히무라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에게서는 어떤 말도 듣지 못했으니까.

    대답 대신 물어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히무라는 음악적 견해가 달랐기 때문에 옮겼 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요?”

    “외부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지. 한창 베를린과 런던이 편 가르고 싸울 때의 일이었으니까. 찰스 브라움이 베를린 필에 합류했을 때도 여러 말이 나왔어. 하물며 20 년 이상 자리를 지켰던 레몽 도네크 의 이적이었으니 있는 말 없는 말 다 나올 수밖에.”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그 이유 때문인가 싶기도 한 것이 베를린 필하모닉 B뿐 만이 아니라 A도 녹음 이외의 일에 서는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 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푸르트벵글러나 악장단에게 상의라도 했을 텐데.

    그 점이 의문으로 남았다.

    그때 사카모토가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빌헬름도 난처했을 테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말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네. 어떤가, 도빈 군. 시간이 늦지 않았으니 직접 들어보는 것이.”

    두 사람과 헤어지고 멀핀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A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물으니 마침 A쪽 직원에게 볼일이 있다며 로비로 내려왔다.

    “기다리셨죠?”

    “아뇨. 어디에요?”

    “가까워요. 두 블럭만 지나면 돼요.”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제대로 해보 자고는 했지만 굳이 숙소까지 따로 써야 하는 건가 싶다.

    멀핀 과장의 안내를 받아 호텔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가까워서 굳이 안내받을 필요도 없었을 것 같다.

    악단 직원이 한 명 내려와 멀핀을 맞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이르자 멀핀이 손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세프는 509호에 있어요.”

    “네. 고마워요.”

    내려서 멀핀이 알려준 방향으로 걷 자 이내 푸르트벵글러의 방이 보였다.

    문을 두드렸다.

    “저예요.”

    뭔가 안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잠시 뒤 카밀라가 문을 열었다. 조금 상기된 표정이다.

    “어서 와.”

    “……다음에 올까요?”

    “아냐. 무슨 소리야. 나도 일이 있어서 나갈 참이었어.”

    물끄러미 그녀를 보는데 푸르트벵글러가 헛기침을 하면서 외쳤다.

    “무슨 일이냐!”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사이에 카밀라가 급히 나가서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두 개의 와인잔과 촛농이 떨어지고 있는 촛불 그리고 넓은 창문 밖으로 멋진 야경이 보였다.

    푸르트벵글러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다.

    “방해했네요.”

    “뭘 방해해!”

    어깨를 으쓱인 뒤 앉았다.

    미안하긴 해도 푸르트벵글러와 카 밀라의 사이가 좋게 지속되는 걸 보 니 기분이 좋다.

    “대회 끝날 때까지는 보지 말자고 하지 않았냐.”

    “제가 우승하면 쫓겨나실 텐데 그전에 많이 봐야죠.”

    “흥. 오늘 점수를 보고도 태평하구나.”

    “2차전에선 찰스랑 지훈이도 합류 하니까 마음 놓고 있다간 큰일 날걸요?”

    “너야말로 긴장해야 할 거다. 네가 뭘 준비했든 내겐 안 될 거야.”

    화목한 인사를 나누고 본론으로 들 어갔다.

    “레몽 도네크 때문에 왔어요.”

    그를 언급하자 곧 푸르트벵글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녀석 이야기는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것도 그렇고. 세프한테도 말 없었어요?”

    “이미 끝난 일이다. 녀석은 다른 곳으로 갔고 우리는 그간 달라졌다. 그뿐이야.”

    “그렇다고 그와 함께한 시간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내 말에 푸르트벵글러가 가만히 잔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손으로 이마를 잡고 한동안 그러고 있더니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

    “갑자기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요.”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런던 필하모닉으로 갔고 아들 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당시 인터플레이가 거금을 들여 음악가를 초빙하는 것과 맞물려 그렇게 예상할 뿐.

    그런 상황이었기에 그를 걱정하면 서도 더더욱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뒤에 곧장 콘서트홀 확장 공 사라든지 악단 확대 편성, 자선 콘서트, 투란도트 등 바쁜 일이 겹치기도 했고 말이다.

    나도 다른 단원도 상황상 말하지 못했을 뿐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것을 푸르트벵글러가 모를 리 없다.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예요.”

    “이건 녀석과 내 문제다. 단원들이 알 필요 없어. 너와 악장단도 마찬가지다.”

    푸르트벵글러가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 태도가 안쓰러워 보일 정도 로 단호했기에 내 걱정은 더 커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뭔가 싶어 나가보니 케르바 슈타인 과 이승희, 마누엘 노이어 그리고 한스 이안이 서 있었다.

    “어?”

    다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의아해 하는 표정이다.

    “누구냐.”

    “말씀드릴 게 있어 왔어요.”

    이승희가 대신 답했다.

    푸르트벵글러가 궁시렁거리더니 들 어오라 했고 방은 금세 북적였다.

    대회 참가 인원이 많아 평소 쓰던 방과 달리 단출한 숙소라 더 그런 듯하다.

    “뭐야.”

    푸르트벵글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 사람이 시선을 교환한 뒤 케르 바 슈타인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2차전 연주곡을 바꾸시는 게 어떠 십니까?”

    “뭐?”

    푸르트벵글러가 잔뜩 인상을 썼다.

    “아름다운 베를린. 단원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케르바 슈타인의 말을 들은 푸르트벵글러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지금껏 퉁명스럽고 언짢은 얼굴은 많이 봤어도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케르바 슈타인은 그를 오래 만나왔던 대로 푸르트벵글러가 화를 낼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 말을 이었다.

    “새로 준비한 곡도 좋지만 이번 기 회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어떤 정신을 가졌는지 알리고 싶습니다.”

    푸르트벵글러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말을 가져 다붙여? 그 녀석을 감싸고 돌려는 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냐!”

    ‘무슨 일이지?’

    이들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어 일 단 잠자코 지켜보았다.

    “감싸고 도는 게 아닙니다. 이대로 헤어져 영영 없었던 일이 될까 두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돌아오라, 이 말을 하려 고 그 녀석의 곡을 연주하자는 말 아니야!”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 누엘 노이어가 케르바 슈타인을 대 신해 나섰다.

    “돌아올 거란 생각은 안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야죠. 전화를 해도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고 세프마저 감추고 있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레몽과 우 리가 적이 되어야 하는 겁니까?”

    역시 ‘아름다운 베를린’은 레몽 도 네크가 만든 곡인 것 같다.

    그와 함께 짧게는 수년, 길게는 20 년 넘게 함께했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단절된 그와의 관계에 답답함을 느꼈고.

    그동안 다른 일로 억지로 참았던 그 감정이 오늘 레몽 도네크를 다시 한번 만나니 터진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곡을 연주하자는 무리 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그것이 진심이든 아니든 적어도 단 원들이 레몽 도네크와의 일을 어떻게든 풀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으로 보는 게 옳을 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고집스러운 푸르트벵글러는 입을 열지 않을 테니까.

    “감추는 거 없고 그 헛소리도 받아 들일 수 없다. 나가.”

    “세프!”

    한스 이안이 나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가 우리에겐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세프에게까지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그 따뜻했던 사람이, 당신을 왕처럼 따랐던 사람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닫았고.

    한스 이안의 울먹이는 목소리만 방을 채울 뿐이다.

    “오늘 연주를 듣고 확신했습니다. 다들 알아요! 돈에 미쳐서 간 거라면 그런 연주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세프도 봤잖아요! 아직도 당신이 준 바이올린을 쓰고 있다는 걸!”

    “아들이 아팠으면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지 저들한테 손을 뻗었을까요? 대체 그가 변한 이유가 뭐냐고요!”

    “ 한스••••••

    케르바 슈타인이 탄식했다.

    “난 그 사람을 쫓아 왔어요. 제1바이올린 대부분이 그 사람에게서 오케스트라를 배웠다고요! 힘들 때 기 댈 수 있었던 그 사람이 베를린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대체 뭔 지 우리는 알아줘야 할 거 아니에 요!”

    푸르트벵글러가 괴로운 듯 이마를 짚었다.

    이승희가 오열하는 한스 이안을 달 래며 말했다.

    “세프, 우리는 이미 너무 긴 시간을 대화 없이 보냈어요. 이젠 루머가 아니라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우린 더 이상 우리를 잃고 싶지 않아요.”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승희 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차기 상임지휘자이자 총감독이었던 천재, 니아 발그레이.

    그를 잃었던 슬픔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말도 안 되는 작당을 해 푸르트벵글러가 쉴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사이에 레몽 도네크의 일까지 겹 쳤던 만큼 나도 실각이라는 황당한 일을 말리지 않았던 거고.

    방은 고요했다.

    잠시 뒤.

    푸르트벵글러의 잠긴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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