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40화 (24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40화

    54. 다른 누구도 아닌(6)

    “무슨……

    “세상에.”

    “79.2 라고?”

    “제임스! 빨리 기사 올려! 빨리!”

    “정 기자!”

    결과가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난리 도 아니었다.

    하지만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인 결과였다.

    멀핀 과장이 말하기로 대다수의 전 문가가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최고 점수를 80점 부근으로 예상하 고 있다고 하였다.

    심사 위원단에게 만점을 받더라도 나머지 70점을 팬 투표에서 획득해 야 하는데 총점 80점을 넘기 위해 서는 투표수의 71.4퍼센트를 획득해 야 한다는 말이었다.

    단순 수치만으로도 높은 득표율인

    데 전 세계에서 엄격한 룰을 적용해 선발한 41개의 악단이 모인 것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최고점을 80점으로 여긴 것도 납득되는 일이었다.

    내가 1차전 투표 비율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71.4퍼센트란 수치에 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래 준비했고 단원들도 충분히 노 력하고 있었기에 가능할 거라 생각 했던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 B조차 6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언론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성에 찰 리 없다.

    ‘기퍼센트……

    다시 한번 대형 스크린을 보았다.

    ‘우승하지 못하면 떠나라고 했던가.’

    이제 겨우 3일차에 접어든 오늘,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A 가 한계점이라는 71.4퍼센트에 매우 근접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79.2점을 획득하였다.

    장내는 다급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손을 바삐 움직이거나 소리를 치거나 전화를 거는 등 시장판도 이렇게 시끄럽진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재밌잖아.’

    역시 내가 선택했던 사람들답다.

    실현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총점 80점에 근접한 점수가 발표되자 팬 들은 열광했다.

    심사 위원단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 에 없었고 평단과 기자는 손을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것은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한 각 악단의 구성원들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A의 베토벤 5번 교향곡을 듣고 느낀 전율이 현실이 되어 그들의 마음에 부담을 지운 것 이었다.

    “맙소사.”

    누군가 흘리듯 말했다.

    “진짜 미쳤냐고.”

    “저 인간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베를린은 이런 음악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야말로 신문물을 접한 악단들은 기가 질렸고 그나마 베를린 필하모닉의 진면목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이 들조차도 1조와 3조의 결과는 충격 이었다.

    최근 1년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베를린 필하모닉이 수차례 언 급되었고 상업적 성공 역시 널리 알 려졌으나 이렇게나 큰 차이가 있을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조에는 로스앤젤 레스 필하모닉이, 3조에는 런던 필하모닉이라는 유서 깊은 악단이 있었기에 특히 팬 투표에서 압도적인

    격차가 날 줄은 상상할 수 없었다.

    2조 1위로 진출한 빈 필하모닉도 큰 점수 차이를 보였으나 마땅한 경 쟁자가 없었던 탓.

    세계 최고 수준의 악단이 둘 이상 경합한 1조와 3조에서 경악할 만한 스코어를 획득한 베를린 필하모닉의 존재감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일찌감치 떨어져 구경하고 있던 니 혼 필하모닉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호리이 유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왕과 폭군이라더니 진짜 최종 보스잖아……

    그 황당하고 친근한 표현에 동료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딴지를 걸 수 없었다.

    그 순간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이 시작되기 전 배도빈의 인터뷰 내 용이 떠올랐던 탓이다.

    ‘배도빈 악장,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겠죠?’

    ‘목표요?’

    ‘ 네.’

    ‘목표는 이루지 못한 일을 정할 때 하는 말이죠. 우승이란 목표는 제가 아니라 다른 분들이 가지셔야 할 것 같네요.’

    일찍이 배도빈은 베를린 필하모닉 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 여 기고 있었다.

    대단한 천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처음에 그 기사를 접했을 때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다들 자부심을 가지고 연주 회를 하고 있었던 탓인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배도빈이 그런 자신감을 보인 것이 선뜻 무서워졌다.

    단순히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 니라 진심으로 본인과 본인의 악단 이 최고라 여겼던 사실에 니혼 필하모닉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크나큰 벽을 맞이한 듯했다.

    그 감정은 정도의 차이일 뿐 음악 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때 사카모토와 히무라가 찾아 왔다. 서로 하는 일이 달라져 전과 달리 자주 못 만나서 더욱 반가웠다.

    기간으로 따지면 몇 개월 지났을 뿐인데 사카모토는 이제 머리가 완 전히 하얗게 되었고 히무라도 주름 이 생기기 시작했다.

    백발이 성성한 사카모토를 계속 쳐 다보자 그가 껄껄 웃더니 물었다.

    “신경 쓰이는가?”

    고개를 끄덕이니 사카모토가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때마다 염색하는 것도 번거로워서 말이지. 이왕 하얗게 된 거 아예 다 탈색해 버렸네.”

    “흰머리가 이렇게 어울리는 게 쉽 지 않다네.”

    확실히 사카모토도 정상은 아니다.

    “하하하하! 저도 조금씩 나기 시작 하는데 생각해 봐야겠군요.”

    “흠. 나야 풍성하지만 히무라 군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 않겠나?”

    “아••••••

    히무라의 등을 쓸어내린 뒤 오랜만 에 셋이서 함께 자리를 마련했다.

    당연하게도 주된 화제는 오케스트라 대전이었다.

    “또 내기를 했다고요?”

    “니혼 필하모닉이 그렇게 허무하게 질 줄은 몰랐지.”

    “확실히 팬 투표의 영향이 크긴 했네. 악단의 연주력뿐만 아니라 대중 성을 시험받는 자리라 봐야겠지.”

    니혼 필하모닉에 걸었던 히무라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 걸었던 사카모토 모두 결과 예측에는 실패했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이 있는 모 양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오늘은 좀 충격 이었죠.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 런던 필하모닉이 베를린 필하모닉에 이름 값이 떨어지는 곳은 아니니까.”

    히무라의 말을 들으며 포크를 놀렸다. 분위기는 그럴싸한 식당인데 음식 맛은 영 아니다.

    “그렇지. 사실 완성도에 있어서는 토스카니니가 나았네. 긴 시간 연마한 방식이었으니 안정감이 있지. 편 히 감상할 때는 그의 연주가 더 좋다고 생각하네.”

    “그럼 선생님은 베를린 필의 성적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감동이지.”

    사카모토의 대답이 너무 포괄적이었는지 히무라가 눈썹과 입을 모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들었다.

    곧 웨이터가 다가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주방에 한국사람 있어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웨이트가 고개를 돌려 가슴에 꽂힌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댔다.

    고개를 돌리자 히무라와 사카모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있습니다.”

    “칼칼한 음식 내달라고 해주세요. 이건 도로 가져가시고요.”

    버터와 치즈를 얼마나 때려 넣었는지 더럽게 느끼한 음식을 가리키고는 다시 대화에 동참했다.

    “하하하! 한국 사람은 어쩔 수 없구만. 매운 음식이라니.”

    “너무 느끼했어요.”

    “어릴 땐 잘 먹었는데 크니까 입맛이 달라지나 보네.”

    “그런가 봐요.”

    입 주변을 닦고 말했다.

    “저도 사카모토랑 같은 생각이에요.”

    “흐음. 이건 직접 들어보는 게 좋겠지.”

    사카모토가 히무라를 보며 말했다.

    “평론가들이 멋대로 런던파니 베를린파니 나누고 있지만 전 어느 쪽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상황 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볼 뿐이에요.”

    인터플레이로 인해 지겹게 이어진 이 이야기에 대해 직접 말하는 건 처음인 듯싶다.

    히무라가 상체를 앞으로 조금 내민 채 내 이야기를 들었다.

    “사카모토가 말한 것처럼 편안히 듣기에는 토스카니니처럼 안정적이 고 완성도를 높인 연주가 좋다고 생각해요. 오랜 시간 최소한의 변형으로 악기의 음색을 발달시켰으니 감 상하기엔 그만한 것도 없죠. 앨범을 낼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봐요.”

    “하지만 네 연주회는.”

    “네. 저는 연주회를 하는 거니까요.”

    히무라가 마침 좋은 지적을 해주었다. 사카모토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 이고 있다.

    “연주회를 찾는 사람들은 이미 앨범을 통해서든 다른 공연을 통해서 든 경험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똑같은 연주를 들려주는 건 연주회 로서의 가치가 없어요.”

    다시 태어나고 갓난아기였을 때 느꼈던 점이다.

    현대에는 녹음이라는 획기적인 기술이 생기면서 언제든 똑같은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매 연주가 모두 소중했던 내게 현대의 소모적이면서도 동시에 영구적 인 음악 감상 환경은 충격이었다.

    루트비히로서의 삶을 살 적에는 매 공연이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의 기술적 문제도 있었고 지금처럼 상설 악단도 없어서 같은 곡을 비슷하게라도 연주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연주 회를 찾는 입장에서도 매번 느낌이 달랐다.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이번에는 어떻게 연주할까? 혹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하는 감상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연주회마다 이 번에는 어떻게 하면 방문한 사람들 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요. 작곡가의 의도가 놀라움이라면 곡을 일부 변형시키더라도 돌출적인 요소를 집어넣어요. 이미 알고 있는 연주라면 작곡가의 의도처럼 놀라지 않을 테니까요.”

    “ 아.”

    “하지만 녹음은 다른 일이에요. 반 복해 듣는 일이니 그런 인스턴트적 인 요소로는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 다시 악보로 돌아오는 거죠. 베를린 필하모닉 A가 녹음을 전담하는 것 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옳거니.”

    사카모토가 테이블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명석해. 참으로 옳은 말일세.”

    히무라는 한참을 무엇인가 중얼거 리더니 허무한 듯 읊조렸다.

    “그럼 대체 런던파와 베를린파의 분쟁은 무슨 의미가……

    “편 가르기 좋아하는 머저리들의 이야기죠.”

    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개소리는 무시하고 심해지면 주둥이를 틀 어막아야 한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좋은 냄새가 풍 겼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음식을 확인하니 스튜였는데 한 입 떠먹자 깊은 풍미가 혀를 가차없이 유린했다. 맵다.

    유럽의 식재료를 활용해 이런 느낌을 주다니 솜씨 좋은 쉐프일 것이다.

    고생한 그와 웨이터에게 팁을 넉넉히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