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39화 (23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39화

    54. 다른 누구도 아닌(5)

    런던 필하모닉의 연주가 끝나고 취 재차 방문한 기자들은 분주하게 짧 은 기사를 올렸다.

    그런 이들 이외에 전문성을 띤 평 론이나 칼럼을 적으려는 이들은 여 운을 음미하며 런던 필하모닉의 뛰 어난 연주에 감탄했다.

    “역시 런던 필하모닉인가? 이만한 완성도를 보여주다니.”

    “절제된 해석과 풍부한 음색이 절 묘했지. 토스카니니가 1년 사이에 런던 필하모닉을 완전히 장악한 것 같네.”

    “그러게. 충실한 연주였어. 솔직히 오늘 오전 연주와 수준 차이가 날 정도야.”

    “어쩔 수 없지. 토스카니니와 레몽 도네크를 제외해도 본래 뛰어난 악 단이었으니까. 인터플레이의 지원도 어마어마했고.”

    “음. 이 정도라면 푸르트벵글러의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도 1위는 장담 할 수 없겠네.”

    “접전이겠지.”

    많은 사람이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 니니와 오랜 시간 발전해 온 런던 필하모닉의 완벽한 연주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그 안에서 완성 도 있게 벼려낸 음색은 하모니를 이 루어 귀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제아무리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이라 해도 이 이상 의 연주를 들려줄 수 있을지에 대해 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 뒤.

    오늘의 마지막 순서가 돌아왔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무대에 오르자 동시에 다소 어수선했던 장내가 고요해졌다.

    런던 필하모닉가 들려준 힘찬 음악 에 사로잡혀 있던 관객들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듯했다.

    무대 위에서 불필요한 행동은 일절 보이지 않는 그들의 절제된 모습은 고결했다.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무게감에 짓 눌려 소리 죽인 채 그 모습을 살필 뿐이었다.

    오늘 악장을 맡은 케르바 슈타인을 비롯하여.

    제2바이올린 크리스토프 버락, 비 올라 나인하르트 로자, 첼로 이승희, 콘트라베이스 마틴 에인스 등 각 악 기의 수석뿐만이 아니라 일반 단원 들까지 오랜 세월 세계적으로 큰 명 성을 쌓은 거장이었다.

    ‘저게 베를린 필하모닉……

    완성된 형태의 베를린 필하모닉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기에 눌리는 듯 했고.

    기존에 베를린 필하모닉을 알고 있던 사람들도 최근 외부 활동을 도맡았던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아니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아래 완편된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가장 위 대한 지휘자 중 한 명이라 꼽히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나 고요한지 그의 구두 소리를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는 검은 재킷 안에 하 얀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케르바 슈타인이 손짓하자 단원들 이 소리 내지 않고 일어나 그들의 지휘자를 맞이했다.

    구두 소리가 멈추었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단에 올라 객석을 향해 목례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카리스마에 눌 려 있던 관객들은 비로소 박수를 보 내어 위대한 지휘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단하네요.”

    “복귀 무대라 그런지 무게감이 엄 청나네.”

    이필호와 정세윤이 속삭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런던 필하모닉이 남긴 여운에 빠져 있던 분위기가 깨 끗이 씻겨 내렸다.

    많은 사람이 등장만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사를 마친 푸르트벵글러가 돌아 서 악단을 향했다.

    연주자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듯 한 그 강렬한 시선에 호응하듯, 베를린 필하모닉은 고요히 연주를 준 비했다.

    푸르트벵글러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휘봉을 들어 두 손을 힘차게 내렸고 동시에 운명이 문을 두드렸다.

    강렬한 첫 음 뒤에 아주 짧은 간 격이 있었고 뒤이어 세 개의 음이 비슷한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다시 한번 더.

    베토벤이 남긴 다섯 번째 교향곡.

    C단조(운명)가 시작되었다.

    ‘ 아.’

    그 순간 이미 연주를 듣는 모든 사람이 감탄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지휘할 때 페르마타(Fermata: 늘임표)는 지휘 자에게 언제나 큰 고민이었다.

    긴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이 긴장 감을 이어가기 위해 음을 이어서 연주했고 그것이 정석처럼 받아들여졌는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과감하 게 음을 끊어내었다.

    그로 인해 여덟 개의 음이 하나하나 강조되었고 머리와 가슴을 얻어 맞은 관객들은 그 상태로 뒤따라 나오는 클라니넷과 바이올린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강렬하군.’

    사카모토 료이치는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많은 지휘자가 5번 교향곡의 동기를 이어서 지휘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단순한 여덟 개의 음을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을 더욱 중요시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오 랜 시간, 많은 사람, 본인조차 지켜 온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강렬한 시작을 위해서 라면 음이 끊겨서 생기는 음악적 고조도 무시할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는 고집을 버림으로써 청중들이 감동할 수 있다면 어떤 일 이라도 과감히 판단하였다.

    그는 오늘의 연주를 위해 수십 개 의 악보를 들여다봤고 백 번도 넘게 지휘했던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수 백 시간을 들여 재해석했다.

    ‘세상에.’

    ‘이게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인가.’

    그 결과 동기부터 관객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었다.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익숙해 져, 더 이상 감동과 충격을 주기 힘 들었던 운명의 노크 소리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에 의해 새롭게 다가간 것이었다.

    배도빈이 눈을 감았다.

    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선율에 고동치는 가슴을 맡겼다.

    평론을 위해 방문한 사람도 대회 참가자도 관객도 모두 배도빈과 같이 어느새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음악에 몸을 맡겼다.

    푸르트벵글러는 환희에 찬 강인한 마지막 부분마저 끊어 지휘했고 대 단원의 막을 묵직하게 내렸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

    진달래가 입을 쩍 벌리고 닫지 못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은 뒤에야 쓰러지듯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런던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었을 때 감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최지훈도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멋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푸르트벵글러를 표현 주의자 또는 신고전주의자라고 하지 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사조에 대입해서 이해하기에 그의 음악관은 너무도 넓다.

    굳이 표현한다면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만을 생각하는 지휘자.

    그 정도가 그나마 어울릴 것이다.

    내가 입단하기 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이 고전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라 생각 하는데, 곡은 작곡가의 의도를 지극 히 표현할 때 가장 훌륭하다는 푸르트벵글러의 고집이 그런 인상을 준 듯하다.

    투표가 진행되는 도중, 여운을 충 분히 느낀 최지훈이 감상을 내놓기 시작했다.

    “정말 과감했어. 특히 동기부가.”

    흡족하여 웃었다.

    “그렇게 연주하는 거야.”

    빈 필의 연주를 듣고 최지훈은 감 탄했고 나는 C단조는 그렇게 연주 하는 게 아니라 말했다.

    어제 빈 필하모닉이 연주한 5번 교향곡을 듣고 했던 대화가 떠올리 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응. 뭐가 더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아.”

    “……베토벤은 사실 저렇게 의도하 진 않았어.”

    “어?”

    최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보를 보면 8분음표 세 개 아래 포르티시모가 있고 그다음 2분음표 위에 페르마타가 있잖아.”

    허공에 악보를 그리며 말했다.

    “좀 더 빠르고 세게 그 뒤는 조금 간격을 두고 연주하길 바랐어. 이 말로도 제대로 표현할 순 없지만.”

    “베를린 필은 다 끊었잖아.”

    “응. 하지만 그럼에도 난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는 옳다고 봐.”

    가만히 듣고 있던 최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지휘자마다 해석이 다를 수밖 에 없는데 왜 빈 필의 연주는 인정 하지 않고 베를린 필의 연주는 옳다 고 하는지 물을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이 그렇게 생각했는 지 어떻게 알아?”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베토벤이랑 할배 의도가 다르다는 말이야? 난 진짜 진짜 좋던데.”

    조금 당황하고 있는데 진달래가 불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적절할 때에 잘 치고 들어왔다.

    “작곡가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하는 지의 문제야. 악보에 표현된 것만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그 악보 위, 펜을 움직이는 작곡가의 마음을 읽는 지.”

    “틀릴 수도 있으니까 악보대로 연주하는 게 좋지 않아?”

    진달래가 물었다.

    “그게 지휘자의 역량이야. 악단의 색이고. 푸르트벵글러는 C장조의 동 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샜을 거야. 단 여덟 개의 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정하기 위해.”

    악보는 모든 것을 담고 있을 수 없다.

    혹자는 정해놓은 여러 음계와 지시 문을 맹신하기도 하지만 악보만으로는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를 포함한 내가 살았던 시대의 많은 작곡가가 직접 지휘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지휘자 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해석의 영역이 다양해졌다.

    같은 곡을 연주함에도 지휘자와 악 단에 따라 무수히 다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것이 그 증거.

    그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나는 지 휘와 작곡을 전혀 다른 분야로 분리해 생각할 수 있었다.

    지휘는 재창조.

    악보에 집중한 연주는 작곡가의 의 도에 따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악보 자체만 두고서는 작곡가의 의 도를 정확히 잡아낼 수 없으니, 정 신을 파악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 각했다.

    내가 지휘과를 비롯해 음대에 진학 하지 않고 음악사와 음악학을 전공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작곡과 연주만을 했을 거라면 굳이 대학에 진학할 이유가 없었다.

    악보뿐만이 아니라 곡을 쓸 때 작곡가의 상황을 다각적으로 접근해야만 비로소 그 마음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을 악보에 적용할 때.

    마침내 악보에 담긴 진실을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에 선택한 길이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푸르트벵글러 의 C장조 교향곡(운명)을 옳다고 생각한다.

    “아까 네가 틀릴 수도 있다고 했는 데 듣기 싫은 연주는 있어도 틀린 연주는 없어.”

    “할배도 같은 말 하던데.”

    “어차피 지휘나 연주 자체가 재창 조의 영역이니까. 작곡한 본인이 아 니고서야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 해. 그렇지 않고서는.”

    “카피밖에 안 된다는 거지?”

    최지훈이 내 말을 대신 했다.

    웃으며 녀석을 보니 그 맑은 눈동 자가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 엉?”

    하지만 진달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는지 금세 관심이 식은 듯 하다. C장조 2악장의 리듬을 훙얼 거리며 팸플릿을 펼쳤다.

    최지훈이 깨달은 것을 정리한 듯 말했다.

    “되게 힘든 길이다. 곡을 만드는 일만큼 준비할 테니까. 하지만 그만 큼 가치 있는 일인 거 같아. 마에스 트로 푸르트벵글러, 대단하다.”

    최지훈의 깊은 감상에 동의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곧 커 다란 스크린이 무대 위에 내려왔다.

    사회자가 올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과연.

    팬들은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 의 연주를 어떻게 들었을까.

    “투표에 참여해 주신 분은 총 2,708,144분이셨습니다.”

    “와. 270만 명?”

    진달래가 감탄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복귀무대이 자 베를린 필하모닉과 런던 필하모닉의 경합이었던 만큼 지금까지의 투표 수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모양이다.

    그리고 마침내 3조의 결과가 발표 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A

    심사 위원단: 29.5(295점)

    팬 투표: 49.7(1,922,782표)

    합계 79.2(1 위)

    런던 필하모닉

    심사 위원단: 30(300점)

    팬 투표: 14(541,628표)

    합계 44(2위)

    팬 투표에서 기퍼센트라는 압도적 인 기록을 세운 베를린 필하모닉이 조 1위로.

    완성도 있는 연주를 들려준 런던 필하모닉이 조 2위로 진출을 확정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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