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37화 (23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31화

    52. 천재들의 앙상블(5)

    제1회 OOTY 오케스트라 대전 개 막일.

    마치 새로운 시대를 조명하듯 태양 이 잘츠부르크 거리를 따사롭게 비췄다.

    대축전극장 주변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그들의 얼굴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오늘부터 매일 정상급 악단이 10 일간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하니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제였다.

    이달에 집계된 방문객만 50만 명으로 잘츠부르크는 발 디딜 틈도 없었고 그런 관심에 따라 언론도 함께 했다.

    각 국의 방송사와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가 몰려들었고 그나마 협회 측 에서 중계 방송사를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대축전극장은 카메라로 도배 가 되었을 터였다.

    평단도 마찬가지였다.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에게 오케스트라 대전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세계 최고의 악단이 어디인가에 대 한 의문은 항상 제기되어 왔었고 평가 기준은 항상 달랐다.

    그렇기에 여러 악단을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 무대가 의미 있는 것이었다.

    “우와. 진짜 엄청나요.”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야. 기사 하나 잘 뽑아보자.”

    “맡겨만 주세요!”

    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 잡지 ‘관 중석’ 역시 최근 국내에서 가장 주 목받고 있는 평론가 차채은을 육성 하기 위해 지원에 나섰다.

    오케스트라 대전이 이어지는 두 달 간 특집호를 내기 위해 이필호 편집 장과 정세윤 기자를 파견했고 차채은이 여러 악단을 평할 수 있도록 여비를 전액 지원한 것이었다.

    ‘여기구나.’

    차채은은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낮은 건물을 보며 생각했다.

    배도빈과 최지훈이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과 4등을 하면서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 장소였다.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세 사람 중에 본인만 여러 이유로 떨어져 지 냈기에 차채은은 배도빈과 최지훈이 함께했던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 만 간직할 뿐이었다.

    때문에 배도빈, 최지훈이 무대에 서는 장소에 함께할 수 있게 되었음에 어떠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기자님, 팸플릿 좀 구할 수 있어요?”

    “받아놓은 게 있는데. ……자. 여기.”

    차채은이 묻자 정세윤 기자가 작은 가방을 열어 미리 챙겨두었던 팸플 릿 하나를 차채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차채은이 일정을 살폈다.

    10일간 하루에 네 악단이 베토벤 교향곡 중 하나를 연주하는데 첫날 만큼은 다섯 악단이 준비되어 있었다(참가 악단 총 41곳).

    ‘또 처음이네.’

    연주 순서를 확인하니 가장 처음 배도빈 지휘자의 베를린 필하모닉 B이 베토벤 교향곡 3번 E플랫 장조 (영웅, Eroica)를 연주한다고 적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이런 자리에서는 항 상 첫 번째에 배치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첫날부터 엄청나네요?”

    “베를린 필 B가 처음이었지? 다른 곳은 어디야?”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랑 니혼 필하모니, 션윈 심포니, 로 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요.”

    “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필호 편 집장이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배도빈의 베를린 필하모닉 B야 말 할 것도 없이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악단이지만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역시 항상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전통의 강호였다.

    니혼 필하모니(일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화려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장점으로 하는 일본 제일의 오케스트라였으며.

    션윈 심포니 역시 서양의 클래식을 중국의 시각으로 받아들여 그 독특 함을 유지하고 있는 뛰어난 악단이었다.

    본선 1차에서 떨어질 만한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미치겠네. 최성신이 션윈이랑 함께하지 않아?”

    “아, 맞아요.”

    이필호 편집장의 질문에 정세윤 기 자가 손뼉을 쳤다.

    배도빈, 최지훈을 집중 조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최성신 역시 최지훈만큼이나 국내에서 인기 있는 피 아니 스트였다.

    관중석으로서는 베를린 필하모닉 B와 션윈이 나란히 2차전으로 출전해야 기사를 쓰기 좋을 텐데 참가 악단 면면을 보니 쉽지 않을 듯했다.

    이만한 라인업에서 세 악단이 떨어 진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

    “대체 왜 토너먼트인 거예요?”

    “여러 악단이 모이니까 이런저런 문제가 많을 거라 판단해서 그렇게 정했대.”

    “……떨어지면 빨리 돌아가서 연주회 하라는 거네요?”

    “그렇지.”

    지역을 기반으로 정기 연주회를 하는 악단들이 몇 달씩 연고지를 떠나 있으면 재정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 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는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하며 대회 진행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했는데 1, 2차전을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1차전은 각 일자별로 하위 조로 나뉘어져 그 안에서 상위 두 팀이 2차전에 오르고.

    그렇게 선정된 20개 악단은 2차전에서 다시 5개 팀씩 4개 조로 분산, 상위 두 팀이 올라 3차전에서 8강 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점수를 바로 낸다는 것도 그런 이유겠네요.”

    차채은의 질문에 이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를 마치면 그 즉시 심사 위원 단의 점수표가 공개되고 ‘관람 결제를 해 해당 일자의 공연을 모두 들 은 사람’에 한해서도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결국에는 마지막 차례의 악단이 연주를 마치면 1시간 이내에 집계, 처리되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진행에 비판이 없는 것 은 아니었다.

    “첫 번째 연주하는 곳은 불리할 수도 있겠네요.”

    “그치. 뒤에 가면 잊힐 수도 있으니까.”

    “첫 번째만 불리하다고는 할 수 없어. 사람의 집중력이 그렇게 오래 갈 수 없거든. 하루에 교향곡 4개라 니. 어지간한 사람은 듣다가 지칠 걸?”

    “아. 그렇겠네요.”

    여러 면에서 신경 쓴 것을 엿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첫 회를 맞이한 오케스트라 대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악단도 그러한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음악을 듣기 위해 잘츠부르크를 찾은, 또는 집에서 결제를 하고 중계를 보는 팬들을 위해.

    최고의 연주를 하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 * *

    잘츠부르크 대축전극장 무대에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자리를 잡았다.

    오보에 수석이 A음을 내자 여러 악기가 음을 내면서 마지막 확인을 마쳤다.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들은 잔뜩

    부푼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기의 천재, 베를린의 마왕.

    배도빈을 수식하는 이름은 여럿이었으나 그 어떤 호칭도 최고라는 말을 달리 말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배도빈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음에 가슴 설렐 수밖에 없었다.

    ‘금관이 많군. ……무슨 의도지?’

    객석에 앉은 푸르트벵글러가 무대를 살피며 생각했다.

    평소 베를린 필하모닉 B와 달리 금관 악기 연주자들이 한두 명씩 더 많았다. 더욱이 3번 교향곡에서는 쓰이지 않는 관악기인 트롬본과 유 포니움도 한 대씩 끼어 있었다.

    ‘들어보면 알겠지. 자, 어서 들려다 오. 여태껏 없었던 음악을.’

    푸르트벵글러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침내.

    배도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눈빛과 존재감에 콘서트홀 이 가득 차는 듯했다.

    악장 소소가 손짓해 단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배도빈이 소소와 악수를 나 누었다.

    지휘단에 오른 배도빈이 관객들에 게 세 방향으로 각각 인사한 뒤 돌 아섰다.

    베토벤이 남긴 아홈 개의 교향곡.

    하나하나가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200년이 흐른 지금도 사 랑받는 곡 중에서도 가장 힘찬 3번 교향곡, 에로이카(영웅).

    배도빈이 단원들을 둘러본 뒤 두 손을 가슴 아래 두었다.

    콘서트홀에 적막이 흐르고.

    이내 배도빈이 지휘봉을 힘차게 들 어 연주를 시작했다.

    1악장. 힘차고 빠르게 (Allegro con brio).

    두 번의 천둥소리가 강렬히 울려 퍼지고 이내 현악기가 풍성하고 부드럽게 뒤따른다.

    제1바이올린이 분위기를 고조시키 는데 관객들은 시작부터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에 압도되고 말았다.

    대축전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대부 분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어왔기에 에로이카가 어떤 곡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베를린 필의 연주는 기존

    의 에로이카보다 더욱 강렬히 시작 했는데 도입 부분은 거의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악기 수를 늘리고 세기를 더욱 강 조해 관객을 놀라게 한 뒤 그 기세를 몰아 곧장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어서 호른.

    현악부와 목관 아기가 나누는 대화 아래 중간중간 다르게 삽입된 박자 들로 긴장감이 더욱 고취되었다.

    ‘역시 도빈 군의 베토벤이야.’

    사카모토 료이치는 크게 감탄했다.

    에로이카는 박자 변형이 많은 곡으로 듣는 사람은 예측할 수 없어 늘어질 틈이 없고 그 전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배도빈은 거기에 더불어 섬세하게 박자를 조율해 악단을 이끌었고 관 객를 그 강렬한 힘에 흡입되었다.

    에로이카에 대해 단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단순히 곡 자체가 가진 힘 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에로이카는 곡 전반에 깔린 여러 악기의 동시 연주와 섬세한 멜로디를 제대로 표 현하지 못하면 요란해지는, 해석하 기 난해한 곡이었다.

    돌출과 정상.

    어울림음과 안어울림음.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난해한 스코 어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만들기 위 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이 곳에 모인 사람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에로이카를 연주해 봤고 수십, 수 백 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때였다.

    사카모로 료이치를 비롯해 배도빈 과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연주를 듣는 모든 사람이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에로이카가 아니었다.

    ‘금관이 문제야.’

    배도빈이 에로이카를 준비할 때 가 장 어려웠던 부분은 금관이었다.

    다시 태어난 뒤 많은 경험을 통해 금관 악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완벽히 익혔지만 180년의 공백 중 에서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목관, 금관 악기였다.

    그중에서도 금관 악기는 배도빈이 베토벤로서 살 적에 미처 듣지 못했

    던 소리를 많이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현대에 일반적으로 들을 수 있는 에로이카는 배도빈이 당시 에 만들었을 때보다 훨씬 다양한 소 리를 내고 있었다.

    훌륭했지만.

    배도빈의 마음에 와닿을 리 없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배도빈은 220년 전에 만들었던 자신의 3번째 교향곡 에로이카를 다시 쓰기 시작 했다.

    쉽지 않았다.

    처음 만들었을 때의 에로이카에 금 관 악기는 분위기를 돋우는 정도에 그쳤는데 특히 1악장 마지막 부분이 그러했다.

    트럼펫으로 연주할 수 없으니 목관 악기들로 채운 것인데 현대의 에로이카는 악기의 발전으로 그 부분을 트럼펫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어 변 화된 것이었다.

    현대 지휘자들은 비단 에로이카만 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음악 대부분에 있었던 ‘불가능한 연주’에 대해 여러 각도로 접근했다.

    마리 얀스와 칼 에케르트 등은 변 화한 시대에 맡게 재해석해 곡을 지휘했으며.

    제르바 루빈스타인과 브루노 발터 같은 고전주의자들은 당시 작곡가의 뜻을 중요시했기에 시대연주에 집중 했다.

    그러나 배도빈은 다른 길을 택했다.

    연주가 불가능했기에 억눌렀던 당 시의 ‘제한’이 풀렸기에 배도빈의 창작 욕구는 더없이 타올랐다.

    더욱 더 과감한 울림.

    심사 위원단, 평론단, 음악계 거장 그리고 청중들 모두.

    새로운 에로이카에 빠져들어 숨조 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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