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30화
52. 천재들의 앙상블(4)
배불리 먹고 쉬고 있는데 히무라가 찾아왔다. 전야제 파티에서 안 보이 기에 어디 있나 싶었는데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에서 사업 제안을 했어. 협회 홍보 조건으로 재단에 후원하고 싶다더라.”
“홍보요?”
“응. 니나 같은 경우가 그래.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지. 음악계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 낼 수도 있고 지망생들에게도 분명 큰 힘이 될 거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네요.”
히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은 함께하는 편이 좋겠죠. 히무라가 잘 판단해서 조율해 주세요.”
“오케이. 그리고…… 여기. 전에 부탁했던 명단이야.”
히무라가 제법 두툼한 서류 뭉치를 주었다.
샛별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음악가들인데 히무라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인정하는 소위 말해 ‘샛별’ 들이다.
“오케스트라에 관심 있는 사람들로 추렸어.”
“네, 저도 그편이 좋아요.”
명단을 살펴보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출신지가 처음 보는 나라다.
“나미비아가 어디예요?”
“아, 자이 바트만 말이지? 아프리카 서남부에 있는 나라야.”
“신기하네요.”
“응. 클래식 음악을 하는 흑인은 드문 편이니까. 그래도 열정은 대단 해. 배우기 위해서라면 독일이라도 가겠다며 하니까.”
“그건 무슨 뜻이에요?”
“나미비아가 예전에 독일의 식민지였거든. 아무래도 감정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을 대충 넘겨 본 뒤에 옆으로 치웠다.
“고마워요. 계속 가져다주세요.”
“맡겨만 둬. 그럼…… 어때?”
“뭐가요?”
“오케스트라 대전. 사카모토 선생님은 네가 엄청 좋아할 거라 말씀하 시던데.”
귀신이다.
“난 네가 이런 식의 경쟁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사카모토 선 생님과 내기를 했지.”
“얼마나 걸렸어요?”
“자그마치 만 엔이라고. 그래서. 어떤데?”
“만 엔 잃으셨네요.”
히무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납득되지 않는 모양이다.
“평가받는 거 싫어서 콩쿠르도 잘 안 나갔잖아. 크리크랑 쇼팽도 지훈 이 때문에 나간 거 아니야?”
“ 맞아요.”
“그런데?”
“그때랑은 상황이 달라요. 경쟁할 사람이 없었으니 심사 위원에게 평을 받는 자리였지만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심사 방식도 팬 투표 포함이니까.”
사실 푸르트벵글러나 마리 얀스뿐 만이 아니라 여러 오케스트라 또한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다면 무대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자 히무라는 장고 끝에 납득했다.
“그러니까 결국엔 점수와 상관없이 서로 이해할 수 있으니 괜찮다는 말이지?”
“네. 저도 바빠서 다른 악단 연주는 못 들은 지 꽤 되었으니까요. 어떤 음악을 들려줄지 기대돼요.”
“그렇구나.”
히무라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각지에서 자신을 갈고닦은 천재들의 합주.
서로의 음악을 들으며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납득한 듯하다.
“그런 거라면 우승에 연연하지는 않겠네.”
“그건 아니죠.”
“어?”
“팬 투표가 7할이잖아요. 우승해야죠.”
히무라가 다시금 의문에 빠졌다.
최지훈은 배도빈과의 추억이 있는 잘츠부르크 거리를 거닐었다.
어렸을 적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해 이곳, 잘츠부르크에 서 배도빈과 함께 결선에 올랐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했다.
‘잘해야지.’
그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최지훈은 항상 외롭게 음악을 할 형제를 생각하고 더 높은 곳으로 향 하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렇기에 배도빈이 이렇게 중요한 대회에서 함께할 협주자로 다른 누 구도 아닌 자신을 선택했다는데 너 무나 기뻤다.
사실 현재 피아노계는 소위 말하는 천재들이 너무도 많았다.
한국에서만 최성신과 남궁예건, 손 가을이 세계 각지의 악단들과 협주 하며 명성을 높이고 있었고 박건호는 여전히 베토벤 소나타의 최고 권 위자로 활동했다.
세계로 나가면 30대가 주를 이루었다.
가우왕, 마리오 폴리니, 막심 에바 로트 세 명이 피아노계의 3대 거장으로 불리었고.
니나 케베리히, 엘리자베타 툭타미 셰바, 장 니콜라도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지금은 개인 활동이 뜸한 사카모토 료이치와 미카엘 블레하츠 역시 가 끔 연주회를 가지니 그야말로 피아노계는 그 어떤 때보다 치열했다.
그러나 그들도 배도빈이 손을 내밀면 거절할 이가 없었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이름은 세계 그 어떤 음악가에게나 설레는 이름이었다.
말 그대로 부르면 되는 입장이기에 최지훈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택한 배도빈에게 부응하기 위해서라 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또한 세계의 이름 있는 음악가들이 모두 모인 이곳 잘츠부르크에서 자 신의 피아노를 들려주고 싶었다.
‘암스테르담이랑 가우왕 씨는 대단 하겠지?’
하지만 최지훈 역시 단지 그것만을 바라지는 않았다.
우승.
배도빈과 함께 우승하고 싶다는 강 렬한 욕망이 그의 가슴을 열렬히 불 태우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로열 콘세트르허바우 와 가우왕의 조합은 신경 쓰일 수밖 에 없었다.
‘어떤 식으로 나올까?’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최지훈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니나 누나.”
“안녕!”
최지훈이 니나 케베리히를 반갑게 불렀고 니나 역시 최지훈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며 다가왔다.
니나가 최지훈의 손을 잡고 위아래 로 크게 흔들었고 최지훈 역시 반갑 게 호응하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렸다.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오 디션을 보기 전에 그녀에게 소리를 친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 뒤로 서먹해져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최지훈은 조금 머쓱해졌다.
“잘 지냈어? 키 또 컸네?”
니나 케베리히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최지훈을 올려다보며 손을 들어 키를 가늠했다.
“응.”
“좀 이상한데?”
니나 케베리히가 눈을 좁히며 최지훈을 빤히 바라봤다. 자연스레 최지훈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래?”
다시 한번 말을 걸어도 최지훈이 제대로 대답을 못 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혹시 예전 일 때문에 그래? 1호기?”
니나가 최지훈의 등을 찰싹 때리며 웃었다.
“신경 쓰지 마. 나도 너도 도빈이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난 친구 생 각해서 화낼 줄 아는 거 멋지다고 생각해.”
최지훈이 작게 웃었다.
자신과 다르게 이렇게 털털한 모습을 좋아했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내가 쏜다! 채끝 엄청나게 맛있게 해주는 곳 있어.”
니나 케베리히가 최지훈을 끌고 걷 기 시작했다.
야외에 테이블을 둔 음식점에 자리 잡은 뒤 최지훈은 깜짝 놀랐다.
“로스앤젤레스랑?”
“응! 미국에 있을 때 여러 번 같이 했는데 좋은 느낌이야.”
“나도 출전해.”
“어?”
“난 도빈이랑. B팀이야.”
니나 케베리히가 말도 없이 그저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세상에.”
“나도 놀랐어. 진짜 대전은 대전인가봐. 가우왕 씨는 암스테르담이랑 한대. 마리오 폴리니는 빈이랑.”
“……우승해서 돈 잔뜩 벌 생각이 었는데 망했네.”
그 말에 최지훈이 웃어버렸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북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 고 있는 니나 케베리히라면 그 자체 로 큰 이슈이거늘.
다른 악단과 독주자를 떠올릴수록 어느 곳 하나 빠지지 않았다.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는 니나 케 베리히마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우 승을 저 멀리 여기니 최지훈은 동질 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도빈이가 거기 악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던데. 실제로는 어때?”
“아리엘? 뭐라는데?”
“정신병자래.”
“핰하하하핳하.”
니나 케베리히가 최지훈의 말을 듣자마자 크게 웃었다. 도무지 진정할 수 없는지 몇 번을 기침을 한 뒤에 야 웃음을 멈추었다.
“1호기답다. 어…… 틀린 말은 아 닌 거 같은데?”
니나 케베리히가 아리엘에 대해 떠 올리며 말끝에 다시 한번 작게 웃었다.
“어떤 사람인데?”
“장갑을 안 끼면 다른 거 안 만져. 연주할 때도 음이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단원들 엄청 괴롭히고. 가끔은 장미를 먹더라.”
“••••••어?”
유난스럽거나 완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이야기는 이해할 수 있어도 마지막 이야기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말도 진짜 웃겨. 글쎄 사인해 달 라는 팬한테, 오늘 밤 당신의 눈에 날 담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라 고 하더라니까.”
니나 케베리히가 자기 무릎을 반복 해 때리며 웃었다.
최지훈은 아리엘 핀 얀스의 언행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해주면 안 되는 거야?”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좋은가 봐. 아니, 걘 컨셉은 아니지. 음. 아 니야.”
“오오, 봄의 여신이여. 운명이 우리를 또 만나도록 인도하였군요.”
오케스트라 대전만큼 좋은 공부도 없다는 말에 잘츠부르크에 온 진달 래는 소소, 나윤희와 함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산책을 나온 아리엘 핀 얀스가 진달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진달래가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받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 어?”
“봄이 오는 들판에. 듣는 순간 당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다른 사람에게 노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진달래는 뛸 듯이 기뻤다.
더욱이 마치 만화를 찢고 나온 듯 한 수려한 외모의 아리엘에게서 들 으니 진달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알프스의 눈물로 달인 차를 함께 하시겠습니까?”
“어…… 그게.”
진달래가 망설이자 소소가 진달래의 등을 밀어버렸다.
“으악!”
그 덕에 진달래가 앞으로 밀려났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아 리엘을 잡았다.
“아, 미, 미안.”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쾌했겠지만 당신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아리엘의 푸른 눈이 석양에 비쳐 반짝였다. 그 눈을 가까이서 접한 진달래는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바 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아리엘이 에스코트를 했고 진달래는 아리엘과 소소를 번갈아 보았고.
소소는 작게 손을 흔들어 진달래를 배웅했다.
“ 가자.”
진달래가 더 이상 안 보이게 되었고 소소가 나윤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나윤희는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괘, 괜찮을까?”
“아는 사이 같던데.”
“그래도……
“말투는 역겨워도 잘해주잖아.”
“그게 아니라.”
슬슬 배고픔을 느낀 소소가 답답한 마음에 나윤희를 끌고 가려 할 때 나윤희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오 고 말았다.
“달래 아직 미성년자잖아.”
“……철컹철컹?”
소소의 질문에 나윤희가 고개를 끄 덕였다.
소소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진달래 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