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34화 (23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28화

    52. 천재들의 앙상블(2)

    ‘그때’는 하루하루가 두근거렸다.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를 찾아가 서 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귀족들의 심심풀이를 위해서가 아 니라 순전히 서로의 세계를 더욱 잘 알기 위해.

    또는 순수한 향상심으로 도전하길 반복했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천재, 마에스트로.

    또한 청각을 잃어갔다.

    나와 ‘대화’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그 즐거움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태어난 뒤에도 마찬가지.

    감히 나와 대적하려는 사람은 없었고 첫 번째 삶과 마찬가지로 내 이름이 알려질수록 마찬가지였다.

    내 앞에 놓인 것은 오직 대중뿐이었고 그것은 참으로 고독한 싸움이었다.

    대중은 한없이 나와 내 음악을 사 랑해 주는 것 같으면서도 좋지 못한 음악에 대해서는 시리도록 매정하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매번 머 릿속으로 내 음악과 그들이 바라는 음악 사이에서 고집을 세우고 논쟁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다른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순 없다.

    하지만 때때로 그 고독한 싸움을 깊이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

    사카모토 료이치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내가 왜 그런 전개를 선택 했는지, 지시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과의 대화는 내게 충족감을 준다.

    아쉬움을 달래는 데에는 그만한 일 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영혼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게 하여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더 아름다운 음악을 하기 위해 더욱 성장하고 싶은 향상심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홀로 수양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의 외로움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내가 처음 아마데를 목표로 했던 것처럼 구체적인 목표와 상대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음에는 분명 차이 가 있다.

    아마 이기고 싶다는 가장 근본적인 본능이 그러할 터.

    경쟁하는 상대를 넘어서려는 순수 한 마음은 사람을 보다 강인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호적수를 만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천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푸르트벵글러의 말이 너무도 기뻤다.

    ‘그때’와 ‘지금’을 통틀어 내게 ‘나를 넘어서라’라고 요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니라 세계 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라 인정하는 이에게서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계 최고의 악단이라 생각해 선택 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이 내게 도전 장을 내민 것이니 이보다 좋은 경쟁 자가 또 있을까.

    푸르트벵글러라면 전력을 다해 부딪칠 만하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은 얼마만인가.

    나는 마치 처음 음악을 접했을 때 처럼, 소년으로 돌아간 듯했다.

    * * *

    5월 5일.

    배영빈 감독의 데뷔작, 극장용 애니메이션 ‘매국노’가 대한민국과 중국에 동시 개봉하였다.

    크레용 위즈는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오리지널 스코어 작업을 총감독했다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최소한의 스크린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대망의 개봉일.

    한국 애니메이션, 일제시대, 신인 감독, 서커스.

    여러 요인에서 크레용 위즈의 ‘매국노’는 성공보다는 제작비 회수 걱 정이 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감독까지 직접 나서 밤을 새워 작업한 매국노의 그림은 뛰어난 영상 미를 자랑했고 인물들의 디테일한 표정 변화까지 자세히 표현했다.

    더욱이 일제에게 당한 크나큰 아픔을 지닌 두 나라는 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매국노라 욕을 먹는 주인공 ‘봉달’ 이 몰래 뒤에서 조선총독부의 뒤통 수를 칠 때마다 알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봉달 서커스를 미국에서 후원하게 되고, 지금껏 일본인의 발이라도 핥았던 봉달이 성공 후 그들을 무시하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마저 느낄 수 있었다.

    108분.

    짧지 않은 러닝 타임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애니메이션 전반에 깔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밴드 음악은 동양적 느낌이 들면서도 관객들을 고양시키는 힘이 있었다.

    때로는 가슴 졸이고 때로는 감탄하 면서 애니메이션을 즐긴 관객들은 엔딩 크레디트를 맞이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봄비 젖은 개나리

    그 아래 스며든 꽃잎의 눈물

    얼었던 들을 감싸는 온기

    곡 중간에 삽입되었던 진달래가 노 래한 ‘봄이 오는 들판에’의 풀 버전이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는 도중에 흘러나왔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한국 기준 개봉 일주일 만에 누적 관객 수 80만 명 돌파.

    중국에서는 320만 명을 기록하였고 동시에 세계 여러 평론가로부터 영상미와 오리지널 스코어 부분에서 극찬을 받았다.

    ㄴ 볼 때는 웃다가 나올 땐 울었다.

    ㄴ 아이와 함께 보러 갔는데 애기 도 저도 너무 재밌게 봤네요. 너무 자극적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 럴 걱정 안 하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ㄴ 노래 누가 불렀냐?

    ㄴ  나 진짜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울었잖아. 하.

    ㄴ 한국 사람 같던데?

    ㄴ 진달래라고 이번에 처음 발표 한 곡인듯.

    ㄴ 첫 곡이 푸르트벵글러 곡 ㅋㅋ

    ㄴ 금수저였던 거임.

    ㄴ 푸르트벵글러 진짜 대단하다. 이런 국뽕물에 무슨 독일 작곡가를 쓰냐고 생각했는데 진짜 쩔었음.

    ㄴ 간만에 재밌게 봄. 이 정도 퀄 리티면 우리나라 애니메이션도 돈 내고 보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진달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에서 뛰어 내려왔다.

    “이거 봐! 다들 노래 좋대!”

    “좋네.”

    “좋다니! 이건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더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잠 깐 고민하더니 이내 소리쳤다.

    “어마어마하게 좋은 거라고!”

    “그래. 수고했어.”

    독일에는 아직 상영되지 않아 보지는 못했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직접 제작했으니 좋지 않을 리 없다.

    독일에서는 스크린을 많이 확보할 수 없어 어쩌면 인터넷으로 집에서 봐야 할 수도 있겠지만 배영빈이 만 든 만큼 언젠가는 꼭 볼 거라 생각 했다.

    “오늘도 바빠?”

    “응. 먼저 올라간다.”

    “먹을 거 가져다줄게!”

    진달래가 주방으로 향했다.

    조금 더 자랑하고 싶은 듯해 받아 주고는 싶지만 요즘은 그럴 시간이 없다.

    푸르트벵글러는 이번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 스코어 작업으로 전 세계 에 자신의 건재함을 다시 한번 알렸다.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유럽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작곡했다는 이유만 으로도 곡을 사서 듣는 사람이 생겨 날 정도니 말이다.

    ‘ 대단했지.’

    나 역시 제대로 녹음된 것은 오늘 처음 들었는데 역시나 훌륭했다.

    오케스트라 풍의 밴드 음악이라니.

    동양적 색체를 넣는다고 했으면서 그것을 현대적으로 각색시켜 세련된 느낌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또 한 번 놀라게 해주겠지.’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하기로 결 정한 뒤로는 A팀도 B팀도 서로 어떻게 준비하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붙였기에 더욱 기대되었다.

    정말 제대로 붙어보자는 의미라서 나 역시 B팀 단원들을 독려하고 연주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한 두 달.

    이제 다음 주면 잘츠부르크로 향하 니만큼 달아오른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똑똑-

    진달래가 먹을 것을 가져온 것 같다.

    “들어와.”

    “퇴근하자마자 일하네. 달래가 먹 으라고 줬어.”

    최지훈이 샌드위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얼마 전에 독립하면서 베를린에 거 처를 마련했는데 떨어져 지낸 지 오 래되어 그런지 아직은 이렇게 나타 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같이 먹자. 공연은?”

    “오늘 3시가 마지막이었어.”

    “벌써? 오래 준비했잖아.”

    “……오케스트라 대전 준비해야 하잖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었는데 성실한 최지훈이 벌써부터 2차전 과 제, 협주곡을 언급했다.

    독주자로 여러 사람을 생각해 봤는 데 단원들도 한 번 호흡을 맞췄던 최지훈을 선호했기에 부탁했다.

    녀석의 스케줄이 걱정되어 미리 언 질을 해두었는데 벌써부터 준비하려 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아직 1차전 시작도 안 했으니 천 천히 해도 돼. 2차전 확정되면 이야 기해 줄게.”

    “당연히 통과하는 거 아니야?”

    “글쎄. 다들 대단하니까.”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악보를 보는 데 최지훈이 웃었다.

    “뭐야?”

    “뭐가?”

    “왜 웃어.”

    “즐거워 보이는 것 같아서.”

    싱거운 녀석.

    방긋방긋 웃는 최지훈을 보니 일할 마음도 가셔서 악보를 내려놓았다.

    “예전에 생각나?”

    “……그렇게 물으면 어떻게 알아.”

    “있잖아. 네가 콩쿠르 나가기 싫다 고 해서 내가 이유가 되어주겠다 고.”

    “ 아아.”

    “내가 그러고 싶었는데 선수를 빼 앗긴 것 같은 기분이야. 푸르트벵글러가 참전하기로 하니까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다니까.”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최지훈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질 생각은 없지.”

    적어도 1차전은 내 아홉 개의 교향곡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만큼 질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고 보니 아리엘 핀 얀스라는 사람도 대단한가 봐. 유럽에는 잘 안 알려졌는데 미국에선 엄청나게 유명하대.”

    “정신병자야.”

    “응?”

    “이상한 놈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장미를 먹던 장면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미친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는 게 답이다.

    “암스테르담도 그렇고 빈도 그렇고 런던이랑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진짜 멋질 것 같아.”

    “응.”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털어 넣고 무심코 다시 악보를 보았다.

    그러다 아차 싶어 다시 고개를 드니 최지훈이 나를 지그시 보고 있었다.

    “아, 미안.”

    “괜찮아. 나 가볼게. 파이팅!”

    녀석을 보다가 한마디 했다.

    “아직 기다리고 있어.”

    “어?”

    녀석이 문을 붙잡고 돌아섰다.

    “기다리고 있다고.”

    가만히 나를 보던 녀석이 밝게 웃 고는 문을 닫았다.

    요즘은 리사이틀도 열심히 하고 마 음 자세도 좋은 걸 보니 빨리 성장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 난 듯하다.

    녀석과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 A와 겨룰 생각을 하니 악보에서 손을 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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