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26화
51. 새 시대(5)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맞이해 주셨다.
“다녀왔습니다.”
“조금 늦었네?”
“오다가 푸르트벵글러 집에 잠깐 들렀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연락해 볼걸. 손님 왔어. 예쁜 친구던데?”
어머니께서 웃으시더니 정원으로 향하셨고 집사가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문을 열자 하얀 정장 차림에 흰 면장갑을 낀 정신병자를 볼 수 있었다.
놈이 돌아섰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 만났군. 검은 용의 마왕이여.”
“경찰 불러요.”
정원 쪽으로 향하고 있는 집사를 불러 세웠다.
“예?”
“후후훗. 역시 마왕이라 할지라도 이 몸만은 두려운가? 하지만 걱정하 지 마라. 오늘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인사를 하러 왔을 뿐이니 말이야.”
“할아버지? 마리 얀스?”
“후훗. 그렇다. 라트비아의 고귀한 음악가시지.”
“……도련님, 어떻게 할까요?”
“우선은 괜찮은 거 같아요.”
이상한 놈이지만 일단은 인사를 하 러 왔다고 하니 두고 봐야겠다.
“아, 나는 60도로 짧게 우려낸 홍 차를 좋아하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어 쩔 수 없이 차를 내와 달라 부탁했다.
잠시 뒤 집사가 차를 내왔고 나는 찻잔을 유심히 관찰하는 녀석을 마 당찮게 봤다.
“빨리 마시고 돌아가.”
“리차드 지노리. 멋진 취향이지.”
뭐라는 거야.
아리엘 핀 얀스라는 놈이 향을 즐 기는 듯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더니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곤 가슴주머니 에 꽂혀 있는 장미를 들었다.
“토마스 필스 경과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그대 이야기를 해주었지. 꼭 한 번 이렇게 만나고 싶었지.”
“아, 그래.”
녀석이 빙그레 웃고는 손에 쥐고 있던 장미를 입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꽃잎 하나를 뜯어 먹고서는 천천 히 등받이에 기댔다.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이상한 인간은 꽤 많이 만났다고 생각하건만 이런 놈은 처음이다.
“인터플레이와의 싸움은 잘 봤어.
마왕의 싸움은 지저분하고 맹목적일 줄 알았거늘 과연 왕이라는 자다운 고귀한 자태. 인상적이야.”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정했지. 이 나의 호적수로 인정할 만한 사람인지 눈과 귀로 직 접 확인하겠다고. 전율. 환희. 할아 버지와 필스 경의 말씀대로였어.”
“그래. 그래.”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열고 그 가 장 앞에 설 자는 아리엘 핀 얀스. 오늘은 선전포고로 그대에게 내 음악을 들려줄.”
“ 나가.”
“……들려줄.”
“ 나가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이해할 수 없어 응접실에서 먼저 나왔다.
내 층으로 올라가 잠시 머리를 식히고는 오케스트라 대전 때 지휘할 에로이카 악보를 살피다 보니 어느 새 해가 저물었다.
슬슬 허기가 져 계단으로 내려가는 데 이상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럴 수가.”
“뭐, 뭐야. 당신 누구야.”
“이런 초라한 곳에서 지중해의 아프로디테를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여신이여. 별의 이름을 받은 아리엘 핀 얀스. 인사드릴 수 있는 영광을 구하나이다.”
‘저 미친놈이 아직도 안 돌아갔네.’
계단을 마저 내려가자 정신병자가 진달래를 두고 개수작질을 하고 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는데 진 달래가 움찔하자 손을 쥐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의 이름은?”
“지, 진달래.”
“뜻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냥…… 꽃 이름인데.”
진달래가 꽃 진달래라는 뜻이라 덧 붙이자 아리엘 핀 얀스가 일어서 양 팔을 벌렸다.
“봄에 그대와 같은 봄꽃을 만나다 니. 그대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오. 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간 직하겠소.”
다가가 놈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형편없이 넘어질 줄 알았던 녀석이 날렵하게 몸을 구르더니 자연스럽게 일어섰다.
“뒤에서 급습이라니. 이 내 재능을 시기하는 것인가.”
“너 짜증 나니까 좀 돌아가라.”
“그대와의 용건은 끝났다. 지금은 봄의 여신과 만나는 중이고 방해하 려 한다면 결투를 신청하지.”
또 머리가 아파진다.
“네 손님이라니까 네가 알아서 해.”
“어? 나 근데 푸르트벵글러 할아버지 만나러 가야 하는데.”
“아아! 이럴 수가! 여신이여, 그대도 마왕군에 넘어갔단 말입니까. 어 찌하여 마왕의 편에 계십니까.”
“미치겠네.”
핸드폰을 꺼내 집사를 불렀다.
“네, 도련님.”
“저놈 쫓아내 주세요.”
“흥. 이 집의 주인이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지. 하나 내 발로 걸어나 가겠다.”
“만났을 때부터 나가라고 했어.”
녀석을 쫓아낸 뒤에 몰려드는 피로 감에 밥 생각도 사라지고 말았다.
1층 로비 소파에 앉으니 진달래가 물었다.
“누구야?”
“미친놈.”
그 말로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다시 한번 묻기에 대답해 주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악장이래. 내 심장에 창을 꽂겠다느니 헛 소리를 해대는 놈이야.”
“ 아.”
고개를 끄덕인 진달래가 묘하게 머뭇거렸다.
“푸르트벵글러 보러 간다고 안 했어? 어서 가 봐.”
“어. ……근데.”
의아하여 올려다보자 진달래가 쭈 뼛대며 물었다.
“아까 걔…… 좀 멋있지 않아?”
기가 차서 뭐라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얼굴을 붉히고 있는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것 같았다.
마리 얀스를 떠나보낸 뒤, 푸르트벵글러는 봉달 서커스에 삽입할 곡을 정리하였다.
이제 작업은 녹음만 남았는데 연주 자도 구해놓고 연습도 반복했던 터 라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지휘를 했더 라면 결코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완성할 수는 없었다.
그리 생각하니 잠시간 주어진 휴가를 꽤 알차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진달래가 문을 두드렸다.
뜻하지 않게 들인 제자는 지금까지 푸르트벵글러가 대했던 사람들과 달 리 힘이 넘쳤다.
노년의 푸르트벵글러에게는 진달래를 가르치는 일이 썩 즐거운 소일거 리였다.
“안녕.”
그런데 오늘은 평소의 씩씩한 모습 과는 달리 조금 얌전하여 푸르트벵글러는 그를 의아히 여겼다.
“무슨 일 있느냐? 힘이 없구나.”
“아니. 똑같은데? 여기. 쉐프 아저 씨가 싸줬어. 할배랑 같이 먹으래.”
“음. 좋지.”
배도빈에게 고용된 쉐프가 준비한 것을 식탁에 펼치자 이내 그럴듯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녹음에 들어갈 거다.”
“어? 벌써?”
“음. 그러니 잘 준비해 둬라. 네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컴퓨터로 조작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으아아아. 가사 다 만들어서 숨 좀 돌리나 싶었는데.”
푸르트벵글러가 울상을 짓는 진달 래를 보고는 작게 웃었다.
처음에는 불순물이 너무 많이 묻어 있어 그것이 진정 보석인지조차 알 아보기 힘들었던 또 한 명의 천재.
한 달 정도 가꾸었을 뿐인데 아직 세공이 들어가기도 전인데 닦아낸 원석은 그 오묘한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주는 영 아니지만.’
연주는 기분을 내는 정도.
진달래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고 호 소력이 짙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았으니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다면 캐슬린 배틀 같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배도빈과 소소, 나윤희.
이번에 새로 입단했다는 진 마르코 와 나카무라 료코.
그리고 진달래.
푸르트벵글러는 낮에 마리 얀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배도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뒤 로 분명 음악계는 변화해 왔다.
기괴함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정말 음악이 아름다움에 더욱 근접한 듯 한,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명의 천재가 독주한다고 시대가 변화하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재능 있는 음악가들이 속속들이 나 타나고 있었다.
마치 카라얀 이후 마리 얀스, 브루
노 발터, 사카모토 료이치와 푸르트벵글러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처 럼 말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을 향유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뛰어난 음악가들이 재능을 뽐내는 이러한 환경을 무척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꼈다.
배도빈의 대교향곡이 생각보다 늦 어지고 있다는 점.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데 그보다 좋은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세기의 천재라는 배도빈도 틈이 날 때마다 대교향곡을 붙들었지만 좀처 럼 진전은 없었다.
마치.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 일의 족쇄가 된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니 될 일이지.’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1년 넘도록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자로서 갖춰야 할 것들을 배도빈에게 보여 주고 들려주었다.
처음부터 적어도 음악에 관해서는 완벽했기에 악단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입장을 알려주었고.
배도빈은 푸르트벵글러와는 다른 답을 찾아낸 듯했다.
그 또한 방법이리라.
그리 생각한 푸르트벵글러는 이제 배도빈을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거대한 성 조차 배도빈이 이끄는 변화의 물결을 견뎌낼 순 없었다.
언젠가는 올 일이 다가왔을 뿐이라 생각하며.
그 시기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빨랐을 뿐이라 생각하며 푸르트벵글러는 기쁘면서도 아쉬웠다.
카밀라 앤더슨이 베를린 필하모닉 의 모든 단원을 한자리에 모았다.
200여 명의 단원이 의아하게 있는 데 단상에 푸르트벵글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오랜만에 보는 단원들은 반가 운 마음에 소리를 치려고 했다가 그 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를 떠올리 곤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카밀라 앤더슨이 입을 뗐다.
“저희 베를린 필하모닉 운영진은 오케스트라 대전에 출전시키기로 결 정하였습니다.”
단원들이 잠시 술렁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두 팀으로 나 뉘어 참가할 것입니다. 기존에 준비 하고 있던 B와 별개로 A팀 역시 출 전.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객원 지휘자 신분으로 지휘를 맡아주실 예정입니다.”
푸르트벵글러의 복귀 의사를 전달 받은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주와 운 영, 사무국은 투표를 다시 해서라도 그를 복직시키려 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뜻깊은 전 통을 깰 수는 없다고 고집, 베를린 필하모닉의 객원 지휘자로서 합류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단원들은 울 컥한 마음에 단상을 몰려들었다.
그 누구도 푸르트벵글러를 객원 지 휘라고 생각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프!”
“졔셩해여어!”
“이제 괜찮은 거예요?”
단원들을 다독인 푸르트벵글러는
상황 설명을 뒤로하고 마이크 앞에 섰다.
“OOTY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A의 참가를 특별히 승인해 주었다. 말 그대로 예선을 치르지 않은 특별대 우다. 그간 우리가 쌓은 이름값 덕 분이겠지.”
“적폐다. 고집이고.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하지만 나는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돌려 얼굴 이 활짝 핀 배도빈을 보며 말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A의 목표는 우승. 그리고 그것은 B도 마찬가지다. 배도빈 악장.”
“ 네.”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우승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지고 이곳을 떠 나라.”
푸르트벵글러의 복귀 소식에 기쁨으로 가득 찼던 회장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