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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31화 (23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37화

    54. 다른 누구도 아닌(3)

    점심시간 이후 오후 공연이 준비되는 시간에 베를린 필하모닉 A의 몇 몇 사람이 대기실로 향했다.

    “어제 빈 필 연주 들어보니 세프가 왜 칼 에케르트를 칭찬하는지 알겠더라고.”

    “그랬나?”

    “작년부터 조금씩 언급하시더라.”

    “빈이고 암스테르담이고 우리 상대는 못 되지.”

    한스 이안의 말에 공연 전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견습 시절의 철없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도 지금의 한스 이안은 온전 한 동료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그 가 무려 11년간의 노력 끝에 정식 단원으로 들어온 이력을 알기 때문 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그의 자부 심은 기존 단원과 함께 입단한 이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래. 세프도 복귀하셨고 더 열심 히 해야지.”

    “당연하지.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이 세계 최고라는 걸 보여주잔 말이야.”

    한스 이안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의 말에 일행은 웃었고 오늘 마 지막 차례로 예정된 연주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렇게 대기실 앞에 이르렀는데 복 도에서 런던 필하모닉의 악장 레몽 도네크와 마주쳤다.

    “아.”

    일행은 레몽 도네크와 눈인사를 나 누었고 필요 이상의 대화는 입에 담 지 않았다.

    아들의 치료비용을 대기 위한 선택 이라 예상할 뿐.

    하지만 그마저도 그럴 거라 여기는 것이었지 레몽 도네크에게서는 그 어떤 말도 직접 듣지 못했었다.

    동료로 생각했던 그에게.

    더욱이 그가 단원들이 가장 신뢰했던 다섯 명의 악장 중 한 명이었던 지라 이적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점 이 더 충격이었다.

    편히 대하기에 그들은 이미 너무도 멀어져 버렸다.

    일행과 레몽 도네크가 그렇게 지나 친 순간 한스 이안이 몸을 돌렸다.

    “왜.”

    그의 목소리에 레몽 도네크와 일행 이 함께 몸을 돌렸다.

    “ 한스.”

    한 남자가 한스 이안을 말리려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왜 우리에게 한마디 말도 안 했습 니까?”

    레몽 도네크는 답이 없었다.

    “20년을 함께한 단원들보다 그 사람들이 더 믿음직스러웠습니까?”

    “그만해.”

    한스 이안과 함께 입단한 닐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이미 감정이 격해진 한스 이안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대체 당신에게 우리는.”

    그가 닐스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금 쏘아붙이려 할 때 레몽 도네크가 입을 열었다.

    “20년이나 함께해서 문제였지.”

    “……뭐라고요?”

    레몽 도네크가 한스 이안을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런 던 필하모닉의 대기실로 향했다.

    “ 한스가?”

    런던 필하모닉의 연주가 시작되기 전, 닐스가 고민하다가 점심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케르바 슈타인 에게 말했다.

    “네. 많이 속상해하고 있는데 연주 에 영향이 생길까 걱정이에요.”

    “……한스도 우리 단원이야. 그 정 도 감정 컨트롤은 할 수 있을 테지.”

    “하지만 아시다시피 한스는.”

    닐스의 말에 케르바 슈타인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한스 이안은 견습 시절부터 레몽 도네크를 따랐었다.

    대학생 시절부터 오직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단하는 것만이 한스 이안의 목표였던 만큼 많은 이가 견습 시절의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건방졌던 한스 이안이 레몽 도 네크의 말에는 얌전했던 것도, 그가 정식 단원이 되었을 때 레몽 도네크 의 축하를 받고 두 주먹을 불끈 쥐 며 기뻐하던 모습도 눈에 선했다.

    “그래. 이야기해 볼게.”

    닐스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르바 슈타인은 바이올린 현을 조 이고 있는 한스 이안에게 다가갔다.

    “벌써 조이는 거야?”

    “아까 복도에서 레몽이랑 만났다며?”

    “닐스가 말하던가요.”

    한스 이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그래. 네가 레몽 도네크를 얼마나 따랐는지 아니까 걱정하는 것 같더 라.”

    “이제는 아니에요.”

    한스 이안의 말에 케르바 슈타인이 잠시 대화를 멈추고 정면을 보았다.

    여러 단원이 저마다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실은 나도 화나.”

    설교를 예상하고 있었던 한스 이안 은 예상치 못한 말에 고개를 돌렸다.

    “망할 자식. 그렇게 힘들면 얘기라 도 해주지. 악단에서 못 도와줬으면 우리라도 도왔을 거 아냐.”

    “……슈타인.”

    “그놈이랑 같이 악장 생활을 한 시 간만 8년이 넘어. 함께한 시간은 20 년 가까이 되었고. 나도 그놈도 베를린 필에서 오케스트라를 배웠어. 20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을 최고로 만들자고 이야기했지.”

    한스 이안은 묵묵히 케르바 슈타인의 불평을 들었다.

    그것은 그 어떤 말보다 그를 위로해 주었다.

    이성적인 사고를 못 해서 레몽 도 네크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그를 좋아했기에 서운하고 미안하고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화 가 나는 것이었다.

    케르바 슈타인이 솔직한 마음을 꺼 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한스 이안도 조금은 응어리를 달랠 수 있었다.

    그들이 최고라 생각하는 마에스트 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보좌하여 베를린은 세계 최고의 악단으로 만 든 뒤.

    니아 발그레이라는 걸출한 지휘자를 지지해 자신들의 음악관을 널리 펼치고자 다짐했던 그들이었기에.

    오래된 약속에 금이 가는 것을 쉽 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런던 필하모닉이 무대에 오르기 직 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묵묵히 현을 살피는 악장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그다지 말수가 많은 사람 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비장

    한 느낌이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생각대로 레몽 도네크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난 순간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려 왔다.

    현을 켜보았다.

    평소대로 완벽한 세팅이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목 아래가 묵직해 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가슴이 뛰 기 시작했다.

    레몽 도네크에게 오케스트라 대전 이외에 자신을 증명할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욕심이라면 욕심일 것이다.’

    레몽 도네크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막 입단했을 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이미 세계 최고의 지휘자였다.

    연주자들 역시 각 분야에 있어 최 고 수준이었으며 레몽 도네크는 반 드시 이곳에서 지휘봉을 잡을 거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한 천재가 있었다.

    당시 고작 20대 중반의 니아 발그 레이는 너무도 특출했다.

    5년이 흐르고 10년이 흘러 그도 악장이 되었지만 그로서는 니아 발그레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부단히 노력했지만 레몽 도네크는 자신보다 어린 니아 발그레이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보물, ‘캐논’은 결국 니아 발그레이에게 주어졌다.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레몽 도네크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위해 니아 발 그레이를 인정했다.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의 숭고 한 정신을 잇는 사람은 그 외에 없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도 따라잡지 못했기에 인정할 수 있었다.

    곧 레몽 도네크는 니아 발그레이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조력자가 되었다.

    그것은 케르바 슈타인이나 다른 악 장들도 마찬가지라 그들은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제국의 번영을 위해 푸르트벵글러와 니아 발그레이를 최 선을 다해 보좌했다.

    뛰어난 연주자들이 속속들이 입단 했고 제국은 더욱 굳건해졌다.

    영원할 것 같았다.

    악단은 점차 커졌고 기라성 같은 다른 악단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그렇게 또 수년이 홀러.

    배도빈이란 천재를 처음 만났을 때는 푸르트벵글러와 니아 발그레이 이 후, 자신이 은퇴한 뒤에도 번창할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올릴 수 있었다.

    레몽 도네크는 제국의 번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

    니아 발그레이의 건강에 문제가 생 겼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푸르트벵글러 이후 차기 상임 지휘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니아 발그레

    이일 거라 생각했던 레몽 도네크에 게 그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이미 고령 이었다.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레몽 도네크는 정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부정했고 화를 냈다.

    그리고 체념했을 때 그의 가슴속에 서 새로운 의지가 타올랐다.

    제국이 무너지도록 두지 않겠다고.

    레몽 도네크는 젊었을 적의 의지를

    다시금 태우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의 뒤를 잇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푸르트벵글러를 찾아가 자신의 악보를 보여주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크 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처음부터 무척 어려운 일이라 여겼 기에 그는 천재, 니아 발그레이를 따라잡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충 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푸르트벵글러의 아이라 불리는 다 섯 사람 중, 상임 지휘자에 가장 적

    합했던 니아 발그레이가 은퇴한 이 상 다음은 나머지 네 명 중 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서라 도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떠났던 배도빈이 복귀했다.

    레몽 도네크는 너무도 반가웠다.

    다른 악단들에 조금씩 밀리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니아 발그레이 은퇴 후 더욱 쇠퇴하고 있었고 천재 배도빈의 복귀는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줄 거라 여겼다.

    지휘자가 되기 위해 몇 년을 더 준비한 만큼,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의 의지를 이어받을 그의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서 배도빈은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유례없는 방식과 속도로 배도빈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핵심 인력으로 끌어올렸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레몽 도네크가 스스로 물러설 정도였던 니아 발그레이의 재능을

    넘어서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하지만 베를린의 음악이 변해가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었다.

    배도빈이 돌아온 뒤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빈 필하모닉만큼은 아니었지만 지 극히 고전적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닉 은 어느 순간 곡 자체를 변형해 연주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레몽 도네크는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수 차례 진언했다.

    변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체성이 사라

    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그때마다 레몽 도네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불만이 쌓이던 도중 베를린 필하모닉 B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오래 전부 터 차기 지휘자로 배도빈을 내정한 듯,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나갔다.

    20년을 지켜왔던 그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더 이상 그를 필요치 않는 듯했다.

    몇몇 언론에서는 그의 이적이 아들 의 병과 경제적 어려움이라 이야기 했다.

    그것은 분명 그를 힘들게 하는 큰 일이었으나 그가 런던으로 향해야 할 이유는 아니었다.

    지켜야 할 음악이 있다는 생각이 일치했고 동시에 레몽 도네크가 스 스로 옳았음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 이었기 때문이었다.

    “10분 전입니다!”

    대회 진행 요원의 말에 레몽 도네 크가 그의 바이올린을 챙겨 무대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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