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30화 (230/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36화

54. 다른 누구도 아닌(2)

어제도 늦게까지 악보를 들여다보 고 있었는데 이런 말까지 하니 배도빈이 오케스트라 대전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분명히 짚어주고 싶었다.

“63퍼센트나 지지해 줬잖아.”

최지훈이 달랬으나 배도빈은 여전 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청난 거라구.”

배도빈은 앞에 놓인 빵을 하나 집 더니 잼을 듬뿍 떠 얹었다. 딸기 과육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밀도 높은 그것을 먹고 나서야 입을 뗐다.

“빈 필하모닉도 58퍼센트였어.”

배도빈이 빈 필하모닉 역시 압도적 인 차이로 진출한 것을 언급했다.

첫 번째 날만큼이나 두 번째 날도 큰 점수 차가 벌어졌는데 빈 필하모닉은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점수에 근소한 차이를 보일 정도로 고득점을 올렸었다.

‘혹시.’

배도빈은 항상 노력했지만 그것은 오직 더 아름다운 음악을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처럼 타인을 의식한 적 은 없었다.

그렇기에 최지훈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부담스럽게 느낄지도 몰라.’

팬과 업계 종사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최지훈은 배도빈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정신을 지닌 완성된 음악 가로 여겼다.

하지만 동시에 알려진 바와 달리 배도빈이 다정하다는 것도, 격정가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것이었다.

어쩌면 초조해하고 있을지도 모른 다고 말이다.

배도빈이 2차전에 연주하기로 예정 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의 주제를 흥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최지훈이 소 리 없이 웃었다.

배도빈이 불안해하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재밌어?”

“ 뭐가?”

“오케스트라 대전.”

배도빈은 싱긋싱긋 웃는 최지훈을 보더니 이내 커피를 마셨다.

자신의 능력에 절대적인 자부심을 가진 만큼 배도빈은 타인을 평가하는 데 관대한 편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안다면, 특히 마누엘 노이어라면 ‘그 악마 같은 꼬맹이가?’라고 되묻겠지만 적어도 배도빈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오만과 맞닿아 있는 감정이었는데 배도빈이 평소 다른 음악가를 평할 때 후한 것도 모두 자기 아래라 여겼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대전만큼은 아 니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베를린 필하모닉 A를 비롯한 소수 악단은 강 력한 경쟁자였다.

더군다나 정신병자라 여겼던 아리엘 핀 얀스가 제법 훌륭한 지휘를 했고 팬 투표라는 것의 변수를 경험 했기에.

오만한 베를린의 마왕은 마치 10대 소년이었을 때처럼 두근거렸다.

그 스스로 지휘에 있어서만큼은 동 등하다 여기는 두 사람과 대회에서 생기는 변수들로 인해(더욱이 그것 이 팬들의 선택으로 생긴 것이니만 큼) 음악을 하지 않고는 뛰는 가슴을 달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자존심이 그것을 인정하 기 싫을 뿐이었다.

“그다지.”

배도빈이 시큰둥하게 답했고 최지훈은 어깨를 으쓱인 뒤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어제, 2조의 연주를 떠올리며 감탄했다.

“그나저나 어제 빈 필 정말 대단했던 거 같아.”

“전혀.”

“아냐. 내 생각엔 C단조를 선택한 것부터가 대담했던 거 같아. 제일 많이 연주되는 곡인만큼 부담도 되었을 텐데 그런 거 없이 멋지게 소화했잖아.”

최지훈의 말대로 빈 필과 지휘자 칼 에케르트는 5번 교향곡(운명)을 너무도 훌륭히 연주해냈다.

“약했어. C단조 동기는 그렇게 연주하는 게 아니야.”

“그래? 난 좋던데.”

최지훈과 대화를 이어나가던 배도빈이 문득 최지훈을 보다가 입을 심 술 맞게 들어 올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최지훈이 웃었다.

“나 처음 봐. 네가 그렇게 이기고 싶어 하는 거.”

지금까지 부정하던 배도빈도 흥미 진진하여 잔뜩 달아오른 최지훈의 얼굴을 보고선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쩔 수 없잖아.”

“히히 힛

"왜 그렇게 봐?”

“그냥.”

최지훈은 유년 시절의 배도빈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았기에 그저 기뻤다.

고독했던 형제가 놀이터를 발견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즐거 웠다.

‘좀 더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최지훈의 눈에는 배도빈이 마음껏 놀고 싶은데 고집 때문에 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팬 투표는 더 끌어올려야 해.”

“ 얼마나?”

“당연히 전부지.”

“도빈. 욕심쟁이.”

얼핏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소소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배도빈이 커피 잔을 내려놓자 때마 침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소소가 나윤희, 진달래와 함께 내려와 있었다.

소소는 오버핏의 박스 티를 입은 편한 차림이었고 나윤희는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였는지 항상 보던 모습이었다.

진달래는 액슬 로즈의 얼굴이 그려 진 티와 칠부 바지를 입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최지훈이 웃으며 세 사람을 맞이했다.

“그제는 정말 대단했어요. 정말 많이 준비하신 것 같더라고요.”

첫 번째 날 베를린 필 B의 에로이 카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 겨주었고 최지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연주가 가능한 곳은 베를린 필하모닉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정도는 해야 해.”

배도빈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도빈. 가혹해.”

“안 그래요.”

“나, 나도 소소랑 같은 생각이야. 도빈아, 조금은 풀어주는 게 어떨……까?”

최지훈이 세 사람의 대화를 일단 지켜보았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들이라 해도 첫 번째 날의 에로이카 같은 연주가 그냥 나올 수는 없었다.

분명 베를린 필하모닉도 땀 흘려 준비했을 테고 자신의 연주에 더없이 엄격한 배도빈에게 얼마나 시달렸을지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소소와 나윤희의 태도는 그런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또 커피.”

소소가 배도빈의 커피 잔을 보며 타박했다.

나윤희가 호응하듯 배도빈의 커피 잔을 치웠다.

“너,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아.”

“또 안 잤어?”

소소가 또다시 탓하듯 물었다.

그들의 지휘자가 또 얼마나 2차전 준비를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눈 앞에 선했다.

‘다들 생각해 주는 거였구나.’

가혹하다는 말이 단원들을 향한 것 이 아니라 배도빈 본인을 몰아붙인 다는 뜻임을 확인한 최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을 기반으로 한 대회를 즐기는 모습.

어느새 악단 내 융화된 모습을 보 며 최지훈은 고집스럽고 고독한 형 제를 향했던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잤어요.”

“ 얼마나?”

“3시간 정도요.”

“커피 줘요.”

배도빈이 나윤희에게 손을 뻗었고 나윤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A랑 런던 필하모닉은 오후니까 조, 조금 더 자두는 게 좋아.”

그때까지 다른 말없이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진달래가 스르 륵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고 코를 킁킁대어 냄새를 맡고는 나윤희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접시는?”

“저기 있어.”

“응.”

진달래가 비틀비틀 걸어가자 배도빈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다른 악단 연주도 들어야죠.”

다시 한번 커피를 돌려 달라는 말 에 나윤희는 갈등했고 소소는 친구 이자 제2바이올린 수석을 지그시 보 며 압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윤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배도빈을 설득하는 길뿐 이었다.

“아, 안 돼. 커피 많이 마시면.”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나윤희가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자 배도빈이 하는 수 없이 커피를 가지러 일어났다.

나윤희가 눈을 꼭 감으며 말했다.

“커, 커피 많이 마시면 키 안 큰다?”

잠깐의 정적 끝에.

최지훈이 푸흡, 웃어버렸다.

“맞아. 도빈 작아.”

배도빈은 일어난 상태로 말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밖으로 향했다.

3 일째.

노르웨이의 오슬로 필하모닉이 첫 번째 순서로 나섰다.

북유럽만의 특색을 유지해 온.

고난의 역사를 이어온 오슬로 필하모닉은 베토벤 교향곡 1번, C장조를 훌륭히 연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성공적으로 변화한 오슬 로 필하모닉는 그들의 역사를 1번 교향곡으로 증명해내는 듯했다.

오슬로 필하모닉의 연주가 끝나고 차채은이 입을 열었다.

“무난하네요. 그렇다고 단조롭지는 않고. 안드레아 프레빈답네요.”

이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채은 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지. 현대적이진 않지만 애조를 담아내서 잘 표현하고 있어. 이 거 높은 점수를 기대해도 될 것 같은데.”

차채은도 같은 생각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1번 C장조는 베토벤의 명성과 달리 꽤 늦게 발표되었는데 그만큼 많은 준비를 거친 작품 이었다.

그 흔적은 곡 중간중간에서 엿볼 수 있는데 기본 조성을 교묘하게 피 하여 삽입한 것이라든가 당시로서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클라리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부분 등.

여러 부분에서 앞선 음악가(하이든, 모차르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고자 노력한 모습이 보이는 곡이었다.

그러면서도 양식은 맞췄으니 현재 고전음악을 연주하면서 그 틀을 무너뜨리지 않고 변화해 연주하는 오 슬로 필하모닉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차채은이 느낀 바를 메모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세윤 기자가 물었다.

“좋은 습관이네.”

“아, 이거요? 도빈 오빠가 항상 메모하고 다니기에 따라하다 보니 버 릇이 들었어요.”

“그래? 난 배도빈 같은 천재는 후딱 만들어내는 줄 알았는데.”

“말도 마세요. 진짜 엄청 하고 다녀요.”

차채은은 배도빈의 방을 가득 채운 악보와 메모지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런 차채은을 기특하게 보던 이필 호가 지친 목과 어깨를 풀며 말했다.

“편하게 봐도 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오늘 오후랑 2차전이니까.”

“그러고 보니 진짜 다행이에요. 베를린 필하모닉 B랑 션윈이 올라갔으니 한국인 세 명이 다 오른 거잖아요.”

“그렇지. 그 세 사람만은 놓칠 수 없지.”

이필호가 배도빈, 최지훈, 최성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희, 이승훈 남매.

특히 이승희의 경우에는 이미 오래 전에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대한민국보다는 해외에서 비중이 있었다.

이승희의 경우에는 국내 활동이 턱 없이 적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의 첼로 수석으로서 벌써 십수 년을 보낸 만큼 어 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내 클래식 음악 팬 구성층이 기 존보다 새로 유입된 인원이 많은 상태인 것도 문제였다.

대부분 콩깍지 신드롬 이후 새로 유입된 국내 클래식 음악 팬들은 배도빈과 최지훈의 개인 팬에 머물러 있었는데, 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 어온 사람은 이승희에 대한 소식을 찾고 싶어도 그 보도 자료가 많지 않아 아쉬운 상황이었다.

‘관중석’도 그러한 상황을 인지하 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에는 매출에 신경 써야 하다 보니 거 의 대부분의 이야기를 배도빈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최지훈, 남궁예건, 최성신도 확실한 고정 팬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종종 언급되기도 했지만 이승희에 대해서는 중요 소식만 알릴 뿐이었다.

더욱이 국내 활동이 전혀 없었고 대학 졸업 이후 곧장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으로 향한 이승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식은 뛰어나나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인지가 없는 차채은은 뛰어 난 두 사람이 국내에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활약 중인 또 다른 천재도 마찬가지로 여겼다.

“왜요. 승희 이모랑 윤희 언니도 놓치면 안 되잖아요.”

"음."

이필호가 신음했다.

편집장으로서 추천할 만한 일은 아 니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차채은에 게 경제적 이유로 기사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한번 써볼래?”

“네!”

차채은이 시원하게 답했다.

“이승희 씨야 워낙 대단하신 분이 니까 괜찮은데 나윤희 바이올리니스 트는…… 뭐랄까. 인터뷰를 해도 너무 소극적이라서 알기 힘들달까. 괜찮겠니?”

그때 정세윤 기자가 걱정스레 입을 뗐다.

차채은이 펄쩍 뛰며 부정했다.

“윤희 언니가 얼마나 대단한데요!”

“그거야 나도 알지. 실력이 없었으면 어떻게 베를린 필에서 수석 자리 에 앉았겠어. 하지만 문제는 스타성 이지.”

“진짜! 진짜 엄청 귀엽다고요. 볼수록 매력덩어리니까 팬들도 언젠가 알아줄 거예요.”

“하하하. 한번 해봐. 혹시 모르잖아. 나윤희 바이올리니스트가 채은이 덕 좀 볼지.”

차채은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