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29화 (229/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35화

54. 다른 누구도 아닌(1)

“합리적인 방안인 듯하네요. 자세 히 들려주시겠습니까?”

협회 이사의 질문에 카밀라 앤더슨 과 함께 운영회를 방문한 빈 필하모닉의 사무국장, 필립 람이 나섰다.

“현실적으로 악단에 대한 팬들의 개인적 투표를 막을 방도는 없습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선정 하는데 있어서 인기가 없는 오케스트라가 꼽히는 것도 잘못된 일이죠. 그러니 완충제를 넣자는 의견입니다.”

필립 람의 말을 카밀라가 받았다.

“4개 악단을 투표할 때 순위를 매겨 4점부터 1점까지 투표한다면 팬 들의 선택도 존중되고 오늘, 첫 조와 같은 일도 줄어들 거라 예상합니다.”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는 카밀라 앤더슨과 필립 람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몇몇 관계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 역시 표가 쏠릴 것을 우려하여 복수 투표 방식을 채택했지만 ‘인구’에 대해서는 미처 대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각 조에 순위를 매긴다면 연고로 기반으로 한다 해도 어느 정도 해결점을 가질 수 있을 듯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현 시점에서는 카밀라 앤더슨과 필립 람 등의 의견이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날의 결과를 번복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운영회에서 의견이 조율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미카엘 블레하츠가 감사를 표했다.

운영회를 방문한 이들이 돌아서고 이사들은 다시금 대책 의논에 들어 갔다.

“카밀라 앤더슨 국장의 말이 일리 있어 보입니다.”

“말 그대로 완화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죠.”

“하지만 현재로서는 달리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팬 투표를 제외하는 것도, 비율을 조정하는 것도 더 큰 문제가 될 겁니다.”

“오케스트라 대전의 권위가 떨어지 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론은 자꾸만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어쩌면 이대로 가는 것이 나을지 도 모릅니다. 이미 2차전 진출 악단이 발표되었습니다. 그걸 번복하는 것 역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끄응.”

모두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운영회는 다시 길을 잃었고 묵묵히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한국 클래식 음악 협회장이자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 이사, 한지석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으려는 일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습니다.”

이사들이 그에게 집중했다.

“항아리를 다시 채우려면 물을 새로 담는 수밖에 없죠. 악단 관계자 들의 의견은 분명 좋은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다음부터 적 용하는 게 맞습니다. 이번에는 밀고 나가야죠. 그렇다고 젖은 바닥을 그 대로 둘 수도 없는 법이니……

한지석의 화법은 묘하게 설득력을 가졌다.

협회는 대회의 위신이 떨어지고 세계 유력 악단들이 모두 참가한 오케스트라 대전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갑작스러운 변동은 자칫 대회 준비가 미흡했음을 홍보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한국 클래식 음악 협회를 오래 운영했던 한지석은 그 점에 착안, 이 야기를 진행했다.

“탈락 조 중에 심사 위원단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은 상위 몇 악단 에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겁니다. 아마 탈락한 악단도, 그곳의 팬들도 반가워할 겁니다.”

“아.”

패자부활전 (Repechage) 이라면 많은 대회에서 차용했던 방식이니만큼 그것에 대한 반발은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적어도 1조의 결과를 번복하는 것 보다는 말이다.

“괜찮은 방법입니다. 다시 기회를 얻은 악단들도 반가워하겠군요.”

마침내 협회의 의견이 모아졌다.

“큰 틀이 정해졌으니 세부적인 이 야기로 넘어가죠. 내일 아침에는 발표해야 합니다.”

길을 찾은 운영회는 밤샘 논의 끝 에 다음 날 아침, 새로운 룰을 발표 했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새로운 룰이 추가됩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팬 여러분 께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새로 운 룰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대회 운영진은 아래와 같은 사유로 6월 1일, 2차전에 진출하지 못한 악단들을 취합, 패자부활전을 진행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은 클래식 음악의 질적, 양적 발전을 도모 한다.

2. 각 악단은 역량에 따라 충분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

3. 1항과 2항을 사유로 충분한 기 량을 선보인 악단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한다.

4. 패자부활전에 진출하는 악단은 21개 악단 중 상위 10곳으로 제한 한다. 진출 팀은 4곳으로 규정한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을 관람하시는 팬 여 러분의 성화에 감사드리며, 대회 운 영에 있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협회의 대응책에 그때까지 부풀었던 팬들도 조금은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ㄴ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느없던 룰도 아니고 괜찮네.

ㄴ 솔직히 대회 도중에 룰을 바꾸는 게 정상은 아니지. 처음부터 시작을 잘못하긴 했어도.

ㄴ 팬 투표 없애자는 헛소리보다 이게 훨 낫다.

ㄴ 난 점수제 도입도 괜찮아 보였는데.

ㄴ 나도.

ㄴ 그게 최선인 것 같아도 이미 판정이 났잖아. 그거 번복하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을 듯. 협회가 판단 잘 한 거임.

첫 회 운영인 만큼 부족했던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기존 판정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규정이 보수 되는 일은 팬이나 음악계 인사들에 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당연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이었다.

팬들은 수려한 외모와 음악적 재능으로 순식간에 다크호스로 부상한 아리엘 핀 얀스에게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포착한 각 언론은 로스앤젤레 스 필하모닉의 지휘자 아리엘 핀 얀 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곧 아리엘 핀 얀스와 악장 이승훈이 공식 회견을 가졌다.

“룰 추가로 인해 패자부활전 진출이 확정되었습니다. 어떤 심경이십니까?”

“모래바람이 몰아친다 해도 찬란히 빛나는 의지까지 막아설 수는 없는 법. 나와 로스앤젤읍.”

“우선 새 기회가 주어졌음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승훈이 기자의 질문에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 아리엘 핀 얀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기자들은 눈을 껌벅댔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럴까 봐 내가 나온 거잖아. 조용히 좀 해.”

“하. 이미 흥이 깨졌다. 돌아가지.”

이승훈의 손을 떼어낸 아리엘이 입을 씻기 위해 일어섰고 그대로 회견 장에서 벗어났다.

아리엘의 돌발행동에 기자들과 중 계를 보고 있던 사람 모두 당황했다.

모두가 할 말을 잊은 상황에서 이 승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진행하시죠.”

*

논란이 컸던지라 1조 1위에 올랐던 베를린 필하모닉 B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협회의 입장 발표로 인해 결과에 변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조촐하게 자축했다.

“연습할 땐 진짜 힘들었는데 알아 주긴 하네.”

“말도 마. 나 손끝이 저려서 얼마 나 걱정했는데.”

“자자, 오늘은 가볍게 즐기고 또 2 차전 준비하자고. 내일 A팀 응원도 하고.”

파티라고는 하지만 단원들이 모여 저녁을 함께하는 정도였기에 분위기는 비교적 차분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단원들이 배도빈을 찾기 시작했다.

“도빈이는?”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아, 먼저 들어갔어요. 다들 신경 쓸 거 같아서 그냥 올라간다고 했어요.”

나윤희의 말에 단원들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쉬지 않는구나.”

“도빈이니까요. 아마 2차전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잠시 레스토랑 안이 조용해졌고 디스카우가 손뼉을 치며 이목을 끌었다.

“자자, 우리 지휘자께서 열심히 하 는데 우리도 부응해야지 않겠어? 다들 돌아가자고.”

* *

시작부터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낸 오케스트라 대전은 세 번째 날을 맞이했다.

3조는 예선 중 가장 큰 이벤트라 할 수 있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포함된 악단의 이름과 그들 사 이의 스토리가 명백했다.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A와 마술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런던 필하모닉.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의 사이 가 앙숙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두 악단은 2년 전부터 런 던파와 베를린파를 대표하면서 유럽 클래식 음악계를 양분하고 있었다.

거기에 전(前) 베를린 필하모닉 악 장 출신인 레몽 도네크가 런던 필하모닉의 악장으로 이적했으니 이러한 관계에 팬들은 물론, 음악계 인사들 마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콘서트홀을 방문한 사람들은 삼삼 오오 모여 오늘의 빅 매치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어디가 올라갈까?”

“그게 중요하겠냐? 당연히 런던이랑 베를린이지. 다른 곳도 괜찮지만 푸르트벵글러랑 토스카니니에 비빌 수준은 아니잖아.”

“맞아. 진출 팀은 사실상 정해졌지. 난 자존심 싸움이 더 재밌을 듯.”

구경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볼거리였으나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치열한 전쟁이었다.

푸르트벵글러가 언제나 그러하듯 아침부터 단원들 불러 모았다.

“최고가 아니면 용납할 수 없다.”

실수를 한다는 것은 베를린 필하모닉 A의 기준이 못 되었다. 최고의 연주를 하는 것만이 푸르트벵글러와 그들의 목표였다.

그렇기에 푸르트벵글러는 공연 전 항상 ‘우리가 최고다’라든지 ‘최고의 연주를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발언을 하곤 했다.

이번에도 비슷했으나 유독 오늘만 큼은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도 유달리 받아들였다.

인터플레이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직접적인 언론 플레이는 사그라졌으나 런던 필하모닉이 추구하는 음악 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신은 정 반대였다.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고 더욱이 질 수 없는 사유도 명백했다.

레몽 도네크의 이적.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은 공식적으로 그의 이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푸르트벵글러의 아이 (베를린 필하모닉이 자랑하는 다섯 악장. 니아 발그레이, 케르바 슈타 인, 헨리 빈프스키, 파울 리히터, 레 몽 도네크) 중 레몽 도네크의 이적 은 그들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일부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고.

또 몇몇은 레몽 도네크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질 수 없었다.

20년 이상 함께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큰 상처였기에 언급하진 않으나 푸르트벵글러의 말은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단원들 역시 공유하고 있는 감정이었기에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

*

최지훈은 그제부터 몹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배도빈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가족과 최지훈 등 몇몇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잘 웃게 되었지만 배도빈의 디폴트 표정은 짜증이었다.

그것에 익숙해져 지금은 도리어 그 표정마저 귀엽게 여기는 최지훈이 보기에도 요 며칠간 배도빈은 무척 불쾌해 보였다.

지금도 조식을 먹기 위해 내려왔는 데 식사는 안 하고 커피로 가끔 목을 축일 뿐이었다.

최지훈이 소시지를 잘라 배도빈에게 권했다.

심각하게 있던 배도빈이 무심코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이 없어졌기에 최지훈이 다시 한번 샐러리를 입에 가 져다 대었다.

또 입을 벌려 받아먹더니 배도빈이 얼굴을 왕창 구기며 최지훈을 보았다.

“뭘 먹이는 거야.”

최지훈이 웃으며 물었다.

“런던 필하모닉 때문에 그래?”

“그럴 리가.”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배도빈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들과 함께 결선에 오르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런던 필하모닉 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푸르트벵글러와 단원들이 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푸르트벵글러의 복귀 무 대를 기대하긴 해도 다른 이들과 달 리 자존심 싸움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럼 왜?”

“……만점이 아니야.”

“어?”

“팬 투표 점수.”

최지훈은 내심 자신이 함께하는 2 차전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