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34화
53. 파괴와 창조(3)
머리가 아픈 녀석이라 생각했거늘.
아리엘 핀 얀스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훌륭히 이끌었다.
안 그런 곡이 없지만 여섯 번째 교향곡 전원은 내게도 특별한 곡이었다.
자연은 언제나 내게 깊은 감동과 악상을 선물해 주었고 빈 근교를 산책하며 나는 전원을 준비했다.
몇 년간 짧게라도 산책을 하면서 감정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고, 묘사를 위한 연주는 실패할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너무도 잘 나온 곡이었다.
그러한 곡을 지휘한다기에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지켜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큰 희망’과 ‘용감한 영혼’을 녹음했던 당시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떠올랐다.
토마스 필스가 지금의 연주를 듣는 다면 무척 만족할 거라 생각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단원들은 악기의 음색을 활용하여 곡을 표현 하는 데 통달한 수준이었고 아리엘 핀 얀스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내 심장에 창을 꽂는다 했던가.
재밌는 녀석이다.
* * *
첫 번째 날의 모든 연주가 끝났다.
심사 위원단은 각자 채점한 표를 취합했고 팬들은 마음이 동했던 악 단에 투표하였다.
결과 발표까지는 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대축전극장을 찾은 이들은 여유롭게 오늘의 연주에 대해 이야 기 나누며 발표를 기다렸다.
“왜 다들 베를린 필하모닉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어요.”
“만들어진 지 1년밖에 안 되었다는 게 신기한 일이지.”
“그러니까요. 처음에는 지나치게 투자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마에
스트로 푸르트벵글러에겐 확신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하하. 배도빈이란 음악가를 두고 활용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죄겠지.”
제르바 루빈스타인이 단원과 이야 기하며 웃었다.
배도빈이 연주하는 캐논을 더 듣고 싶었지만 어느새 어엿한 지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배도빈이 앞으로 또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도 기대되었다.
‘푸르트벵글러도 고민이 많겠지.’
제르바 루빈스타인은 자신이라면 배도빈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 보았다.
가능하다면 상임 작곡가로 악단에 두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곡은 더욱 많은 사람이 들어야만 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하는 독 주자로 쓰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는데 힘겹게 연주하던 어릴 때와는 달리 성장한 지금 대체 얼마나 멋진 연주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그러나 또 ‘찰스 브라움’이나 오늘 ‘에로이카’를 지휘하는 걸 들어보면 배도빈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의 연주를 듣고 싶기도 했다.
하나의 영역에 머물러 있기에는 그 재능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제르바 루빈스타인은 푸르트벵글러가 왜 베를린 필하모닉 B를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배려 한 거겠지.’
베를린 필하모닉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자신이 울타리가 되어 배도빈을 제한하지 않도록 말이다.
‘성격은 개차반이라도 따듯한 면이 있는 친구라니까.’
제르바 루빈스타인이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 그런가, 빌헬름?”
“뭐가?”
“도빈 군 말일세. 베를린 필하모닉 으의 정식 지휘자로 임명하지 않은 건 언제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거지 않은가.”
지금까지 푸르트벵글러의 행동을 봤을 때 이번 연도 초,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정식 지휘자로 임명되지 않은 것이 의외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르바 루빈스타인의 질문 에 푸르트벵글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원들이 자신을 내쫓아서 그럴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말하는 일을 푸르트벵글러의 자존심이 허락할 리 없었다.
“하하. 내 생각이 맞는 모양이군.”
“멋대로 생각해.”
푸르트벵글러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그건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아리엘 핀 얀스도 비슷한 느낌인가 보군.”
"음."
두 거장의 화제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또 다른 천재에게로 넘어 갔다.
“마리 얀스의 손자라 했지? 저런 인재가 이제야 두각을 드러내다니. 쇠락할 줄 알았더니 건재하네.”
“얼마 전에 찾아와 손자 자랑을 늘어놓더군.”
“자랑할 만하지 않은가. 마치 젊었을 적의 사카모토 료이치를 보는 듯 하군.”
“흥.”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이 인정하는 최고의 라이벌인 사카모토 료이치를 언급함에 있어 제르바 루빈스타인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 이 그러했다.
아리엘 핀 얀스는 악단을 섬세하게 조율하여 극상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지휘자였다.
마치 20대 중반에 막 빈 필하모닉 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사카모토 료이치를 보는 듯했다.
“하나엘도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맡겼겠지.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모 인 대회에 도빈 군이나 아리엘 군 같은 사람이 있어 즐겁네. 즐거워.”
**
관객들이 절반쯤 빠져나간 대축전 극장 무대에 심사 위원단 대표가 올라섰다.
각자 느낀 바를 공유하며 떠들썩했던 콘서트홀이 조용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심사 위원을 맡은 에두아르 헤르젠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을 테니 곧장 2차전으로 진출할 악단을 발표하겠습니다. 팬 투표에 참여한 분은 총 141만 7,011분이셨습니다.”
에두아르 헤르젠이 말을 마치자 준 비된 스크린에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의 로고와 오케스트라 대전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다섯 악단이 획득한 점수가 표기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B
심사 위원단: 30(300점)
팬 투표: 44.2(894,012표)
합계 81.8(1 위)
모두의 예상대로 첫 날 1위는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차지했다.
심사 위원 30명에게서 모두 만점을 받았기에 30퍼센트로 환산한 점 수 30점을 부여받았고.
총 1,417,011표 중 63퍼센트에 해 당하는 894,012표를 얻으면서 70퍼 센트로 환산한 점수 44.2점이 더해 져 총 81.8점을 기록한 것이었다.
ㄴ 압도적인데?
ㄴ 진짜 미쳤닼ㅋㅋㅋ
ㄴ 우리 도빈이 하고 싶은 거 다해 ㅠ
ㄴ 63퍼센트가 쏠렸으면 나머지 네 개 악단이 겨우 37퍼센트를 나눠가진 거네;;
ㄴ 미친. 2위 보고 말하셈.
베를린 필하모닉의 점수에 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배도빈이 세계 최고의 음악가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으나 그렇다고 다른 악단의 수준이 떨어 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악단으로서 동유 럽 작곡가들의 곡을 심도 있게 연주 하는 곳이었다.
일본의 니혼 필하모니와 중국의 션윈 심포니 역시 자국을 대표하는 실 력파 오케스트라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말할 것 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라인업을 뚫고 63퍼 센트의 지지율을 얻으니 팬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여태 많은 사람이 배도빈을 최고라 추앙했지만 팬들에게 공개된 객관적 지표는 없었던 탓이었다.
그런 상황에 엄선된 심사 위원과 팬들의 의견이 수치화 되니 그 놀라 운 격차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충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션윈 심포니
심사 위원단: 25.6(256점)
팬 투표: 18.8(380,521 표)
합계: 44.4(2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심사 위원단: 30(300점)
팬 투표: 4.8(98,095표)
합계: 34.8(3위)
콘서트홀이 술렁였다.
아리엘 핀 얀스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베를린 필하모닉 B와 함께 심사 위원단으로부터 만점을 받 은 사실과 그럼에도 팬 투표에서 밀 려 3위를 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납 득할 수 없는 결과였다.
ㄴ 아니 시발 이게 뭐야.
ㄴ 투표 제대로 안 하냐? LA가 어떻게 1차전에서 떨어지냐고.
ㄴ 아마 중국 팬들 숫자가 생각보다 많은 듯.
ㄴ 팬이고 자시고 이딴 식이면 머리 많은 곳이 우승이지. 말이 되냐?
디지털 스트리밍으로 여섯 시간 이상 접속해 있었던 음악 팬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팬 투표를 통한 대중성과 엄선된 심사 위원의 전문성을 함께 책정한 다는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의 발상은 좋았으나 현실적으로 팬 투표에는 어느 정도 연고가 기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연주가 더 뛰어났는지에 대해 서는 심사 위원들의 객관적 판단이 앞서는 게 당연한 일인 만큼.
아리엘 핀 얀스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아름답고 섬세한 연주에 감동했던 팬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심지어 션윈 심포니 보다 높은 점 수를 획득한 부다페스트는 팬 투표 에서 압도적으로 밀려나 4위에 랭크 되었다.
‘그 어떤 전문가의 말보다 팬들의 선택이 중요하다’라는 배도빈의 기 본 신념이 적용되지 않는.
배도빈에게도 큰 충격인 일이었다.
내심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연주를 높게 평가했던 배도빈은 말없이 그저 무대를 지켜볼 뿐이었다.
최하점을 받은 니혼 필하모니를 지지했던 히무라는 넋이 나갔고 사카모토 료이치도 미간을 좁히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심사 위원단 대표 에두아르 헤르젠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로써 첫 번째 조에서 2차전으로 진출한 악단은 베를린 필하모닉 B 와 션윈 심포니로 결정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무대를 내려가자.
콘서트홀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첫 번째 진출 팀이 발표되자 전 세계가 떠들썩해졌다.
언론은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압도적인 결과에 집중 보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심사 방식을 비판하는데 주력했다.
미국의 한 방송국에서는 패널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이어나갔다.
“비단 중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팬들 스스로가 의식을 가지고 판단해야 해요.”
“팬 투표 자체의 문제라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까?”
“팬들을 무시하고 유지된 업계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협회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단지 적용의 문제였죠.”
“비율을 조절하는 것도 방법이지요. 70퍼센트라는 팬 투표의 점수 비율은 지나치게 높습니다.”
“그렇다고 심사 위원단의 비중을 팬 투표 위에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타협을 볼 수도 있죠. 6대4나 동률로요.”
“그것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역시 팬들이 의식을 가지는 게 중요해요. 그것만이 답입니다.”
“존, 우리는 현실적인 방안을 논의 하고 있습니다. 이상론은 누구나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당연히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도 이와 같은 문제점에 대해 심각히 받 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도중, 그들을 찾은 한 사람 이 있었다.
대회 운영진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무국장 카밀라 앤더슨을 반갑게 맞이했다.
카밀라 앤더슨은 유력 악단의 책임자들과 함께했다.
“해결책이 있으시다고요?”
“완벽한 해결은 아니지만 저를 비롯해 몇몇 분이 건의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투표를 점수제로 가시죠.”
“……아.”
카밀라 앤더슨의 말에 운영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