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27화 (22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33화

    53. 파괴와 창조(2)

    베를린 필하모닉 B와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오전 연주가 끝났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객석에 남아 배도빈의 에로이카를 되뇌고 있었다.

    곱씹을수록 감탄이 나왔다.

    ‘언젠가 새 시대를 열 거라 생각했건만.’

    사카모토 료이치는 배도빈이 이미 새 시대의 음악을 하고 있음을 오늘 지휘로 확신할 수 있었다.

    “식사하러 가시죠.”

    “오, 그래야지.”

    그때 히무라가 사카모토 료이치에 게 다가갔다.

    점심을 먹기 위해 나선 두 사람은 인근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 잡았다.

    “그러고 보니 어떤가.”

    무엇이 어떠했는지도 말하지 않았지만 히무라는 조용히 지갑을 꺼내 지폐 한 장을 사카모토에게 넘겼다.

    “껄껄. 내 뭐라 했나.”

    “오늘 연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우승할 생각인 듯하더라고요.”

    “암. 도빈 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터지 않겠나.”

    “선생님이 참가했다면 더 좋아했을 겁니다.”

    히무라는 사카모토 료이치가 참가 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빈 필하모닉이 사카모토 료이치에 게 오케스트라 대전 때 지휘를 요청 한 일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휘봉을 잡은 지가 언제인지 기 억도 안 나네. 관현악곡과 떨어진 지도 오래되었고. 내가 나서면 다른 이들에게 예의가 아니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껄껄. 그런가? 나를 몰라서 그런 거라네.”

    빈 필하모닉의 전설적인 악장이었던 사카모토 료이치의 복귀를 기다 리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듣는 팬들은 현재 밴드 음악을 하는 사카모토 료이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다.

    그가 추구하는 음악적 지향점이 달 라졌고 클래식 음악 팬들은 그의 과 거를 기억할 뿐이니 사카모토는 그 것이 부담스러웠다.

    지금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악단을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제쳐 두고서 라도 말이다.

    사카모토는 이번 오케스트라 대전을 그저 한 사람의 팬으로서 즐기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심사 위원직도 거절하였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사카모토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히무라가 물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무얼 말인가.”

    “우승 말입니다. 저는 도빈이에게 걸겠습니다.”

    히무라의 말에 사카모토가 빙그레 웃었다.

    “잃었으니 되찾을 생각인가?”

    “따고 빼시면 안 되죠.”

    “하하하하! 그도 그렇군. 어디 보자……. 빌헬름이나 마리 얀스는 당 연히 후보고. 브루노 발터의 런던 심포니도 괜찮지.”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사카모토가 잠시 고민하더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당장은 너무 어려운 문제로군. 어떤가. 우선은 오늘 참가한 악 단 중에 진출할 곳을 맞추는 게.”

    “지금이요?”

    “지금.”

    앞서 두 곳의 연주를 들었지만 오 후에 세 곳이나 남아 있었기에 섣불리 선택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배도빈의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진출은 사카모토 료이치나 히무라나 확신하고 있었기에 남은 것은 4개 악단 중 하나.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도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기에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히무라가 장고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니혼 필하모니로 하겠습니다.”

    “오오. 애국자로군.”

    “아뇨. 와타나베 선생의 니혼 필하모니는 분명 아시아 최고의 오케스트라입니다. 8번 교향곡은 와타나베 선생과 니혼 필하모니의 스탠다드 넘버인 만큼 분명 선전할 겁니다.”

    “흐음. 일리 있는 말일세.”

    사카모토 료이치는 일본의 또 다른 거장, 와타나베 아케오를 떠올렸다.

    음악적 성향이 비슷해 여러 번 교류가 있었던 만큼 니혼 필하모니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걸지.”

    “ 아.”

    히무라가 사카모토의 선택을 의아 하게 받아들였다.

    토마스 필스 사후 지휘봉을 넘겨받 은 구스타프 하나엘이 참전했더라면 히무라도 고민 없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선택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쓰러지고 현재는 22세의 어린 악장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기에 히무라는 사카모토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리엘 얀스가 유망한 인재라고는 해도 이제 겨우 22살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허허. 도빈 군은 이제 겨우 17살이지 않나.”

    2006년생인 배도빈은 2023년 현재 만 17세 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배도빈이 10년이 넘 도록 워낙 대단한 일들을 수행해 와 그의 나이를 제대로 인지 못 하곤 했다.

    “도빈이야 특이 케이스지 않습니까.”

    “지훈 군도 18살이지. 빌헬름도 15 살에 교향곡을 지어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과 직접 협연하지 않았나.”

    히무라 쇼우는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다른 분야보다 유독 음악계에서 어린 나이에 두각을 보이는 경우가 잦은 편이었다.

    실제로 그의 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카모토 료이치 역시 11살 때부터 피아노 단독 리사이틀을 가졌던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러나 그렇게 어린 나이에 데뷔한 이들 중 대부분이 음악가로서의 삶을 일찍 마감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카모토 료이치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처럼 꾸준히 천재성을 유지해 거장으로 군림하는 사람은 지구 전 체를 둘러봐도 매우 드문 경우였다.

    “선생님은 아리엘 얀스를 도빈이 같은 경우로 보시는 겁니까?”

    “흐음.”

    사카모토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개인으로 비교하면 아무래도 도빈 군이 앞설 수밖에 없지. 아리엘 군 뿐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도빈 군을 뛰어넘는 사람은 드물 걸세.”

    히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만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는 말로 인식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그 뒤에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비슷한 케이스로 본다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생각하네.”

    “예?”

    “분명 재밌는 양상이 나올걸세.”

    오케스트라 대전 첫 번째 날의 마 지막 차례였다.

    앞선 네 번의 연주로 관객도 스트 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팬들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다섯 시간 이상 들으면 피로해지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일반 팬뿐만 아니라 심사 위원단에게도 고역이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로스앤젤레스가 고전하겠는데.”

    “대기 시간도 길었으니까요.”

    “이거 큰일이로군.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마에스트로 료이치 사카모토가 심사 위원직을 거절한 게 현명 하단 생각이 드는군.”

    “하하.”

    다른 팬들과 달리 심사 위원들은 특히나 온 신경을 집중해 들었기에 체감하는 피로도가 더욱 컸다.

    이대로 남은 9일을 계속한다면 체 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음악에 대한 열 정만큼은 누구보다도 뜨거웠기에 잠 시간 눈을 붙이고 대회 진행 요원에 게 마지막 연주를 촉구했다.

    잠시 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출신의 위대한 음악가 토마스 필스가 북아메리카에서 일군 또 하 나의 찬란한 왕가.

    과거 여러 차례 세계를 깜짝 놀랄 만한 연주를 해왔던 이들은 탄탄한

    구성력과 힘 있는 연주로 많은 팬으로부터 사랑받아 왔다.

    만약 토마스 필스 경이 정식 후계 자로 지목했던 명장 구스타프 하나 엘이 함께했더라면 그 누구도 로스 앤젤레스 필하모닉이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데 이견을 낼 수 없었을 터였다.

    조율을 마치자 무대 위에 한 남자 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장 이승훈이 단원들을 일으켜 세 웠다. 그러나 관객 어느 누구 하나 박수를 보내는 일이 없었다.

    어깨에 닿는 금빛 머리카락은 조명

    을 받아 더욱 빛났고 이마에서 코로 떨어지는 선은 우아했다.

    깊게 자리한 벽안은 장인이 세공한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흰 정장과 하얀 면장갑 그리고 빛 나는 백구두.

    라트비아 출신의 젊은 음악가는 고 고하게 지휘단에 올라 오른손을 들었다가 감싸 안으며 관객들에게 인 사했다.

    넋을 놓고 아리엘 핀 얀스를 보던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 마셨고 그제야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ㄴ CG 임?

    ㄴ 그런 듯.

    ㄴ 얼굴이 꿀잼이네;;

    ㄴ 천사인 줄.

    ㄴ 누구야? 누구야? 걸어 나올 때부 터 잘쌩쁨 폭발이다TT

    ㄴ 가능.

    ㄴ 아닠ㅋㅋ 걷는 거 보고 뿜었넼 저게 어떻게 걸을 수 있는뎈ㅋㅋㅋ

    ㄴ ?? 가면은 왜 써 □ 入

    지휘단에 오른 아리엘 핀 얀스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 가면을 꺼 내 썼다.

    그의 외모를 보고 감탄하던 이들은 그의 행동에 아쉬워했고 잘츠부르크를 찾은 팬들은 그 행동을 퍼포먼스 의 하나로 여겼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은 왜 쓰는 거예요?”

    한 사람이 함께한 이에게 소근대어 물었다.

    “사람들이 자기 얼굴 때문에 음악 에 집중하지 못해서 저런대.”

    “아……

    그렇다면 애초에 쓰고 나오지 않는 이유도 묻고 싶었지만 곧 연주가 시 작되기에 더는 묻지 못했다.

    아리엘 핀 얀스가 지휘봉을 들어 가볍게 터치하듯 손을 움직였다.

    베토벤 교향곡 6번, 파스토랄레(전원).

    베토벤이 빈 근교의 바덴을 거닐며 느낀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곡이 시작되었다.

    평온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그에 따라 흔들리는 초원의 이미지가 관객 들에게 전해졌다.

    잔잔하게 시작된 멜로디가 잠시간 고조될 때 관객들은 모호했던 자연 의 풍경이 그들 앞에 다가왔음을 느 낄 수 있었다.

    현악기 뒤에 들어오는 오보에와 여러 악기는 햇살과 바람, 풀, 새, 온 기를 표현해 주는 듯했다.

    아리엘 핀 얀스는 가벼운 몸짓으로 단원들을 이끌어갔다.

    ‘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단 몇 초 만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연주 에 감탄했다.

    음악으로 ‘묘사’를 하는 일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전하려 할수록 여러 요인으로 인해 작곡가의 의도와는 달 라질 수밖에 없거늘.

    모르긴 몰라도 현재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같은 이미지를 느끼고 있을 거라 생 각했다.

    섬세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가능한,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유기체 가 내는 소리라 하기에는 너무도 상 냥했다.

    베토벤의 벅찬 마음이 이러했을까.

    연주는 활기를 더해갔다.

    못마땅하게 객석에 앉아 있던 배도빈의 얼굴에 문득 흥미가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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