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26화 (22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32화

    53. 파괴와 창조(1)

    압도적인 음량이었다.

    배도빈이 지휘하는 에로이카는 지 금껏 경험할 수 없었던 느낌으로 청중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아름다운 선율 사이마다 호른과 트럼펫이 힘 차게 나섰고.

    배도빈이 새롭게 추가한 튜바와 유 포니움이 곡을 더욱 풍성히 하였다.

    에로이카는 본래 여러 악기가 각자 의 특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곡이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드라마틱한 선율을 독자적으로 이어가면서 세 파트로 나뉜 호른이 각자의 음역대 에서 저마다의 기량을 뽐냈다.

    베토벤 본인마저 자신의 교향곡 중 가장 사랑하는 곡으로 에로이카를 꼽았을 정도로 완벽한 곡.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새로운 악기를 더한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다.

    그 자체로 완벽했고 무엇을 더했다 간 자칫 완벽하게 조율된 여러 악기 의 조화가 무너져 산만해질 수 있었다.

    3악장을 마치고 잠시 숨을 돌렸다.

    베를린 필하모닉 B는 20대에서 40 대 사이의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 사 실 기존 단원처럼 노련하지는 않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 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낫다.

    지난 1년간 함께하면서 이들은 내 악보를 받아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겁을 냈지만 곧 자신들이 연주하는 새로운 소리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곡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주함 에 있어서 버릇을 버리는 데 익숙해 졌다.

    그것은 음악가에게 있어 가장 어려 운 일임과 동시에 자신을 바꾸고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나 역시 쉽지 않았다.

    에로이카를 재구성하는 일은 지금 의 내 한계를 시험받는 듯했다.

    에로이카를 만들 당시의 나는 여러 고정 관념을 버리게 위해 부단히 노력 했다.

    파격적인 전개를 위해 조성과 박자를 끊임없이 바꿔주는 일이라든지,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부분 이라든지 세 개의 호른을 배치한 일 등이 그러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음색을 적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독자적인 흐름을 주입했던 것도 같은 일이다.

    파괴 없이는 창조도 없다.

    더욱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서라면 범하지 못할 규칙이란 없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만든 에로이카이기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내가 만들어 놓은 ‘답’을 스스로 부수어 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처음 완성했을 때보다 못했다.

    최고의 교향곡이라 자부했던 만큼 그보다 나은, 발전된 에로이카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

    없었다.

    첫날은 답답했고 두 번째 날에는 좌절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날에는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발전하지 못한 내게 화가 났고 다섯 번째 날에 문득 악상이 떠올랐다.

    여섯 번째 날에는 쉬지 않고 악보를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고 일곱 번 째 날에는 그간 적었던 악보를 모조 리 찢어버렸다.

    여덟 번째 날에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가 하는 생각에 분하고 또 억울하여 펜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아홉 번째 날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음에 좌절하여 울기도 했다.

    그리고 열 번째 날.

    비로소 한 마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은 자신할 수 있다.

    에로이카가 다시 태어났다고.

    단원들이 흔들림 없이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4악장, 피날레를 연주할 때다.

    대단히 빠르게(Allegro molto).

    팔을 옆으로 펼친 채 단원들이 준비하기를 기다렸다.

    나를 향한 신뢰를 가득 느낄 수 있다.

    양팔을 모아 힘차게 들었다.

    현악기가 한 번 강렬하게 치고 나온다. 그 뒤에 점차 하강하며 팀파 니가 속도감을 더한다.

    강렬하고 비장하다.

    지휘봉을 옆으로 길게 내려 음악을 잠시 끊어내고 다시금 들어 올려 강 하게 세 번 때린다.

    세 번의 강한 음과 한 번의 여린 음. 다시 강하게 여리게 길게.

    박자를 뒤틀어 긴장감을 더한다.

    잠깐의 간격.

    그것을 비집고 마치 조심스럽게 장난을 치듯 현악부를 지휘했다.

    바이올린 주자들이 손가락으로 현을 튕겨낸다.

    짧게 끊어지는.

    그러나 가볍지 않도록.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주고받는 대 화는 극도로 긴장되었던 청중들을 안심시킬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팀파니나 금관이 자 꾸만 불안함을 조성하니 안달이 날 테지.

    그러면서도.

    제2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

    제1바이올린과 비올라.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기품 있는 멜 로디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드러운 멜로디를 비집고 올라오는 제1바이올린의 활기찬 연주를 들 으면서 조금씩 안도하기 시작할 것 이다.

    악보를 넘겼다.

    동시에 마르코를 보며 지휘봉을 들었다.

    오보에가 맑은 소리를 내며 등장.

    곡은 점차 고조된다.

    본래라면 없었을 유포니움이 오보에와 어울리기 시작.

    ‘ 아아.’

    그래. 이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연주를 마치 자 50분간 숨죽이고 있었던 관객들 이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브라보!”

    배도빈이 재구성한 에로이카는 단 순히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자신의 심상으로 끌어들였다.

    연주 내내 멜로디에 빠져 있었던 청중들은 환호하면서도 여전히 에로이카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B를 제외 한 나머지 40개의 악단 구성원들은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다.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그 감각이 전신을 지배하면서 자연스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깊이 이해하기에.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B가 무 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마치 해일과 같았고 쏟아지는 심상에 저항할 수 없이 음악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황당하게도 이것이 진짜 에로이카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친놈.’

    마리 얀스의 옆자리에서 가우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든 음악가가 인정하듯이 가우왕 역시 배도빈을 완성된 음악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12년 전, ‘부활’을 발표했을 때부터 배도빈은 그 어떤 작곡가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그러나 그는 부정했다.

    새로운 곡을 만들 때마다, 새 연주를 할 때마다, 매번 지휘단에 오를 때마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음악으로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재능이었으나 가우왕을 비롯한 다른 음악가들은 배도빈의 가장 무서운 점이 따로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매번 자신의 스타일을 벗어나는 음악가.

    사람마다 스타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없는 음악가는 아이덴티 티가 없다는 뜻으로 결코 거장의 반 열에 오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떤 곡을 연주하든 자신 의 색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는데, 배도빈은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 듯했다.

    초기 배도빈을 평가하는 데 주류를 이룬 것은 강렬함과 직관성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정답 일 수 없었다.

    ‘베를린 환상곡’의 쾌활함과 ‘찰스 브라움’의 서정적 멜로디는 지금까지의 배도빈의 스타일과는 전혀 달랐다.

    현재 배도빈의 아이덴티티는 예측 할 수 없이 변화하는 음악가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세상 그 어떤 음악가가 10년 이상 자신을 꾸준히 바꿀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배도빈이 낭만시대의 음악을 거쳐 근현대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 앞을 추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일 타인이 보지 않는 장소에서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를린의 마왕은 부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 폭력적인 음악성이 그를 마왕이라 불리게 하였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작의 열망이 그를 신이 라 불리게 했다.

    신인가 악마인가.

    잘츠부르크에 모인 음악가, 평론가 들은 진정 배도빈을 그렇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심사 위원단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만점이 아닌 게 이상하지.’

    ‘뒤에 나올 악단은 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난감하군. ……아니. 이보다 대회 정신에 부합하는 음악이 더 있을 수 있을까.’

    30명의 심사 위원들이 고민하는 가운데, 미카엘 블레하츠 역시 어떻게 채점해야 하는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절대평가를 한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만점이었다.

    위대한 베토벤의 에로이카를 원곡의 훼손 없이, 아니, 도리어 더욱 뛰어나게 재구성했으니 만점 이외의 점수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반드시 3개 악단을 떨어뜨려야 하기에 상대평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조건이 미카엘 블레하츠와 다른 심사 위원들을 고민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

    ‘아니지. 그렇다고 속일 수는 없지 않은가.’

    미카엘 블레하츠가 점수 기입란에 10점 만점을 넣었다.

    그리고 모든 심사 위원이 그와 같이 생각을 이어나가다 결국에 동일 한 점수를 기입했다.

    첫 번째 날, 첫 번째 조, 첫 연주 에서 만장일치로 만점이 나온 것이었다.

    한편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로 관 람하던 음악 팬들도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연주에 충격을 받았다.

    ㄴ 인간적으로 이게 말이 되나?

    ㄴ 진짜 미쳤다. 에로이카 적어도 수십 번은 들었는데 이런 건 처음 임.

    ㄴ  하나하나 소나기처럼 쏟아내 네;; 대체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ㄴ 뭐야. 내 50분 돌려줘요.

    ㄴ 게임하면서 듣다가 게임 껐다.

    ㄴ 도빈이랑 단원들이 하나 된 거 같아서 너무 좋다. 함께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저렇게 공명할 수 있다 니. 아…… 너무 좋다…….

    ㄴ 쉬는 방법 좀 알려주라. 듣다 가 까먹었다.

    ㄴ 원래도 유포니움이랑 튜바가 있었나?

    ㄴ 없음. 유포니움이 다른 악 기랑 엄청 잘 어울리네.

    ㄴ 유포니움이 둥글둥글 해서 여러 곡에 잘 어울리는 편임. 난 오보에 랑 어울릴 때 진짜 좋았음.

    ㄴ 유포니움 좋으면 구스타브 홀스 트 곡 찾아 들어봐.

    ㄴ 정말 감동이네요. 초연을 들은 사람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네요.

    배도빈의 에로이카를 들은 팬들은 고민 없이 곧장 투표를 시작했다.

    한 사람당 두 곳에 투표할 수 있었으니 한 표는 무조건 베를린 필하모닉 B에 준다는 생각이었다.

    곧 실시간 집계가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베를린 필하모닉 B에 수만 표 가 쌓였다.

    ㄴ 아무리 그래도 다른 악단 연주 안 듣고 투표 시작하는 건 좀 아니 지 않나;;

    ㄴ 그만큼 좋아서 그러겠지.

    ㄴ 아니. 그래도 뒤에 있는 악단들 도 이름 빵빵하잖아. 그런데 벌써부 터 한 표 쓰면 후순위가 불리한 거 아님?

    ㄴ 자기 표 자기가 쓰겠다는데.

    ㄴ 애초에 자기가 좋아하는 악단 음악만 듣는 사람이 태반임. 고정 팬층 많은 악단이 인기투표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ㄴ 어차피 심사 위원단이랑 득표수 랑 합산하잖아. 팬 투표는 애초에 전문성 기대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감동을 주느냐로 판단하는 거니까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됨.

    ㄴ 아니 내 말은 다 듣고 나서 결정 해도 안 늦는다고.

    ㄴ 나도 같은 생각.

    ㄴ 솔직히 5시간 넘을 텐데 어떻게 다 듣냐? 각자 상황에 맞춰 행동하는 거지. 네 말이 정론이긴 해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순 없음.

    ㄴ 배도빈이 그만큼 확신을 주었단 뜻으로 받아들여. 나 클래식 짬 좀 되는데 저런 연주 처음이다. 진짜 베토벤은 배도빈이 넘사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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