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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25화 (22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25화

    50. 새 시대(4)

    “마실래?”

    “주세요.”

    찰스 브라움이 커피를 따랐고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짙은 커피향이 더 욱 뚜렷해졌다.

    “고마워요.”

    그에게서 잔을 받고 한 모금 마시자 잠깐 생각에 잠겼던 찰스 브라움 이 고민을 풀어냈다.

    “단순히 교육이 덜 되었거나 개인의 인성 문제로 보고 싶은데. 난민 이나 테러 등으로 외부인 자체를 꺼 리는 의식이 강해졌지. 정도는 심각 하고 해결방법은 없어서 안타까운 일이야.”

    평소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를 제외하곤 좀 모자라 보였던 그가 달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주변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더라고요. 찰스가 한 말이 떠올라서 물어 보려고 왔어요.”

    “저런.”

    “지금으로써는 분리해 두는 게 최 선인 거예요?”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되겠지.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 멋지네요.”

    찰스 브라움이 씩 웃었다.

    “고귀한 신분에 천재 바이올리니스 트인 내가 이타적이기까지 하니 그 럴 수밖에. 어때. 조금은 존경스럽지 않나?”

    “그런 이유라면 찰스가 절 존경해 야 할 것 같네요.”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자 찰스 브라움이 불편한 듯 입을 앙다물고는 시선을 피했다.

    “서로 배경은 치우고 생각하지.”

    “계속하는 거예요?”

    찰스가 나를 이기고 싶다면 왕위 계승권은 낮더라도 차라리 영국 왕 실이라는 배경을 내세우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러자고 하니 받아들였다.

    “바이올린은 내가 더 잘하지. 그건 너도 인정했어.”

    “ 맞아요.”

    어떻게든 자신을 뽐내고 싶어 하는 그가 귀여워서 웃는데 그럴수록 찰스는 분한 모양이다.

    조금 놀려주고 싶어서 핸드폰을 꺼 냈다.

    “뭐하는 거야?”

    “무슨 상을 받았는지 보려고요.”

    “난 11번의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클래식 브릿 어워드에서 2010년과 2014년에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 되었지.”

    “11 번이나?”

    “훗.”

    놀라서 되묻자 찰스 브라움이 만족 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자 내 수상 이력이 나와 차례 로 읽어 주기 시작했다.

    “올해의 레코드 2번, 베스트 음반 2번…… 그래미랑 그라모폰은 받은 게 너무 많네요. 17년에 아카데미 음악상, 빌보드 클래식 차트 7년 연속 1위. 그라베마이어랑…… 너무 많으니 직접 보세요.”

    하나하나 읽어 주려 했는데 너무 많기도 하고 이런 걸 받았었나? 싶은 것도 있어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찰스 브라움은 받지 않고 입을 살 짝 벌린 채 아차 싶다는 표정이다.

    “ 받아요.”

    “……다 기억하고 있어.”

    “이 많은 걸요?”

    “……이쯤 하지.”

    빙그레 웃었다.

    “아무튼, 물어보고 싶은 건 끝인가?”

    “네. 그나마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싶었는데 많지 않은 것 같네요.”

    “그렇지.”

    “그래도 이런 의식은 좋은 것 같아요”

    “그건 무슨 뜻이야?”

    “음악가니까 음악으로 이야기하겠단 뜻이에요.”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푸르트벵글러 의 집을 지나치는데 그 앞에 반가운 사람이 보여 차를 세웠다.

    “따로 갈 테니 먼저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기사를 보내고 돌아섰는데 푸르트벵글러의 고함이 여기까지 들렸다. 거리가 꽤 있는데도 말이다.

    “돌아가!”

    웃으며 점잖게 다시 한번 노크를 하는 노신사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얀스.”

    이제 백발이 성성한 마리 얀스가 뒤돌아보더니 얼굴을 활짝 폈다.

    “오, 도빈 군이 아닌가. 반갑네.”

    그와 악수를 나누곤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푸르트벵글러를 위로하러 왔지.”

    말끝에 ‘쫓겨나와 힘들지 않겠는 가’라고 덧붙인 그에게서 익살스러움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점잖은 마리 얀스에게도 이 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누가 쫓겨나왔다는 거야!”

    귀도 좋지.

    푸르트벵글러가 현관문을 벌컥 열 고는 성을 냈다.

    그 모습을 보니 한참은 더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을 듯해 기분이 좋아졌다.

    “넌 어쩐 일이냐?”

    “지나가다가 얀스 보고 왔어요. 위 로해 준다고 온 사람한테 문도 안 열어줬던 거예요?”

    “도빈 군이 도리를 아는군.”

    나와 마리 얀스가 빤히 바라보자 푸르트벵글러가 부들부들 떨더니 이 내 길을 터주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푸르트벵글러가 쌀쌀맞게 말했다.

    “적당히 앉아.”

    “나는 따뜻한 차가 좋네.”

    “허. 도로 쫓겨나가고 싶다면 던져 주겠네만.”

    “쫓겨나온 건 자네지 않은가.”

    “하하하하하!”

    두 사람의 대화가 너무 웃겨서 크 게 웃고 말았다.

    점잖은 사카모토와 마리 얀스도 푸르트벵글러 앞에서만큼은 이렇게나 유쾌해지는 모양이다.

    “고얀 놈들.”

    불쾌한 듯 인상을 있는 대로 쓴 푸르트벵글러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쉬라고 해도 고집부려서 단원들이 쫓아낸 건 사실이잖아요.”

    “아, 그런 이유가 있었구만.”

    마리 얀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푸르트벵글러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뭐하러 왔어? 내 성질 긁으러 왔다면 당장 도로 나가.”

    “그럴 리가 있겠나. 자네가 모임도 안 나오니 얼굴이나 보러 온 게지.”

    “늙은이들 뭐가 좋다고 매년 보는 지. 쯧.”

    “모임이요?”

    마리 얀스에게 물었다.

    “우드 바투타라고 매년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이는데 벌써 40년이 넘었지.”

    꽤 오래된 모임이다.

    “하나둘 떠나니 이제 남은 사람은 네 명뿐인데 이 친구가 안 나오니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네.”

    푸르트벵글러는 관심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소파의 팔걸이를 툭툭 치고 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친할 줄은 몰랐어요.”

    “안 친해.”

    마리 얀스에게 묻자 푸르트벵글러 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정했다.

    나도 카라얀을 부정하는 푸르트벵글러가 그의 제자인 마리 얀스를 싫어하는 줄 알고 있던 터라 마리 얀 스에게 답을 구했다.

    그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친근한 사이는 아니지만, 함께 늙 어가다 보니 서로 이해하는 부분도 생겼네. 안 그런가, 푸르트벵글러.”

    “흥.”

    음악만큼은 분명 서로 인정하고 있을 테고 두 사람 정도의 수준이라면 고독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음악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라이벌뿐이라고 생각하면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친하거나 멀다는 말로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모처럼 만난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다.

    “그럼 전 가볼게요.”

    “가는 길에 저 인간 좀 같이 데려 가거라.”

    “싫어요. 얀스, 그럼 오케스트라 대전 때 봐요.”

    “기대하겠네.”

    배도빈이 떠나고 단둘이 남은 푸르트벵글러와 마리 얀스는 대화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푸르트벵글러가 음악을 틀었다.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이자 그들과 함께 거장으로 칭송받는 제르바 루빈스타인이 지휘한 말러의 6 번 교향곡이었다.

    곡이 끝난 뒤에야 마리 얀스가 입을 뗐다.

    “언제 들어도 루빈스타인의 말러는 감탄이 나오는군그래.”

    “말러만은 들어줄 만하지.”

    마리 얀스가 심통이 난 푸르트벵글러를 보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드보르자크는 필스가 좋았지.”

    “도빈이가 나아.”

    “필스가 들으면 서운해하겠네.”

    “사실일 뿐이야. 필스는 라흐마니 노프가 괜찮았지.”

    “그렇게 생각하나? 라흐마니노프는 브루노 발터라 여겼거늘.”

    비슷한 세대의 지휘자들을 언급하 기 시작한 두 사람은 이미 떠난 사람, 아직 남은 이들을 떠올리며 대 화에 열을 붙여갔다.

    그리고 이내 베토벤에 이르러서는 모처럼 평범하게 오가던 대화가 다 시금 다투듯이 되었다.

    “베토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가 제일이었던 것 같군.”

    “이 영감탱이가 망령에 씌였나.”

    한동안 옥신각신한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닫았고 오랜 시간 뒤에 마리 얀스가 회환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되었네.”

    마리 얀스는 자신과 함께했던 인물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비록 그때의 모습은 온전히 기억할 수 없었지만, 음악만큼은 비록 60년 전에 연주되었던 것이라도 생생했다.

    “시대가 변하기 시작했네. 정말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어. 우리 손으로 이뤄내고 싶었던 일 말일세.”

    푸르트벵글러는 반응하지 않았다.

    사카모토 료이치와 함께 새로운 바 람을 가장 먼저 느꼈기에 이러한 날 이 올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점점 기괴해지는 클래식을 들으며 안타까웠지. 음악의 본질보다는 단 순히 파괴하는 듯한 성향에 어느새 나도 보수적이 되었던 듯하네.”

    일찍이 푸르트벵글러와 마리 얀스를 비롯한 음악계 거장들은 변질되는 클래식을 경계해 왔었다.

    양식을 탈피해 자유를 찾은 음악이 어느 시점부터 양식을 부수는 데에 만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다 보니 미학은 사라지고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그 뒤로 수많은 음악가가 남긴 그 찬란한 인류의 유산이 무너질까 두 려워, 그들은 보수적이 되었다.

    “그래서 런던의 주장을 마냥 부정 할 수도 없었지. 그들 말대로 그 기 괴한 소음을 들을 바에야 고전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인터플레이의 저열함에는 동조하지 않지만 말일세.”

    푸르트벵글러가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뒤 물 끓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나는 진정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느꼈네. 재능 있는 세대가 나섰고 클래식 음악 계는 과거 그 어떤 때보다 호황이 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푸르트벵글러가 묻자 마리 얀스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우리의 시대가 얼마 안 남았네. 더 늦기 전에 마침표는 찍어야 하지 않겠는가.”

    푸르트벵글러가 무심하게 마리 얀스 앞에 홍차를 가져다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복귀하게. 그리고 오케스트라 대 전에 참가하게.”

    “베를린 필하모닉은 도빈이가 알아 서 할 테니 그리 알아.”

    마리 얀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자네도 나서라고 말하고 있는 걸세. 도빈 군과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아니라 전통을 지켜왔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본연의 베를린 필하모닉 말일세.”

    “자네와 베를린 필하모닉 A가 없는 오케스트라 대전은 의미가 없어.”

    마리 얀스 앞에 놓인 찻잔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것이 식을 때까지 푸르트벵글러는 눈을 감고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찻값은 치렀군.”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마리 얀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생각했네.”

    “하나 정정하지.”

    푸르트벵글러가 단호히 말했다.

    “아직 새 시대는 오지 않았어. 난 아직 세상에 없던 음악을 듣지 못했네.”

    “전혀 다른 음악은 존재할 수 없네.”

    “그런 뜻이 아니야.”

    알 수 없기에 막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의 믿음은 확고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에 없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런 가능성을 보여 준 사람이 있었기에 그렇게 굳게 믿을 수 있었다.

    “내가 참전하는 일은 우리 시대를 마무리하는 게 아니야. 새 시대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지.”

    푸르트벵글러의 확고함에 마리 얀스가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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