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21화 (22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21화

    49. 몰락과 비상(3)

    무대 아래에서 기다리니 꼬맹이가 왔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저 작은 몸 이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직접 만 나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 가요.”

    차분하고 확고한 목소리.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로 오르자 마치 처음 무대에 오른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솔로로 활동한 지 20년이 지났음 에도 나를 이토록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은 꼬맹이뿐이다.

    피아니스트로서는 경쟁하고 싶고 바이올린을 켤 때는 함께하고 싶다.

    곡은 내가 연주해야만 할 것 같고 지휘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감 화되어 나도 그 일부가 되어 노래하 고 싶다.

    인사를 마친 꼬맹이가 악단을 마주 했고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경연을 벌였던 그때.

    피아노 너머로 보였던 그 어린 모 습과 겹친다.

    몸은 성장했음에도 저 진지한 눈빛 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이가 지휘봉을 휘둘렀고 이내 곡이 시작되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D 단조.

    묵중하게 시작하였고 곧 내 차례가 왔다.

    이는 두려움이다.

    듣는 사람은 그 우울함에 목 놓아 울고 연주자는 어떻게 이런 주제를 만들 수 있는지 감탄과 함께 두려움 이 일 정도다.

    조금씩, 조금씩 음이 확장된다.

    금관과 목관이 표현하는 무게감과 현악기들의 애절한 선율.

    빡빡하게 들어선 음표를 연주할 때 마다 베를린 필하모닉 B는 놀랍도록 어울려온다.

    연습을 하면서 느꼈지만 이 젊은 오케스트라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듯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직접 확인하면서 나는 그것이 꼬맹 이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카덴차.

    ‘오시아1)는 없어요.’

    1) Ossia: 연주하기 쉽도록 수정된 악보.

    ‘당연하지.’

    나와 꼬맹이의 협연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악장의 카덴차가 너무 어려울 것을 감안한 모양이지만 피아니스트가 성장할 것은 생각 지 않은 것 같다.

    건반을 더럽게 넓게 쓰면서도 박자는 난해하고 음표는 빡빡하다.

    하지만 이 연주회에서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더 높은 연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 든 할 것이다.

    1분 40초쯤 되는 나와 꼬맹이의 오리지널 카덴차.

    보다 빠르고 사용하는 건반은 더욱 늘었다. 그러면서도 음은 더욱 명확 해져 비극이 더욱 와닿는다.

    그래. 이것이다.

    나는 이런 연주를 하고 싶었다.

    내 한계에 도전하면서 그 경계를 오가며 나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가슴 뛰는 무대.

    나는 아직 더 나아갈 수 있다.

    나보다 나이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한두 명씩 안주하기 시작했다.

    모두 한때 내가 존경했고 목표로 삼았던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순한 노인일 뿐이다.

    나는 그들처럼 멈추고 싶지 않다.

    꼬맹이와 홍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연주회.

    그를 뛰어넘는 연주회를 할 수 있을까?

    답은 정해져 있다.

    할 수 있다.

    이 내가 못 할 리 없다.

    나보다 어린 피아니스트 중에 그 나이 때의 나보다 뛰어난 녀석들은 있지만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사람은 오직 꼬맹이뿐이다.

    그리고 분명 꼬맹이도 내 연주에 반응하고 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이쯤이야 뭐가 난곡이란 말인가.

    어려운 길 따위 그래봤자 길이다.

    나아간다면 분명 나는 정상에 있을 것이다.

    음악사에 기록될 이 거인과 함께하 기 위해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 * *

    모든 사람이 배도빈을 찬양한다.

    존경하는 할아버지마저도 베를린의 마왕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서도 마찬 가지.

    그래서 직접 들어보니 확실히 그는 내 안의 빙하를 녹일 만한 사람이었다.

    ‘배도빈.’

    나 아리엘 핀 얀스.

    자랑스러운 마리 얀스의 피를 물려 받고 볼프강 아마데우스의 정신을 잇는 자.

    과연 저 검은 용의 불길은 내게 닿았다.

    그러나 폭군이라더니 저렇게 상냥 한 폭군도 있단 말인가.

    악단을 조율하는 능력과 곡 해석은 가히 음악을 다루는 신과도 비견할 만하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B는 그 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A라면 모를까.

    배도빈은 지금 쇠사슬에 묶인 왕이다.

    ‘이길 수 있다.’

    나의 고결한 정신이라면 짙게 깔린 어둠을 몰아내고 저 거대한 마왕의 심장에 롱기누스의 창을 박아 넣을 수 있다.

    웃음을 보이지 않기 위해 검지를 미간에 두고 입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두 눈과 귀는 무대를 놓치지 않았다.

    ‘잘 들었다. 검은 용의 마왕이여.’

    깊이를 더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연주를 해준 가우왕과 잘 따 라와 준 단원들이 잔뜩 지쳐 있다.

    그만한 난이도의 곡에 욕심을 더했으니 멀쩡한 것이 이상한 일.

    아직 혈기가 넘치는 이 어린 몸이 고마웠다.

    “수고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단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우왕에 게 향했다.

    가우왕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나 역시 오늘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기에 따라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 누었다.

    가우왕 같은 남자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소소가 다가왔다. 가우왕을 보더니 이내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잠깐 흠칫했고 소소는 그런 그를 살짝 안아주었다.

    가우왕은 손을 떨었지만 이내 소소를 안았다.

    남매의 화목한 시간을 방해할 순 없어 내려왔는데 대기실 앞에 누군 가 서 있다.

    “처음 보는군. 검은 용의 마왕.”

    머리가 아픈 사람인 듯하다.

    무시하고 대기실로 들어가려 하니 다시 내 앞을 막는다.

    “내 이름은 아리엘 핀 얀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악장이자 고결 한 음악가 마리 얀스의 손자다.”

    마리 얀스에게 손자가 있다더니 이 녀석인 모양이다.

    “그리고 위대한 모차르트의 정신을 이어받았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설마 나와 같은 경우인가 싶어 자 세히 물어보려 했는데 아리엘 핀 얀스가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더니 웃었다.

    “설마 너도……

    “역시 너는 알아보는군. 그렇다. 12살 때였지. 그 고혹적인 마술의 피리를 듣는 순간, 이 내가 아니면 그에 비할 사람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를 얀스 가의 아마데우스라 불러 주면 좋겠군.”

    “다시 태어났다거나.”

    “암! 그때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 나 다름없었다. 역시 할아버님께서 인정하는 천재답게 대화가 통하는 군.”

    그냥 미친놈이다.

    혹시나 싶었는데 세상이 힘들긴 힘 든 모양이다.

    “너의 숨결은 잘 받아들였다. 검은 용의 마왕이여. 하지만 안심하지 마라. 너의 사지를 옥조이고 있는 그 사슬이 언젠가 네 목을 조를 것이다.”

    “정신 나간 소리 그만 하고 나가.”

    마리 얀스의 손자인데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을 때 아리엘 핀 얀스라는 놈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군.”

    “뭘?"

    “나와 로스앤젤레스 필이 너와 베를린 필하모닉보다 우월함을 말이다. 기대해도 좋으마. 네 심장이 도려내질 심판의 날을.”

    “꺼져.”

    아리엘 핀 얀스가 멀뚱멀뚱 날 보더니 뒤돌아보았다가 다시 나를 봤다.

    “아무도 없네만.”

    이상한 놈이 달라붙었다.

    가우왕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협연은 현대 클래식 음악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확인하는 무대로 평가받았다.

    프로 연주자들도 연주하기 어려워 종종 오시아로 연주하는 라흐마니노 프 피아노 협주곡 3번, D단조를 더 욱 풍성하게 했으며 그 과정에서 곡 은 더욱 연주하기 난해해졌기 때문 이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환호했다.

    단지 화려한 기교뿐만이 아니라 악보상의 복잡한 음들이 더욱 확연해 졌기에 그 의미를 보다 쉽게 받아들 일 수 있었던 덕이었다.

    배도빈의 해석력과 가우왕의 기교.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노력 의 결과였다.

    언론도 세계 최고라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또 한 번 성공적인 연주회를 열었다며 연일 기사를 풀어댔고 평 론가들 역시 합세, 가우왕과 배도빈 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찬탄했다.

    이틀간의 총 수입 930만 달러.

    어느 면으로보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단원 들의 가슴을 울린 요인은 따로 있었다.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 이번 공연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이름에 어울리는 연주를 했다. 그것으로 충 분하다.”

    내부적으로 휴식에 들어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인터뷰는 마치 부모 에게 인정받기라도 한 듯 베를린 필하모닉 B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 안에 베를린 필하모닉이라 다행 이라는 자부심이 싹 튼 것은 당연한 일.

    그렇게 물이 오른 분위기로 3월.

    봄을 맞이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공개 오디션을 치러 다시금 단원들을 확충했다.

    총 단원 수 200명.

    A와 B가 격일로 연주회를 여니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3월과 4 월 내내 음악이 끊이질 않았다.

    동시에.

    지금껏 인터플레이를 위시한 대표 적인 언론 매체인 그래모폰의 현직 기자 한스 레넌의 고발성 기사가 터 졌고.

    언론을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사 실이 전 유럽에 퍼지면서 인터플레이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왜 음질이 이따위냐고!”

    “서비스 재개가 대체 언제 되는 거 냐고! 이럴 거면 내 돈 돌려내!”

    그런 상황에서 마침내 방점을 찍는 사건이 있었으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상임 지휘자 브루노 발터 의 기자회견이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인터플 레이와의 독점 계약을 해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셔터 소리가 요란히 났다.

    회견을 위해 모인 기자들은 충격적 인 사실에 급히 거수하였다.

    “악단주인 제임스 버만과도 합의된 이야기입니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자립을 원합니다. 더 이상 인터플레이의 서 비스 악화와 악단주 제임스 버만의 간섭을 바라지 않습니다.”

    브루노 발터는 그간 제임스 버만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게 요구했던 프로그램과 일정에 대해 언급하 고 그 증거 자료를 언론에 공개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라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마저도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부터 일정까지 강요받았다는 사실에 많은 예술인들 이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수 순이었다.

    거대한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 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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