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17화 (21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17화

    48. 오케스트라 대전(4)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이치 그라모 폰이 구두로나마 협연에 대해 서로 긍정한 뒤 가우왕과 정식으로 미팅을 잡았다.

    카밀라와 함께 매니저를 대동한 가우왕과 마주 앉아 일정을 상의하는 데, 확실히 가우왕이 바쁘긴 바쁘다.

    도이치 그라모폰 측에서 준비해 온 서류를 보는데 일정에 대해서는 선 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국 이 날짜 말고는 안 된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가우왕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2월 말에 이틀을 내는 게 최선.

    그나마 관객이 가장 많은 금요일과 토요일이라 다행이다.

    “그럼 프로그램은 어떻게 할까? 베를린 필은 어떻게 정하지?”

    가우왕이 내게 물었다.

    “원래는 상임 지휘자랑 악장단, 그리고 협연자가 모여 의논하는데 베를린 필하모닉 B는 제가 정해요.”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가 없어서 공화정이 된 줄 알았더니 독재자 가 남아 있었네.”

    가우왕의 농담에 카밀라가 살짝 웃으며 답했다.

    “가우왕 씨도 만만치 않던데요?”

    표정은 웃고 있는데 일정을 정하는 과정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가우왕의 매니저가 땀을 어색하게 웃으며 가우왕의 옆구리를 쿡쿡 찔

    렀다.

    가우왕이 예의를 차리며 카밀라에 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뒤 자 신만만하게 내게 물었다.

    “그럼 말해봐. 뭘 원해? 뭐든 쳐 주지.”

    다른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쳤겠지 만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의 말이니만큼 반가웠다.

    그간 하고 싶었는데 조금 망설였던 곡이 있어서 냉큼 말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이요.”

    가우왕이 눈썹을 모으더니 입을 씰룩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그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선보인 곡 으로, 그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피 어난 붉은 장미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연주하기 어려운 곡 중에 하 나였으므로 내 기준에 만족할 만한 피아니스트와 함께할 기회가 몇 없었다.

    ‘피아니스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 완벽한 곡에 내 요구사항이 들어간다면 소화할 수 있는 악단도 부 담스러울 테니 여태 시도하지 않았

    는데, 역시 시원하게 답해주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재밌겠는데.”

    “같은 생각이에요.”

    베를린 필하모닉 B와 가우왕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라니.

    벌써부터 잔뜩 기대되었다.

    계약서에 양측 모두 기분 좋게 사인했다.

    미팅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려는 데 가우왕이 다른 방향으로 가기에 불러 세웠다.

    “어디 가요?”

    “어?”

    “우리 집은 저쪽이에요.”

    “아…… 오늘 밤은 혼자 보내고 싶어서 말이지.”

    “거짓말하지 말아요. 소소 무서워 서 그런 거잖아요.”

    “누, 누가 무서워한다는 거야?”

    “소소랑 다른 층에 방 내줄 테니 그냥 와요.”

    그리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몇 년이나 그렇게 지냈으니 갑자기 바뀔 수는 없겠지 생각하며 호텔로 가려는 그를 놓아주고 집으로 향했다.

    씻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는데 아버지와 나윤희, 진달래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진달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모양이다.

    아버지는 정말 요즘 너무 바쁘신 모양이다. 현장이나 대학으로 가 보 지 않으면 일주일씩 못 보는 것도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어머니께 여쭸다.

    “아버지 괜찮으신 거예요?”

    “그러게.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빠 보고 싶어.”

    “그럼 엄마랑 내일 아빠 일하는 곳에 놀러 가 볼까?”

    도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어머니 생신에 맞춰 아버지와 함께 이벤트를 준비하려고 생각했기 에 조만간 따로 시간을 내야 할 것 같다.

    와인을 넣고 찐 모시조개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는 소소에게 물었다.

    “윤희 누나는요?”

    “바빠.”

    무슨 일을 하느라 끼니도 거르는지 궁금해서 의아하게 보자 소소가 입 주변을 닦은 뒤 말했다.

    “ 연습한대.”

    “무슨 연습이요?”

    “부담 많이 느끼나 봐. 요즘 매일 바빠.”

    오케스트라 대전 때문인가.

    혹은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제2바이올린 수석으로서 느끼는 부담일지도 모르겠다.

    워낙 그런 성격이니 이해가 되면서 도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모습은 무척 보기 좋다.

    부엌에 있는 쉐프를 찾았다.

    “간단하게 먹을 거 부탁드릴게요.”

    “아, 저녁이 부족하셨나 보네요. 준 비하겠습니다.”

    “저녁은 평소대로 근사했어요. 제가 아니라 윤희 누나한테 가져다주 려고요.”

    “그런 거라면 맡겨주세요.”

    식탁으로 돌아와 식사를 마무리하자 쉐프가 내게 야채와 햄을 끼운 바게트 샌드위치를 주었다.

    성장기라 그런지 그걸 보니 또 식욕이 일었다.

    2증으로 올라가 나윤희의 방문을 두드렸다. 바이올린 소리가 멈추고 잠시 뒤 문이 열렸다.

    “고생하네요.”

    “아, 고, 고마워.”

    나윤희가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길을 비켜섰다.

    “자, 잠깐 들어올래?”

    갑자기 초대를 받았다.

    할 일도 없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섰는데 무척이나 단순했다.

    과거 록스타의 사진을 요란하게 걸어둔 진달래의 방이나 먹을 것이 가득한 소소의 방과는 달리 원래 있던 가구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다.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3초 정 도 있으니 나가고 싶어졌다.

    “그, 그.”

    “네?”

    “미, 미안해. 재미없지.”

    뭐가 재미없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불편해하는 거 같아서 나가고 싶긴 하지만 재미없다는 마음은 없다.

    “아뇨. 불편한 거 같아서요.”

    “아니야. 아니야. 하나도 안 불편해.”

    나윤희가 몹시 부정해서 ‘그런 거 같은데요’라고 장난스럽게 말하기도 부담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일어서 나가자니 정말 재미없어서 나가는 거라 생각할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다.

    “저녁 아직이잖아요. 전 괜찮으니 까먹어요.”

    "응."

    나윤희가 바게트 샌드위치를 들었고 눈으로 방을 좀 더 살피다 CD를 모아둔 것을 발견했다.

    “좀 봐도 돼요?”

    물어보니 입에 가득 음식이 있어 대답은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데이비드 개릭이 녹음한 앨범 들이다.

    어렸을 적 최지훈이 자기 집에서 파가니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여준 적 있는데, 당시만 해도 나는 이 사람이 영화배우인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그의 음반을 듣고 즐겨 듣게 되었지만 말이다.

    찰스 브라움이 솔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을 때는 종종 비교되던 뛰어난 연주자다.

    “멋진 취향이네요.”

    “어?”

    “데이비드 개릭이요. 저도 좋아하거든요.”

    “아. .잘생겨서.”

    순간 웃음이 터졌다.

    나윤희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아, 미안해요.”

    당연히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라 의외의 일격을 맞아버렸다.

    조금 놀란 것 같았던 나윤희가 이 내 살짝 웃었다.

    “그런데 무슨 연습을 하고 있던 거 예요?”

    “더…… 잘하고 싶으니까.”

    짧게 대답한 나윤희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었다.

    향상심은 좋은 일. 음악가라면 항상 더 멋진 음악을 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같은 생각이면서 괜히 궁금해져 물었다.

    “지금도 잘하잖아요.”

    나윤희가 입안에 있는 것을 급히 삼키려는 듯해서 말렸다. 간신히 샌 드위치를 삼킨 나윤희가 속내를 털 어놓았다.

    “……다들 우리 이야기를 하니까. 베, 베를린 필하모닉이란 이름도 너 무 커서 조금은, 아니, 실은 많이 부담돼.”

    그렇게 말한 나윤희가 순간 고개를 저었다.

    “아, 그, 시, 싫다는 게 아니고.”

    “네.”

    “송년 연주회 할 때 너무. 너무 좋았으니까 앞으로도 그런 연주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러니까…… 열 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흐.”

    쑥스러운 듯 말끝에 작게 웃는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또 있을까.

    훌륭한 사람을 여럿 만났지만 나는 음악에 대해 이렇게 순수하게 접근하는 사람은 최지훈과 이 사람 이외 에 본 적 없다.

    루트비히 오케스트라의 악장이라면 반드시 이 사람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멋진 생각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올라가서 이번 협연 준비해 봐야겠네요.”

    “아, 가우왕 씨랑 하기로 결정된 거야?”

    “네.”

    눈을 빛내며 묻는 나윤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 B라면 마리 얀스의 암스테르담 이라도 분명 넘어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리 얀스라……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엄격한 분위기의 과거와 달리 에두 아르드 베이놈이 지휘를 맡으며 암 스테르담의 음악은 현대적으로 변모해 왔는데 마리 얀스에 이르러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또 하나의 제국.

    악단 자체도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활동(네덜란드 오페라단 반주 등)을 하는데.

    그 숙련도와 천재성에 있어서 만큼 은 푸르트벵글러보다도 높게 평가받는 마리 얀스까지 더해지니 확실히 이보다 멋진 악단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암스테르담이 우리를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나윤희가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고 아마 알게 모르게 다른 단원들도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 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넘어서 최고의 음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신사적인 마리 얀스가 그런 인터뷰를 한 것은 분명 의지의 표명.

    지금 나윤희의 태도처럼 더 높이 올라서기 위한 마음가짐이고 그 구체적인 목표가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 B라는 것이다.

    찰스 브라움의 대성공 이후 여러 매체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세계 최고라 언급해 오고 있으며.

    그간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터플레 이를 상대로 고군분투해 비로소 승리한 우리의 입장도 달라지고 말았다.

    배영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인공 에서 최종 보스로.

    나는 이쪽이 썩 마음에 들지만 문 제는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사실 현재의 유력 오케스트라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당장 베를린 필하모닉 A와의 수준 차이도 명백하거늘.

    사실과 다르게 세계 최고로 인정받 으니 단원들이 느낄 부담도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덜어주는 게 지휘자 인 내가 할 일일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 빈 시절에 사카모토 가 지휘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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