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16화 (21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16화

    48. 오케스트라 대전(3)

    간신히 진정한 가우왕은 소소 앞에 서 사시나무 떨듯 안절부절못했다.

    그의 눈에 살짝 웃고 있는 소소는 곧 생명을 취할 수 있음에 기뻐하는 귀신처럼 보였다.

    “나…… 갈게.”

    가우왕이 시선을 피한 채 간신히 일어났다.

    “어딜 가?”

    “히 익.”

    소소가 물었고 가우왕이 흠칫 놀랐다.

    그 모습을 보고 배도빈이 깔깔 웃었다.

    뒤늦게 내려온 나윤희는 그렇게 웃는 배도빈은 처음 보았기에 조금 놀랐다.

    밖에서는 베를린의 마왕이라 불리고 악단 내에서는 푸르트벵글러 못 지않은 엄격한 지휘자로 정평이 난

    배도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뭐, 뭐가 웃겨!”

    “웃기잖아요. 왜 그렇게 소소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무서워하긴! 난 단지.”

    “단지?”

    가우왕이 말을 하며 무심결에 소소를 보았고 소소는 가우왕의 뒷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황급히 다시 시선을 피하며 가우왕이 중얼거렸다.

    “저주 걸린다고.”

    그러자 배도빈이 다시 크게 웃었다.

    나윤희는 배도빈이 어느 부분에서 웃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방금 그 짧은 대화로 두 사람이 얼마나 친한지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자기를 몰아세우던 음악가 배도빈이 아니라 인간 배도빈을 본 듯해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가우왕을 두고 소소가 질렸다는 듯 돌아섰다.

    “유난 떨지 마. 진짜 재수 없어.”

    소소가 나윤희를 이끌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고 배도빈이 가우왕을 달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2층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소소는 신경질적으로 누네띠네를 먹기 시작 했다. 입에 가득 욱여넣고 볼이 빵 빵해진 소소를 보며 나윤희가 물었다.

    “가우왕 씨 무대랑 되게 다르다.”

    소소가 더욱 빨리 씹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스를 들이켰다.

    “멍청이야.”

    “왜 그렇게 무서워하시는 거야?”

    소소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선생님한테 받은 얼후를 망가뜨렸어.”

    “ 아.”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소랑 지내면서 가끔 은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스승의 악기를 물려받는 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었기에 나윤희가 안타깝게 소소를 보았다.

    “더 화나는 건 미안하다면서 쓸데 없는 선물만 보내고 만나러 오지 않았어. 연락도 안 했어.”

    나윤희가 빙그레 웃었다.

    미워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가우왕 씨 못됐다.”

    “진짜 나쁜 놈이야.”

    나윤희가 누네띠네를 하나 더 주자 소소가 한 번 베어 물곤 중얼거렸다.

    “저주도 안 통하고.”

    중국말이라 나윤희는 그 뜻을 이해 하지 못한 채 토라진 소소의 등을 쓸어주며 위로했다.

    “도빈아.”

    다음 날, 출근을 하려고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부르셨다. 현관 앞에 서 돌아서자 어머니께서 목도리를 매주셨다.

    “아.”

    “날이 추우니까 따뜻하게 하고 다녀야 해.”

    작년부터 발굴에 들어가신 뒤로 아버지께서 집을 자주 비우셨고 도진 이도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어 머니만큼은 작품 활동도 하시면서 가족도 챙기시니 감사하면서도 죄송 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한 일을 알아보자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참, 그러고 보니 푸르트벵글러 씨가 자주 오시던데?”

    “네? 왜요?”

    “글쎄. 심심하신가 봐. 시간 내서 한번 찾아뵈는 게 좋을 거야. 아무 리 쉬는 게 좋아도 일만 하던 분이 갑자기 쉬게 되면 적적할 테니까.”

    “그럴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집을 나섰다.

    연습실로 향하는 도중에 어제 가우왕이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오랜만에 협주해 보자고. 분명 좋아할 테니까. 아니면 뭐…… 베를린 필하모닉 B랑 협연을 잡아도 좋고.’

    말하는 투로 봐서는 은근히 ‘찰스 브라움’을 부러워하는 것 같았는데 가우왕과는 협주든 협연이든 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서로 일정이 너무 바쁜 탓도 있고 사실 그와 함께 녹음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때보다 지금의 내가 피아노를 더 잘 연주한다 생각하지만 늦가을에 함께했던 홍승일과의 연주보다 나은 연주는 못 할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태워 빛을 발하 던 그를 생각하니 문득 먹먹해졌다.

    고개를 젓고 가우왕과의 일로 돌아 왔다.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새 곡을 만들자니 시간이 없고 그렇다고 따로 협연 스케줄을 잡기에 도 무리가 있다.

    일정을 6월로 미룬다면 괜찮겠지만 그때는 또 가우왕이 어떻게 될지 모 르니 고민하던 차.

    케르바 슈타인에게 조언을 구하니 도리어 반가워했다.

    “좋은 일 아니야?”

    “왜요?”

    “세프가 잠깐 쉬면서 분위기가 조금 죽었잖아. 조금 더 신경 쓸 건 있어도 정기 연주회 때 가우왕 씨가 참가해 주면 팬들도 좋아할 것 같은 데.”

    “어……

    정기 연주회에 가우왕과 함께할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A팀처럼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것이 아니라서 레퍼토리를 늘리는 것이 빠르지만은 않았다.

    “내가 보기엔 B도 이제 서로들 익숙해졌고 네가 단원들을 파악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단원들도 지휘 자가 어떤 스타일인지 감 잡은 것 같던데. 게다가 가우왕 씨라면 협연 준비에 애먹을 사람도 아니고.”

    “ 으음.”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럼 카밀라에게 가볼게요.”

    “그래. 아, 도빈아.”

    돌아서니 케르바 슈타인이 물었다.

    “세프는 잘 지내고 계신 거야?”

    “아.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일찍 퇴근하고 한 번 찾아가 보려고요.”

    “응. 부탁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조금 벅차네. ……목도리 멋진데?”

    “그렇죠?”

    케르바 슈타인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고 카밀라를 찾았다.

    카밀라는 흔쾌히 수락하고 가우왕 의 소속사 도이치 그라모폰에 연락을 넣겠다고 답했다.

    ‘춥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도 있고 궁금하기도 해서 조금 일찍 퇴근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푸르트벵글러의 집으로 가려 했는데 2층에서 어쿠스틱 베이스 기타 소리가 들렸다.

    진달래다.

    ‘오늘은 쉬는 날인가?’

    올라가 보니 진달래가 꽤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처음 듣는 곡이다.

    ‘푸르트벵글러가 만들었나?’

    봉달 서커스에 쓸 곡인가 싶기도 한데 뭔가 빠진 느낌이다.

    이대로도 좋지만, 감성적인 곡을 쓰는 푸르트벵글러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어색하다.

    뭔가 의도적으로 빠진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곡이다.

    그 앞에 있는 푸르트벵글러 곁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좋네.’

    진달래의 연주 실력은 전자 베이스 기타를 연주할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예전에 비해, 아니, 며칠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의수에 완전히 익숙해졌는지 리프도 괜찮은 울림을 낸다.

    솔로 연주임에도 무척 다채롭게 들 리는 푸르트벵글러의 곡(아마도)은 때때로 서글프기도 하면서 여러 음을 다루었다.

    연주하기 어려울 텐데 곧잘 하니 진달래가 얼마나 많이 노력했을지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독일어 공부 도 해야 했기에 시간이 빡빡할 게 분명하다.

    진달래가 연주를 마치고 내게 물었다.

    “어땠어? 어땠어?”

    “괜찮네.”

    “괜찮다니! 엄청나잖아! 완전 펑키 하다고!”

    흡족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푸르트벵글러에게 물었다.

    “이 곡이에요?”

    “음. 어떠냐.”

    “좋은 거 같아요.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죠?”

    “귀신이군.”

    푸르트벵글러가 자신만만하게 웃더니 진달래에게 다시 한번 연주를 요 구했다.

    반주를 튼 진달래가 방금 곡을 연주하는데 전혀 다른 느낌에 깜짝 놀 라고 말았다.

    팀파니와 베이스 그리고 이건.

    “태평소에요?”

    “역시 바로 알아보는구나. 그래. 한국적인 악기를 찾다 보니 발견했지.”

    이상한 조합이다.

    하지만 팀파니가 이끄는 박자와 중심을 잡는 베이스 그리고 자유분방 하게 날아다니는 태평소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데 아마 진달래가 어쿠 스틱 베이스 기타로 바꾼 게 이 때 문인 듯싶다.

    이 짧은 시간에 이런 곡을 만들어 내다니 역시 푸르트벵글러다.

    그리고 그것을 소화해내는 진달래도 내가 모르던 새 부쩍 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멋져요.”

    “그치!”

    진달래가 신나서 동조했다.

    “쉽지 않았지. 그래도 여가 생활로는 즐겁더구나.”

    푸르트벵글러의 얼굴이 핀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기쁨이지만 이렇게 재밌는 곡을 들을 수 있는 것도 크나큰 즐거움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고 보니 네 대 교향곡 작업이 얼마나 힘들지 감이 오더구나. 어떠냐.”

    “1악장은 완성했어요. 다음이 문제 지만.”

    “서곡이 따로 있다고 했지? 으음. 섞는 것만으로는 소리가 도리어 튈 뿐이니 조율할 부분이 많았다.”

    “네. 그래서 이렇게 빨리 이런 곡을 만들어서 다시 봤어요.”

    “하하하! 뭐, 악기가 적기도 하고 짧은 구성이니.”

    분명 좀 더 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감동할 수 있는 곡인지의 여부가 우선이니 푸르트벵글러가 드물게 겸손을 떤 것이다.

    “연주자는 어떻게 벌써 구했어요?”

    “이 아이가 제법 근성이 있더구나. 키워보면 곧잘 할 듯해서 이 아이부터 시작했지. 팀파니는 디스카우가 시원시원하고 태평소는 승희가 연결해 주었다.”

    음악계에서 불가능한 일이 없는 푸르트벵글러답다.

    “할배, 나 노래도 하고 싶은데!”

    “노래?”

    진달래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답지 않게 눈이 초롱초롱하다.

    “딴 데 가서 찾아봐. 공부는 했지만 가사는 붙인 적이 없고 또 그 정서에 맞는 가사를 붙이는 건 다른 일이다.”

    “그럼 내가 써 봐도 돼?”

    푸르트벵글러가 턱을 매만졌다.

    아마 가사를 붙인다 해도 이 음악에 어떻게 노래를 할 것인지, 가사는 적절한지 여러모로 확인할 것이 많은데 그걸 스스로 판단하기 껄끄러운 것이다.

    “제가 봐줄게요.”

    “넌 오케스트라 대전에 집중해야지. 으음…… 그러고 보니 박과 연락을 안 한 지 오래되었군.”

    “ 박?”

    “모르느냐? 건호라고.”

    “ 아.”

    예전에 최지훈과 함께 출전한 크리 크 지역 예선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던 사람이다.

    내 피아노 소나타를 무게감 있게 잘 연주하던 것이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 천진난만하게 의욕에 찬 진달래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푸르트벵글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고, 그저 다시 음악을 하는 것이 좋은 순수한 녀석을 보니 흐뭇하기도 조금 골려주고 싶기도 했다.

    “열심히 해. 안 그러면 창피당할걸?”

    “니가 안 그래도 그렇게 할 거지롱!”

    진달래가 혀를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