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15화
48. 오케스트라 대전(2)
베를린 필하모닉이 2020년대를 주 도하고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암스테르담은 여러 매체에서 세계 최 고의 오케스트라라고 소개된 바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독하게 마음을 먹 은 것도 모두 마리 얀스를 의식했던 탓인데, 마리 얀스가 그토록 싫어하는 헤르베르트 카라얀의 제자였던 탓이었다.
카라얀을 부정하는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이 가장 아꼈던 마리 얀스.
언론의 순위 매김 따위 신경 쓰지 않는 푸르트벵글러가 왜 유독 마리 얀스와 암스테르담에게 집착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론 역시 그들의 이러한 관계를 알고 유독 늘어졌던 것 같다.
어느 한쪽이 우세했더라면 금방 열 기가 식었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푸르트벵글러와 마리 얀스를 비교하는 이야기 가 자주 나왔고 지금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사그라진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밀라가 돌아가자 케르바 슈타인 이 푸르트벵글러와 마리 얀스의 관 계를 살짝 들려주었다.
거리로 나와 진달래에게 문자 메시 지를 보냈다.
슈퍼 슈바인에 특제 카레가 남아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절반쯤 걸었을 때야 답장이 왔다.
바쁜 모양이다.
‘1인분만 남았다니.’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오렴.”
슈퍼 슈바인의 주인, 김덕배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오늘도 사람이 많네요.”
매장 안을 슬쩍 둘러보니 이제는 꽤 일에 익숙해졌는지 진달래가 능 숙하게 서빙을 보고 있었다.
눈에 익은 단골들과 눈인사를 하는 데 나윤희가 눈에 띄었다. 나만큼이 나 슈퍼 슈바인의 단골인 것 같다.
시선을 느꼈는지 나윤희가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치자 소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마침 빈자리도 그녀 옆에 한 자리뿐이라 나란히 앉았다.
“어서 와.”
다른 사람과 말할 때는 여전히 말을 더듬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사람 들에게는 많이 나아졌는데,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 듯해 다행이라 생각 했다.
“일찍 왔네요.”
“연습 끝나고 바로 출발했어.”
대화하는 도중에 손을 들었다.
진달래가 나를 보곤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 다가왔다.
“맛있는 집밥 놔두고 왜 자꾸 오는 거야?”
불량한 태도의 직원을 고발하는 마음으로 김덕배를 보자 슈퍼 슈바인 의 사장이 진달래를 노려보았다.
진달래가 입을 쭉 내밀고 빌지를 들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슈니첼 특제 카레랑 프랑크푸르 터, 자우어크라우트를 추가로. 김치 도 주세요.”
“슈니첼 특제 카레는 오늘 재료가 소진되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나 남았다며.”
“하나 남았헜지.”
여전히 입을 샐쭉 내밀고 있는 진 달래가 주문을 재촉하는데 나윤희가 나섰다.
“달래야, 슈니첼 도빈이한테 줘. 난 버섯 카레로 할게.”
이제 보니 나윤희가 마지막 특제 카레를 주문했던 모양이다. 저번에 도 같은 상황이었는데 이런 쪽으로는 행동이 잽싸다.
“아니에요. 그럼 비프 카레로. 사이드는 똑같이.”
“오케이.”
진달래가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향했고 이내 특제 카레를 가지고 나윤희 앞에 가져다 놓았다.
“슈니첼 엄청 크지! 많이 먹어.”
진달래와 나윤희가 서로 웃어 보였다. 사이좋은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다만 특제 카레 특유의 깊은 향을 느끼니 나도 모르게 시선이 고정되 어 버렸다.
나윤희가 슬쩍 그릇을 내게 밀어주었다.
“괜찮으면 먹을래?”
고개를 저었다.
“늦은 건 저니까요. 다음에 먹을게요.”
“저, 저번에도 양보했잖아. 오늘은 그냥 먹어. 사실 나도 막 온 거라서 늦었다고 하기도……
고개를 저으니 나윤희는 나눠 먹을 것을 권유했다.
“한 그릇을 다 먹어야 의미가 있는 거예요. 누나 먹어요.”
“그래. 아쉽지만 그건 아가씨 몫이야.”
김덕배가 망설이는 나윤희에게 말했다.
“먼저 온 손님에게 내주려고 예약도 안 받는단 말이지. 식어도 맛있지만 따뜻할 때 먹어줬음 좋겠어.”
가게의 원칙은 지켜야 하는 법.
고개를 끄덕이니 나윤희가 특제 카레를 떠먹었다. 얼굴에 퍼지는 행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윤희가 소리 내지 않고 크게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작게 웃었다.
김덕배도 흐뭇하게 보면서 물었다.
“어때?”
“저, 정말 맛있어요. 뭐랄까. 은은 한 단맛이 정말 좋아요.”
“양파랑 마늘을 오래 볶았지. 맛있게 먹어주니 나도 기쁘구만.”
그렇게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진달 래가 비프 카레를 내주었다. 평소보 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간 듯해 고개를 들자 진달래가 검지를 입에 댔다.
이런 서비스라니.
진달래가 계속 여기서 일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밥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가우왕이다.
오랜만이라 받고 싶었지만 아주 중 요한 시기라 자동 문자로 답을 보내 고 전화를 껐다.
[주요 업무 중입니다. 잠시 후 연 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걸던 가우왕은 배도빈으로부터 날아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고 개를 끄덕였다.
‘오케스트라 대전 준비로 바쁘나 보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독일에 방문한 가우왕은 택시를 잡아탔다.
오랜만에 배도빈의 얼굴이나 볼 생각으로 연락했다.
집이 크다고 하니 며칠 신세도 지고 그간 못다 한 회포도 풀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대회 준비로 바쁜 모양.
배도빈의 집으로 찾아가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쉬프바우어담가 7번지로 가주세요.”
하지만 그의 진심에는 ‘찰스 브라움’에 대한 질투가 있었는데 한참 오래 지냈던 자신에게는 헌정곡을 주지 않았으면서 찰스 브라움에게는 곡을 만들어주었던 탓이었다.
사실 배도빈이 등장하기 전, 클래식 음악계의 아이돌이었던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은 서로 전공이 다름 에도 곧잘 비교당하고는 했는데 그렇다 보니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하지만 가우왕은 체면과 어른으로서의 입장으로 티를 내지 않았는데 스스로 그것을 무척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르시스트.’
하지만 최근 몇몇 인터뷰를 통해 배도빈이 찰스 브라움의 바이올린이 세계 최고라는 말을 했던 것은 분명 자존심 상하는 일.
가우왕은 배도빈에게 ‘세계 최고’ 라고 불린 적 없었기에 이를 조금씩 마음에 두고 있었다.
‘못할 게 어디 있어.’
사실 상업적 성공은 ‘찰스 브라움’ 에 비할 바 아니나 가우왕이 녹음에 참여한 배도빈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10년이 흐른 지금도 가장 많이 듣는 음반 중 하나였다.
가우왕은 더욱 성숙해진 자신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협연이라면 찰스 브라움보다 더 뛰어난 연주가 가능 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문제는 갑작스레 베를린 필하모닉 에 입단한 동생 소소.
연락을 안 한 지 벌써 몇 년이나 된 동생이 무서운 탓에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에 대해 쉽게 접근하 기 어려웠다.
2006년 춘절.
17년 전의 어린 소소는 얼후를 배 우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당시 선 생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받은 첫 얼후.
소소는 그것을 애지중지 다뤘는데 온종일 거실에서 얼후를 연주하곤 했었다.
하지만 소소가 어머니의 부름을 받 고 잠시 얼후를 내려놓았을 때 옆에 서 반복된 연주회로 지쳤던 가우왕이 자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목이 말라서 깬 가우왕이 일어났을 때 와직끈 소소의 얼후를 밟았고 가우왕은 6살 소녀에게 깃든 귀령(鬼'顯)을 볼 수 있었다.
이후 소소는 가우왕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스산한 눈으로 그를 보았고 가우왕은 저주에 걸릴 듯한 기분에 점차 동생을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연락도 안 하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 머니를 통해 가끔 소식을 들을 뿐, 개인 연락처도 서로 없는 사이가 되었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니 가우왕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어린 동생에게 관심 좀 가지라 타박했지만 가우왕은 좀처럼 그럴 수 없었다.
‘저주 걸릴 거란 말이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 이 돋는 듯했다.
‘뭐, 차차 생각하자고.’
가우왕이 택시비를 지불한 뒤 벨을 눌렀다.
잠시 뒤 배도빈의 집사가 문을 열 고 나와 가우왕을 마주했다. 일전에 한 번 방문하기도 했었고, 배도빈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를 반갑게 대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께선 아직 귀 가 전이시니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감사합니다.”
집사가 가우왕에게 손을 뻗었고 가우왕은 외투를 벗어 그에게 넘겨주었다.
집사는 현관문 옆에 있는 손님용 옷걸이에 가우왕의 외투를 걸어둔 뒤 그를 안내했다.
“그럼, 필요하신 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응접실에 들어선 가우왕은 으리으리한 배도빈의 집을 구경했다.
‘대체 이런 집은 얼마를 벌어야 살 수 있는 거야?’
첫 방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볼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그 역시 남부럽지 않은 고소득자였으나 배도빈의 집과 그 안의 시설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밖에서 배도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우왕이 왔다고요?”
그 목소리에 가우왕이 응접실 문을 열고 나섰다.
“바쁜 것 같아서 먼저 와 있었지.”
“가우왕.”
배도빈이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가우왕과 악수를 나누었다.
가우왕을 알아본 나윤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사를 나눠야 할지 아니 면 조용히 자기 방으로 올라가야 할 지 갈팡질팡했다.
그 모습이 가우왕에게는 자신을 만나 당황하는 몇몇 팬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 아름다운 여성은?”
가우왕의 말에 배도빈이 한껏 인상을 썼다.
“소중한 단원한테 수작질 부리지 마요.”
“수작질이라니! 팬에게 이런 멘트는 포상이라고!”
“아, 으으. 저, 저는 그만 올라가 볼게요.”
나윤희가 후다닥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자 배도빈이 한숨을 내쉬 며 말했다.
“찰스도 가우왕도 그런 짓만 안 하면 훨씬 더 사람들이 좋아할 텐데.”
“그놈이랑 비교하지 마.”
“제가 보기엔 찰스도 가우왕도 똑같아요. 저번 연주회 때 그 요란한 옷은 뭐였어요?”
“다 엔터테인먼트라고.”
만나자마자 투덕거린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근 1년 만 에 다시 만났기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랑 협연 때문에 온 거예요?”
“그렇지. 겸사겸사 네 얼굴도 좀 보고.”
“소소도 좋아하겠네요. 아마 지금 집에 있을걸요?”
“••••••뭐?”
가우왕이 워낙 크게 놀라, 배도빈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 놀라지. 걔가 왜 여기 있어?”
“여기서 살아요. 전 가우왕이 몰랐던 게 더 신기한데. 남매잖아요.”
“남매라고 다 연락하고 지내는 건 아니라고. 아무튼 난 이만 가볼게.”
그렇게 대화를 마친 가우왕이 서둘 러 외투를 챙기려는 순간.
1층에서 가우왕을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소소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퇴근 후 막 씻은 탓에 머리가 젖어 있었고 그것을 아무렇게나 늘어 뜨린 채 턱을 당기고 가우왕을 응시 하는 소소였다.
배도빈이 외투를 챙기는 가우왕과 그에게 조금씩 접근하는 소소를 번갈아 보았다.
“나 간다. 히이익!”
그리고 이내 뒤돌아선 가우왕의 시 야에 소소가 들어왔고.
가우왕은 발작했다.
“안녕.”
소소의 인사에 뒷걸음질을 친 가우왕이 옷걸이에 걸려, 그것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 아.”
배도빈과 집사가 깜짝 놀랐고 소소는 살짝 웃었다.
옷걸이의 튀어나온 부분이 가우왕 에게 안타까운 고통을 선사해 준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