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14화
48. 오케스트라 대전(1)
크레용 위즈는 푸르트벵글러를 너무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역사적인 거장이 참여해 준다고 하니, 대표와 팀장이 엎드리기라도 할 것 같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음악 자체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일은 많이 경험해 봤기에 참 여하는 사람의 명성이 작품 홍보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었고 푸르트벵글러는 분명 크게 화제가 될 것이다.
굳이 클래식 음악에 한정하지 않더 라도 푸르트벵글러의 이름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에 처음 참여하는 것이니만큼 언론도 주목할 터.
크레용 위즈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배영빈이 감독으로 나선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이고 푸르트벵글러도 심심풀이할 일이 필요한 것 같으니 나 도 좋게 생각했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크레용 위즈가 내게 세 곡을 의뢰 할 때 예상했던 액수는 2억 5천만 원이었는데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에 서는 이례적인 수준이라 한다.
문제는 내 기준에도, 푸르트벵글러 의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아서 협상 자리에 나선 카밀라가 몹시 불쾌해 했다.
크레용 위즈가 금액을 좀 더 높여 계약금 3억 원에 러닝개런티와 저작 권료 비율까지 높임으로써 협상은 어떻게든 마무리된 듯하다.
마지막 걱정은 푸르트벵글러를 기 다리고 걱정하는 팬들이 어떻게 반 응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 문제도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는데, 팬심은 언제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은 채 베를린 시내 곳곳에서 흥얼거리며 다니는 푸르트벵글러의 색다른 모습이 신기한 듯, 그의 사진과 푸르트벵글러를 만났다는 SNS 게시글이 연일 좋은 느낌으로 올라왔다.
‘저런 모습 처음이야’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당황한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도 SNS에 연일 올라오는 ‘푸 벵옹 발견!’이란 글과 사진을 보며 그들의 지휘자가 즐겁게 지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내 걱정을 내려놓았다.
결론은 푸르트벵글러에게 휴가를 주려던 우리의 일과 연계되어 이상 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만.
모두 만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다.
“정말 엄청나네.”
계약을 체결한 날 배영빈이 진이 빠진 채 말했다.
“뭐가?”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많이 준비했다고 생각했거든.”
예전에 히무라가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는데 영화 음악 작곡 패키지 계 약은 보통 적게는 2,500달러에서 50 만 달러 정도로 책정된다고 했다.
원화로 따지면 약 300만 원쯤에서 5억 5천만 원 사이인데, 가장 최근 에 참여했던 크리스틴 노먼의 2017 년 작품 ‘덩게르크 철수 작전’에서 10억 원을 받았었다.
그때가 벌써 5년도 더 된 일이니 내 기준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확 실히 알겠다.
지휘뿐만이 아니라 작곡으로도 오 랜 세월 성공했던 푸르트벵글러 역 시 나와 마찬가지일 거라 말해주니 배영빈이 ‘택도 없었네’라고 말했다.
푸르트벵글러가 많이 양보해 주었음을 이해한 것 같다.
“너…… 대체 얼마나 버는 거야?”
“ 나?”
굳이 감출 이야기도 아니기에 핸드 폰을 꺼내 가계부를 열었다.
“작년에는 1,700만 달러였네.”
“ 뭐?!”
“절반 가까이는 세금으로 나가.”
“어. 어어.”
넋이 나갔는지 어버버 댔다.
솔직히 연간 수입이 수십억을 넘긴 뒤로는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렇게 체감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보 기엔 놀랄 정도긴 한 모양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심심풀이를 찾은 뒤로 여러 음악을 들으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베를린 시 내를 걷는다든지 한적한 카페에 들 어가 차를 마신다든지 하면서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경질 적이었던 그가 조금씩 부드러워지자 주변 사람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 게 되었다.
푸르트벵글러가 공원 근처의 한적 한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테이블에는 크레용 위즈에게서 받 은 봉달 서커스의 대본과 설정 자
료,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자료가 들려 있었다.
거의 대부분 완성된 애니메이션 파 일도 받았으나 작품을 깊이 있게 이 해하고 싶었기에 푸르트벵글러는 반 복해 자료를 탐독했다.
‘한국에 이런 역사가 있었구만.’
한국이 일본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나서야 오랜 벗,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을 그제야 조금 이 해할 수 있었다.
배도빈과 일본의 관계는 신기해 보 일 정도였다.
그렇게 오늘도 때 아닌 세계사 공
부를 하고 있던 푸르트벵글러가 문 득 시계를 보았다.
‘이런. 늦었구만.’
짐을 챙긴 그가 천천히 걷기 시작 했다.
최근 그는 배도빈의 집에서 하숙을 하는 가수 지망생인 진달래를 자주 만났는데 특유의 밝은 모습이 그에 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배도빈의 집 문을 두드렸다.
곧 집사가 문을 열어 그를 맞이했다.
사카모토 료이치나 푸르트벵글러 등 몇몇 이는 배도빈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집사 역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에 정중히 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실례하겠소.”
“두 분 주인님과 도련님들은 외출 하셨는데 기다리신다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오. 괜찮소.”
푸르트벵글러가 격식을 차리며 집 사와 대화를 하는 와중 진달래가 1 층으로 내려왔다.
“할배! 오늘은 안 늦었네?”
“누가 들으면 매일 늦는 줄 알겠
다. 이 녀석아. 그럼 실례하겠소.”
“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진달래가 푸르트벵글러를 이끌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 있는 진달래는 학원 수업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 졌는데 그나마 친한 배도빈, 소소, 나윤희 등이 바빴기에 외로움을 느끼던 차.
마찬가지로 한가해 보이는 ‘할아버 지’가 자기 연주를 들어줌에 기뻤다.
오늘도 자신이 작곡한 곡을 반주로
놓고 베이스를 연주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쏟아내 듯 연주한 진달래가 보란 듯이 물었다.
“어때! 오늘은 어제보다 잘하지?”
“하하하. 전혀.”
“아니! 대체 뭐가 문젠데?”
“봐라. 감정을 담는 건 좋지만 네 연주는 듣는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지 않느냐.”
“그, 그게 뭐야?”
푸르트벵글러가 피식 웃으며 차근 차근 설명해 주자 진달래의 눈과 코
와 입이 조금씩 모였다.
“너무 어려워.”
“많이 듣는 것도 좋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실력은 늘지 않아. 모든 것 에 의문을 가지고 답을 찾아야지.”
“하지만 난 머리가 안 좋으니까.”
“음악에 답은 없다. 답도 없으니 틀리는 것도 없어.”
“그럼 왜 내 연주는 별로라는 거야?”
“음악은 듣는 거니까. 관객이 없더 라도 네가 듣지 않느냐. 기본적으로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 의 입장을 고려해야 해. 즐겁지 않다면 그건 소음일 뿐이야.”
그렇게 말한 푸르트벵글러가 그가 최근 작업하고 있는 악보를 진달래 에게 주었다.
“좋은 말인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 근데 이건 무슨 곡인데 자꾸 연주하라는 거야?”
“어허. 시키는 대로 하면 실력이 는다니까.”
제1회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가 처음으로 주최하는 이 대회에 전 세계 120개 악단이 참가를 신청했다.
‘베를린 환상곡’과 ‘찰스 브라움’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임을 증 명해낸 배도빈의 베를린 필하모닉 B와 더불어.
빈 필하모닉.
뮌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손레 리 게르기예프).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마리 얀스).
런던 심포니(브루노 발터).
런던 필하모닉(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시카고 심포니(제르바 루빈스타인).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프란츠 미 스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구스타프 하 나엘).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예르반 퓌셔).
등 내로라하는 악단과 거장들이 모 이니 과연 ‘대전(大轉, Great war)’ 이라는 이름에 어울렸다.
이렇게나 많은 악단이 참가한 데에는 공통된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 사이에 독보적인 톱이 생 겨났기 때문이었다.
그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어 디냐는 질문은 싸우고 싶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베를린, 빈, 암스테르담, 런던 등 최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악단 들이 여럿 있었기에 논쟁은 치열해 질 수밖에 없었는데.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복 귀한 뒤 1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성장은 가팔랐고, 관객 동원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악으로나 매출액으로나 부동의 1 위에 올라섰기에 다른 악단과 지휘 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패배’는 있을 수 없는 일.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이 들이었기에 저마다 각자 자신이 최 고라 생각해 왔는데 그들 앞에 거대 한 사람이 나타나니 투지에 불타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에 배도빈이 답하 니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쏟아부 은 격이었다.
“배도빈 악장,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겠죠?”
“목표요?”
“네.”
“목표는 이루지 못한 일을 정할 때 하는 말이죠. 우승이란 목표는 제가 아니라 다른 분들이 가지셔야 할 것 같네요.”
해당 인터뷰 영상이 전파를 타자 세계 각지에서 난리가 났고 그것을 본 사카모토 료이치는 껄껄 웃었고 푸르트벵글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장혁 회장은 기특한 손주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고 제임스 버만 은 이를 갈았다.
“하여간 튀는 행동은 다 한다니까.”
그리고 소소가 무서운 가우왕은 동 생도 참여하는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을 어떻게 구경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He 패 *
카밀라가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의 진행방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예선은 심사단이 각 악단에 3일간
머물면서 진행한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콘트라베이스 주자 시엔 양이 손을 들고 물었다.
“일반 연주회를 듣는다고 해요. 연주뿐만 아니라 관객이 얼마나 편하 게 관람을 할 수 있는지 등 여러 요소에서 평가를 한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120개나 되는 악단이 한 곳에 모여 경쟁하면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참가하는 데 드는 비 용이 너무도 크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 예선을 가 지는 모양인데 그럼에도 시간이 꽤
들 것 같다.
“그럼 360일이나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아뇨. 여러 팀으로 나뉜다고 해요. 판단 자료를 수집해서 취합해서 점 수를 책정하니 6주 정도 예상하고 있대요.”
시엔 양이 만족한 듯하자 카밀라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본선으로 올라갈 수 있는 악단은 40곳. A와 B로 나뉘어 일주일간 잘츠부르크에서 연주회를 가진다고 해요. 예정일은 4월 마지막 주와 5월 첫째 주예요.”
“가깝네.”
이동할 거리가 먼 것은 분명 컨디 션 저하의 큰 요인이다.
나와 가우왕이 세계 투어 연주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 고 분명 이번 대회에서도 영향이 미 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우왕하고 연락 안 한 지 오래되었네.’
“본선 1차 지정곡은 베토벤 교향곡 중 하나예요. 결정은 배도빈 악장과 베를린 필하모닉 B에 맡길게요.”
카밀라가 나를 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에로이카가 좋겠지.’
카밀라가 지침서를 덮고 단원들을 둘러보았고 마지막에는 다시 한번 나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어요. 여러분을 믿습니다.”
“걱정 마세요.”
푸르트벵글러가 안심하고 쉴 수 있도록, 더욱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당연히 우승할 생각이다.
단원들도 한껏 의욕적으로 보인다.
문제될 것은 단 하나.
사카모토 료이치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더불어 내가 인정하는 위 대한 지휘자.
마리 얀스가 가장 큰 상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