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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13화 (21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13화

    47. 독거노인과 신입사원(4)

    배영빈이 봉달 서커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배경은 일제 강점기의 서울.

    박봉달은 죽은 아버지로부터 영세한 서커스단을 물려받는다.

    가난한 박봉달과 서커스 단원들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박봉달은 가족 같은 그들과 함께 성공하기 위해 사업적 재능을 발휘한다.

    돈 냄새를 맡은 일본 순사들이 봉달 서커스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가족을 위해 박봉달은 자존심과 자부 심을 모두 내려놓고 알랑방귀를 뀌 고 다닌다.

    사람들은 박봉달을 돈에 미친놈이라 욕한다.

    그리고 봉달 서커스에 큰 돈을 벌 기회가 주어지니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날의 축하연.

    공연에 오르기 직전, 박봉달은 공 연 물품을 보관한 큰 궤짝에 숨어 있는 독립투사를 발견한다.

    ‘재밌잖아.’

    뒷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배영 빈이 말을 잇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서를 살릴 수 있는 음악가가 절실 했습니다. 그리고 마에스트로라면 분명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음악을 들려줄 거라 생각했고요.”

    배영빈이 하라는 뒷이야기는 말해 주지 않고 영상을 보여주었다. 설정 화를 포함한 실제 영상을 조금 보여줄 뿐인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감독으로서는 처음이지만 성 공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크레용 위 즈에서도 전력을 다하고 있고요.”

    박상만이 배영빈을 도왔다.

    “저희는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오래 준비해 왔습니다. 노하우를 쌓기 위해 지구방위대 가 랜드 등 여러 작품의 외주를 맡아 왔고 자본도 확실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 기 바랍니다.”

    ‘어쩌지.’

    하고 싶다.

    주제도 좋고 소재도 흥미롭지만 가장 중요한 건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건데,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 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업적 성공 요소가 있다는 말.

    카밀라가 슬쩍 입을 열었다.

    “한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제가 봐도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한데, 배도빈 악장 겸 지휘자의 스케줄이 문제겠네요.”

    “네?”

    “OOTY에서 2월 말부터 오케스트라 대전을 개최하는데 베를린 필하모닉 B도 참가할 예정이에요. 지휘 자는 당연히 배도빈 악장이고요.”

    “ 아.”

    크레용 위즈의 세 사람이 탄식했다.

    예전이라면 나도 무리를 해서 함께 하겠지만 지금은 단원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다른 작업과 병행하면 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고 한창 좋은 분위기를 타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누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배영빈의 만화영화가 재밌다는 게 문제였다.

    “일정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확인차 물었다.

    “5월 초 개봉으로 잡고 있습니다.”

    최종 작업 일자를 아무리 늦게 잡아도 오케스트라 대전과 정말 딱 들 어맞는 일정이라 어쩔 수 없겠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제게 중요한 일이 있어 병행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네. 이해합니다.”

    “재밌어 보이니 분명 좋은 작곡가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크레용 위즈와의 이야기를 일단락 하고 배영빈과는 저녁에 보기로 한 뒤에 연습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었어?”

    마누엘 노이어가 물었다.

    “오리지널 스코어 작업 의뢰였어요. 재밌어 보였는데 일정이 겹쳐서 거절했네요.”

    “으음. 바쁜 시기긴 하지. 세프도 없으니까. ……화가 빨리 풀리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죠.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푸르트벵글러에 대해서 단원들에게 말하지 않은 게 생각났다.

    “세프, 괜찮은 거 같아요.”

    “어?”

    “만났어? 뭐라셔?”

    내 말에 단원들이 갑자기 주변을 빙 둘러쌌다.

    “쑥스러워서 그런지 말은 틱틱대도 착실히 쉬고 있는 것 같아요. 여행 다녀왔더라고요.”

    “그럼 연락은 왜?”

    “화가 나긴 했으니까요.”

    참 복잡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서운하면서도 고맙고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휴가가 어색하기도 할 테고 여러모로 말이다.

    푸르트벵글러가 하와이에서 마사지 도 받고 건강검진도 받으며 금연을 시도하는 중이라 하자 다들 안도하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한테 화난 거야 어떻게든 풀어드려도 쉬신다니까.”

    “그러게.”

    같은 생각이었다.

    * *

    “안녕하세요.”

    “어서 와.”

    배영빈이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왔다. 우리 집을 둘러보더니 입을 떡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대단하네요. 저 이런 집 만화에서 밖에 못 봤어요.”

    어머니는 말을 아끼고 웃으며 영빈이를 반겨주셨다.

    백모(큰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머니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으신 듯하 지만 배영빈의 착한 마음씨는 잘 알고 계신다.

    백부가 젊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받 아들이지 않으셨더라면 어렸을 때의 나와 함께 밖에서 지내셨을 테니 어머니도 굳이 예전 일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듯했다.

    저녁이 준비된 7층으로 올라가니 하숙생들과 푸르트벵글러가 있었다.

    “어? 아직 안 돌아가셨네요.”

    “흥. 심심하게 혼자 있으란 말이 냐?”

    “대체 언제까지 삐쳐 있을 거예요?”

    “맞아. 세프 옹졸해.”

    소소가 지원사격을 하니 푸르트벵글러가 토라져 버렸다. 당분간은 저럴 듯하다.

    “저……

    “아, 제 사촌 형이에요. 형, 이 사람이 푸르트벵글러. 세계 최고의 지휘자야.”

    “아, 도빈이에게 말 많이 들었습니다. 배영빈이라고 합니다.”

    “크흠. 반갑네.”

    인사를 시켜주는데 삐친 푸르트벵글러를 달래기 위해 띄어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말했는데 조금 좋아하는 것 같다.

    푸르트벵글러가 배영빈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여기는 소소, 윤희 누나.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이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

    그렇게 저녁을 함께하였고 음악가들 사이에서 애니메이터란 직업은 신기했던 모양이다.

    “우와. 대, 대단하시네요. 일 년밖에 안 되었는데 감독을 맞으시다니.”

    “좋게 봐주신 덕분이죠.”

    “아니야. 영빈아, 네 나이에 그렇게 인정받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아버지랑 어머니도 뿌듯하시겠다.”

    “어머니는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고요. 하하.”

    “그런데 무슨 이야기에요?”

    “아 그게……

    원래 만화를 좋아하는 소소와 나윤희는 배영빈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베를린에 온 이유도 묻게 되었다.

    “도빈이한테 곡을 의뢰하러 왔는데 아쉽게 됐어요.”

    “아, 그, 그럼 아까 온 사람들이 영빈 씨네 회사 분들이셨네요.”

    “아쉬워.”

    “그러게. 먼 길 왔는데.”

    나윤희의 말에 소소와 어머니도 안타까움을 표하며 배영빈을 위로했다.

    “어쩔 수 없죠. 도빈이를 방해할 순 없으니까요.”

    “그럼? 누구에게 부탁할 건데?”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사실 한국인 중에서 구하고 싶은 데 후보가 적어요. 우선 도빈이가 안 된다면 차명운 지휘자에게 부탁 하려 했었어요. 하지만 작곡을 안 하신 지 오래된 걸로 알아서……

    아마 배영빈이 클래식 작곡가를 고집하는 이유는 나 때문일 것이다.

    배영빈이 4년간 혼자 만든 ‘가랜드’에 헌정해 준 음악이 클래식풍이 가미된 록 음악이었으니 그런 느낌을 바라고 있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배영빈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예전에 제가 만든 만화에 도빈이가 곡을 만들어주었는데 그 느 낌을 살리고 싶거든요. 가능하다면 좀 더 한국적 정서를 살려서.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도빈이라면 가 능할 것 같았어요.”

    배영빈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미안. 괜한 부담을 줬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나도 아쉽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또 그만큼 감수성 짙은 곡을 만드는 사람도 드 무니 사카모토 료이치에게 물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하지.”

    깜짝 놀라 푸르트벵글러를 보았다.

    나윤희와 소소도 놀란 눈치다.

    나와 사카모토에게 클래식을 하라 고 화를 내던 푸르트벵글러가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배영빈도 놀라 긴 마찬가지였다.

    “네?”

    “마침 한가하던 차에 잘 되었군. 내게 가져와 봐.”

    “세프, 쉬는 게 좋아.”

    소소가 이곳에 없는 단원 모두를 대신해 푸르트벵글러에게 말했다.

    쉬라고 그런 짓까지 벌였는데 다른 일을 맡는다면 단원들도 허무할 것 이고 그럴 거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시 복귀하는 게 나을 거라 생 각한 것이다.

    “쉬는 거야.”

    “무슨 말이야. 말도 안 돼.”

    “크흡.”

    물을 마시던 나윤희가 소소의 말에 사레들렸다.

    푸르트벵글러가 말했다.

    “난 평생 음악과 떨어져 있어 본 적 없다.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도 몰라. 너희가 날 생각해서 휴가를 준 건 고맙다만 내가 알아서 한다.”

    “……도빈, 말려봐.”

    “쓸데없는 짓. 쉬라고 했더니 네게 얼후를 배운 녀석이잖느냐.”

    푸르트벵글러가 유학을 준비하는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언급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쉬는 기간에 대 교향곡을 만진다거나 피아노 협주곡을 만들었고 여러 악기를 배웠다.

    뭔가 조금 이상해서 생각하고 있는 데 푸르트벵글러가 확인하듯 물었다.

    “거 봐라. 도빈이 너나 나나 결국 음악 없이 살 수 없어.”

    “그럼 차라리 돌아와요.”

    “싫다. 근 30년 만에 휴가인데 나 도 내 하고 싶은 대로 보낼 거야.”

    어이가 없어 그런 일이 있었다고 사카모토에게 전화를 하자 그가 크게 웃었다.

    나는 사카모토가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들었다.

    -하하하하! 끄윽. 끅.

    “웃지 말아요. 전 당황스럽다고요.”

    -재밌지 않은가. 베를린 필하모닉이 자기 꾀에 넘어진 꼴이구만. 하하하하!

    -크흠.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게, 도빈 군. 그 빌헬름이 애니메이션 스코어 작업을 한다는 건 분명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뜻이지.

    “무슨 뜻이에요?”

    -오죽했으면 강철의 폭군으로 불렸겠나. 그렇게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빌헬름도 조금씩 여유를 가지게 되는 거야. 자네와 지금의 베를린 필하모닉을 믿는 게지. 안 그랬다면 쫓겨나갔을 때 거하게 한바탕 했겠지. 안 그렇나?

    “세프가 우릴 믿고 있다고요?”

    -음. 분명 그러할 걸세. 그러니 지 금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어. 하하하하! 빌헬름의 곡이라니. 이거 기대되는구만.

    사카모토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듣다 보니 나도 조금씩 걱정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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