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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12화 (212/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12화

    47. 독거노인과 신입사원(3)

    ‘고얀 놈들.’

    갑자기 이것저것 챙겨줄 때부터 알 아봤어야 했다. 내게 의논조차 없이 악장단이 입후보를 했을 때도 의아 했거늘.

    단원들이 작당 질을 하였다.

    그러나 내 굳이 물러서지 않으려 해도 선거는 신성한 법.

    베를린 필하모닉의 결정을 인정하 지 않는다면 내 평생을 몸 바친 그 곳을 부정하는 일이니 나로서는 그 런 짓은 할 수 없다.

    비록 쇠약해졌으나 가슴에서 음악 이 뒤끓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단원들에게 화가 날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고 서재에 앉아 마음을 삭이고 있자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니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 해졌다.

    한기가 조금씩 밀려온다.

    “빌. 빌?”

    카밀라가 나를 찾는다. 소리가 가 까워지더니 이내 서재에 불이 들어 왔다.

    “세상에. 불도 안 켜고 뭐 하고 있었어요?”

    “……오늘은 혼자 있고 싶군.”

    내 말을 들은 카밀라가 한숨을 내 쉬더니 다가왔다. 뺨을 어루만지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상할 거예요. 혼자 있으면 더 슬플 테니 같이 있어요.”

    “ 난.”

    “난방도 안 해두고. 이러다 더 몸 상하면 어쩌려고 해요.”

    “카밀라.”

    “빌.”

    카밀라가 돌아서 나를 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은 언제나 차분히 총기를 발한다.

    나는 그것을 깊이 흠모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이를 먹었어요. 아마 남은 시간도 음악을 하며 살 테죠?”

    다정한 목소리.

    “나도 그러길 바라요. 빌을 사랑하는 만큼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도 사랑하니까. 그러니 당분 간은 쉬도록 해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잖아요.”

    28년이란 세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더 훌륭한 음악을 하기 위해 매일, 매시간이 너무도 소중했고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키기 위해 ‘적’들과 싸워왔다.

    나의 제국.

    베를린 필하모닉은 거둬낼 수 없는 오명을 씻어내기 위해 여러 사람의 희생 속에 꽃 피운 악단이다.

    세계 대전과 나치에게서 지키기 위 해 손을 더럽힌 K.

    내 비록 그를 인정하지 않으나 그 의 행동에 나만은 돌을 던질 수 없었다.

    내게도 K에게도 베를린 필하모닉 은 그 어떠한 것보다 소중했으니까.

    나의 음악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무대라 생각했기에 K도 나도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었다. 1)

    1)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

    4):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 베를린 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3개 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다.

    이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며 괴벨스에 의해 제국음악협회 부회장 직을 부여 받고 나치 선전을 강요받 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재능 있는 음악인이라면 아리아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 나치 에 의해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 직을 박탈당한다.

    누구보다도 음악을 사랑했고 자신을 지키려 했지만 ‘나치 음악가’란 비판을 피할 순 없었다.

    비록 K가 나치 당원으로 활동하진 않았으나 베를린 필하모닉의 무너진 명예를 되돌릴 순 없었다.

    그러하기에 노년의 그와 나는 적어 도 음악에서만큼은 베를린 필하모닉, 아니, 독일의 음악이 퇴색되지 않도록 몸 바쳤다.

    전 유럽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 지른 과거의 망령 때문이라도 그래 야만 했다.

    베를린의 음악이 그 고통과 슬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야 한다 생각했다.

    “나는 쉴 수 없어.”

    누가 알 것인가.

    이 무거운 짐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라면 분명히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고 평 생을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카밀라가 나와 손을 겹쳤다.

    “아니요. 쉬어도 돼요.”

    고개를 들어 카밀라를 보았다.

    “당신이 가르친 사람들이잖아요. 빌이 어떤 생각으로 베를린 필을 지 켜왔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거고요.”

    “그러니 이번에는 푹 쉬어요. 지금까지 열심히 한 당신한테 조금은 상을 주는 거예요. 당신이 가꾼 베를린 필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따뜻한 곳은 어때요?”

    카밀라가 내게 두 장의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었다.

    조금 이르지만 점심을 함께했다.

    푸르트벵글러는 식사 도중에도 도 진이와 진달래에게 하와이에서의 일을 시시콜콜하게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진달래가 서둘렀다. 슈퍼 슈바인으로 출근할 시간인 듯하다.

    “잘 다녀와.”

    “네!”

    아르바이트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푸르트벵글러가 내게 물었다.

    “넌 왜 여기 있느냐.”

    “쉬는 날이에요.”

    “오케스트라 대전이 코앞인데.”

    “다들 잘하고 있어요.”

    니아 발그레이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읽고 푸르트벵글러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관광지 이야기를 하시는 건 처음 듣네요. 얼마나 계셨던 거예요?”

    “사나흘 있었지.”

    “즐거우셨나 보네요. 크레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조용하고 좋더라고요.”

    “크흠. 비행기 티켓이 아까워서 어쩔 수 없이 간 거였네.”

    “재밌게 즐겨놓고 솔직하지 못하긴.”

    계속 심술궂게 말하기에 말을 툭 내뱉으니 푸르트벵글러가 입술을 씰룩였다.

    “어느 놈들이 날 쫓아낸 덕이지.”

    “마음 같아서는 꽁꽁 묶어두고 휴양지에 보내고 싶었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다녀왔어!”

    “검진도 받게 하고 그 굳은 몸도 풀게 마사지도 좀 해주고.”

    “와이키키 마사지사들 손이 맵더구나!”

    “맨날 고기만 먹는 식단도 좀 바꾸면 얼마나 좋아.”

    “그렇지 않아도 빌어먹을 브로콜리를 얼마나 먹이는 줄 아느냐!”

    “시가도 끊어요!”

    “안 해! 안 해! 그거 참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아느냐!”

    “안 해요?”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지 말라는 말만 늘어놓고 말이야. 내가 대체 왜 너희 말을 들어야 하는 거냐!”

    화를 내며 이것저것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푸르트벵글러를 보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바라는 일은 하고 있고 휴가도 즐긴 것 같기에 안심이 되었다.

    “정기 연주회는 잘하고 있는지! 오케스트라 대전은 잘하고 있는지! 연 습은 다들 제대로 하고 있는지.”

    푸르트벵글러의 말을 끊었다.

    “다들 세프랑 다시 함께할 날을 기 다리고 있어요.”

    역정을 내던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벌린 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내 ‘말이나 못 하면’이라고 궁시렁대며 다시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난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는데 어머니 께서도 밝게 웃어주셨다.

    “참. 도빈아, 영빈이 형 오는 거 아니?”

    “아뇨. 못 들었어요.”

    “독일에 일이 있다나 봐. 오늘 밤에 도착한다고 하던데.”

    “그럼 여기서 머물겠네요.”

    한동안 소식을 못 들었는데 잘 지 내고 있는 모양이다.

    “일 때문에 오는 거라 회사 사람들 하고 함께 있는다고 하더라. 그래도 내일 저녁은 같이 먹자고 했으니 까.”

    “네. 시간 비워둘게요.”

    “누구야?”

    도진이가 물었다.

    “만화 그리는 형.”

    “아. 가랜드!”

    고개를 끄덕이자 도진이가 기뻐했다.

    다음 날 이른 오후.

    연습을 하고 있는데 카밀라가 케르 바 슈타인을 불렀다. 상임 지휘자 역할을 맡은 뒤로 몹시 수척해진 그 가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잠시 쉬고 있는데 이번에는 카밀라 에게서 문자가 왔다.

    잠깐 사무국으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카 밀라와 케르바 슈타인이 처음 보는 두 사람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 배영빈이 있었다.

    “어?”

    “잘 지냈지?”

    “무슨 일이야?”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회사 일 이라는 게 베를린 필하모닉과 관련 한 일일 줄은 몰랐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으려고 하는 데 배영빈과 함께 온 듯한 두 사람 이 일어나 내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부담스럽다.

    “안녕하십니까, 크레용 위즈의 대 표 김석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상만입니다.”

    “안녕하세요. 배도빈입니다.”

    자리에 앉자 카밀라가 내게 상황을 간략히 요약해 주었다.

    “극장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도빈이 네게 곡을 의뢰하고 싶다고 하시네.”

    “이렇게 갑자기요?”

    보통 일을 맡기 전에는 문서로 이 것저것 이야기가 나오고 이렇게 직 접 만날 때는 계약을 할 때 정도였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과는 조금 달 라 물으니 카밀라가 조금은 난감하 다는 듯 묘한 표정으로 답해주었다.

    “그만큼 절실한 거겠지. 내가 출장 가 있는 동안에 들어온 일이라 멀핀 이 우선 미팅만 잡아두었나 봐.”

    고개를 끄덕이자 김석진 대표가 나 섰다.

    “카밀라 국장님 말씀대로입니다. 저희는 애니메이션, 봉달 서커스의 성공을 확신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OST 역시 크게 신 경 쓰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음악가인 도빈 씨에게 의뢰 하고 싶습니다.”

    박상만이 김석진의 말에 맞추어 내 게 ‘봉달 서커스’를 소개하는 서류를 보였다.

    ‘이래서 영빈이를 데려왔구나.’

    사실 그리 마음에 드는 태도는 아니다. 그 마음은 이해한다만 사촌을 앞세워 내게 의뢰하는 모양새가 그 리 좋게 보이진 않는다.

    배영빈을 보자 역시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분명 회사 안에서도 입장이 난감했을 거라 생각한다.

    서류를 읽기 전에 분명히 해둬야 할 일이 있기에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충 이해했습니다. 그 전에 여쭤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크레용 위즈는 정말 봉달 서커스의 성공을 확신하고 계신가요?”

    “물론입니다.”

    “그럼 왜 사업부가 아닌, 애니메이 터가 함께했는지 의아하네요. 자신 이 있다면 이럴 필요가 있는지도 의 문이고요.”

    비록 사카모토가 연결해 준 회사라 고 하지만 이런 회사라면 나는 배영 빈을 이런 곳에 둘 생각이 조금도 없다.

    정말 자부심을 가진 곳이라면 이런 어정쩡한 방식으로 접근할 리도 없을 테니 말이다.

    배영빈은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할 재능과 노력이 있기에 이런 곳에서 썩히기 싫었다.

    김석진 대표가 말을 하지 못했고 배영빈이 나섰다.

    “대표님, 여긴 제가.”

    김석진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고 허락을 구한 배영빈이 내게 말했다.

    “실은 봉달 서커스는 내가 만든 거야.”

    박상만이 건넨 서류를 보니 감독명 에 배영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널 추천한 것도 나고.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직접 온 건데 그게 더 큰 오해가 되었나 봐.”

    “무슨 말이야?”

    “내 만화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라 생각해. 하지만 내가 만든 영화를 네게 의뢰하면 착한 넌 어쩔 수 없이 들어줄 거라 생각해서 직접 말하 려고 왔어. 사촌이란 이유로 부탁하 고 싶지는 않으니까.”

    안 해줄 생각이었는데.

    “그러니 도빈아, 아니, 마에스트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배영빈의 말은 무척이나 어색했다.

    그러나 결코 우습지는 않았다.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상황을 직접 해명하고자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확신을 했기에 그것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를 찾은 거라면 이야기 정 도는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들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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