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11화 (211/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11화

47. 독거노인과 신입사원(2)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실각은 외 부인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강철같이 굳건하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폭군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 했을 때만 하더라도 일이 이 지경까 지 흐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걱정이 앞섰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팬들에게는 니아 발그레이를 잃은 상처가 아직 남 아 있었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마저 잃자 그 상실감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베를린 시내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 마다 이에 관련한 이야기가 화제로 삼아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쓰러졌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이럴 줄은 몰랐지. 아니, 그도 그럴 게 다음 날부터 곧장 지 휘를 하지 않았나.”

“그게 문제였던 게지. 16일씩이나 무리하게 강행했으니 몸이 더 안 좋아졌을 것일세.”

“……내 평생 다시 그런 연주회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새로 선임된 케르바 슈타인도 훌 륭하고 배도빈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씁쓸한 기분은……

“당연하네. 당연해. 내가 8살 때 처음 들었던 음악이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송년 연주회였네. 지금은 내 아이가 그랬지. 그는 내 삶의 일 부였어.”

“마에스트로를 위하여.”

“마에스트로를 위하여.”

카페 구석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이승희, 나윤희 그리고 소소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거 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칩거한 채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방문을 해도 마치 집에 없는 것처 럼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사카모토 료이치의 연락조차 받지 않았고 그렇게 벌써 4일이 홀렀다.

단원들은 폭군이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걸 감수해서라도 쉬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밀라 앤더슨을 통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안 좋았음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무국은 물론 악장단과 단원들에 게 비밀로 했지만 푸르트벵글러는 28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던 만 큼 몸 이곳저곳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에 계획을 강행했던 단원들의 가 슴은 미어지는 듯했다.

푸르트벵글러가 한 수 접고 건강관 리를 잘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직도 연락 안 되고 있지?”

“도빈이가 가도 대답이 없었대요.”

“할아버지 고집쟁이.”

“진짜. 예전부터 알았지만 그 고집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푹 자고 운동도 하고 담배랑 술도 좀 그만하 면 얼마나 좋아. 다들 자기 걱정하 는데 좀 그렇게 해주면 어디 덧나?”

푸르트벵글러를 탓하는 이승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건드리면 당장에 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멘토이자 음악적 지향점이었던 푸르트벵글러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들은 뒤로 이승희는 무척 감정적이게 되었다.

그것을 잘 알았기에 나윤희와 소소 가 이승희를 위로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감정 은 모든 단원이 공유하고 있었고 이는 은퇴했던 니아 발그레이도 마찬 가지였다.

니아 발그레이는 이른 시간에 방문 한 어린 친구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잘 지내죠?”

“그럼.”

니아 발그레이가 웃으며 귀에 착용 한 기계를 가리켰다.

진달래의 의수를 의뢰하면서 배도빈은 오스트리아의 의학 기술을 접했고 이를 니아 발그레이에게 소개 해 주었다.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한 니아 발 그레이에게도 부담스러운 금액이었지만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으로 청력을 회복할 수 있었기에 망설이 지 않았다.

신경을 연결하는 학문이 발전하고 있었기에 마비가 온 손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건강을 잃고 좌절했던 그에게 새로 운 삶이 주어졌고 그 덕인지 얼굴이 무척 좋아 보였다.

배도빈이 웃어 보였고 니아 발그레 이는 자신의 서재로 배도빈을 안내 했다.

차를 앞에 두고 니아 발그레이가 입을 뗐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무섭던데?”

“세프가 고집부리는 것도 이해하고 단원들도 이해할 수 있어요. 생각보 다 몸이 더 안 좋았던 모양이에요.”

“홈…… 그렇지. 적은 나이도 아니 시니까 조심하시면 좋을 텐데.”

푸르트벵글러와 오래 함께했던 니 아 발그레이는 안타까웠다.

누구보다도 그를 존경하고 아꼈기 에 몸을 잘 추슬러 오랫동안 건강히 활동하길 바랐다.

니아 발그레이 본인이 건강 문제로 은퇴했기에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하고 만나지도 않아요. 제가 가도 답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 왔구나?”

“네.”

니아 발그레이가 작게 웃었다.

“나야 당연히 설득하고 싶지만, 너도 안 만나는데 나라고 만나주실까? 단단히 삐진 것 같은데.”

“저렇게 두면 정말 아예 안 돌아올 것 같아서 그래요. 아마 혼자서 나 쁜 생각은 다 하고 있을 거예요. 배 신당했다느니 자존심이 상했다느니 하면서. 잡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국장님은?”

“카밀라는 출장 갔어요.”

잠시 생각을 하던 니아 발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보자.”

선거 날 이후 푸르트벵글러가 칩거 하면서 케르바 슈타인은 본래 정해 진 임기보다 앞서 상임 지휘자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건강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이만한 업무를 혼자서 감당해 오셨다니.’

헨리 빈프스키와 파울 리히터가 도 와주고 있음에도 케르바 슈타인은 도저히 업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하나의 연주회를 준비하기 위해 지 휘자는 프로그램 결정부터 악단 편 성, 곡 해석, 단원 관리까지 하나하 나 체크하고 있었다.

30년 가까이 같은 일을 반복했다 면 조금은 느슨하게 할 법도 한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단 한 번도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다.

3일에 한 번씩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기 연주회마다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 모습을 봐 왔던 케르바 슈타인 이었기에 최대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처리한 방식대로 운영하려 했으나 막상 직접 상황을 맞이하니 도 저히 계속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거장이라 불리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도빈이도 이랬지.’

사실상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지휘 자인 배도빈 역시 공연마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썼다.

그것을 떠올린 케르바 슈타인이 짧 은 사색을 마치곤 다시 악보에 집중하였다.

지금은 크게 화가 나 있지만 언젠 가는 분명 자신들의 진심을 이해해줄 거라 믿으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안심하고 쉴 수 있도록 그가 쌓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케르바 슈타인과 악장단은 매일 밤 머리를 맞대었다.

* * *

니아 발그레이와 함께 푸르트벵글러를 찾았다.

그의 집에 이르러 초인종을 울렸으나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정말 단단히 화나신 것 같네. 이런 적은 없었는데.”

니아 발그레이의 말에 마음이 무거 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휴양지 로 보내 안락의자에 앉혀 손발을 움 직이지 못하게 묶은 뒤 음식을 먹여 주고 음악을 들려주며 좋은 경치를 구경하게 하고 싶지만 노이어가 그 건 납치라면서 말렸다.

그간 육체적으로도 많이 노쇠해졌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그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니아 발그레이가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접니다. 니아 발그레이.”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니아 발그레이라면 만나줄 거라 생각했는데 내일 다시 찾아오는 수밖 에 없어 보인다.

“어쩔 수 없죠. 여기까지 오신 김에 점심 같이해요.”

“그래. 만나주질 않으시니 방도가 없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푸르트벵글러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채 도진이와 놀고 있다.

“••••••세프?”

“선생님.”

“형.”

푸르트벵글러와 놀고 있던 도진이 가 쪼르르 다가와 인형을 자랑했다.

“대머리 할아버지가 줬어.”

도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푸르트벵글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흥.”

고개를 돌린 푸르트벵글러가 일어 나 계단으로 올라갔다.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어 나도 니아 발그레이도 멍청하게 서 있는데 어머니께서 거실로 나오셨다.

“어머. 발그레이 씨, 오랜만이에요.”

“네. 건강해 보이시네요. 전시회 때 이후로 처음 뵙네요.”

어머니의 회화 전시회 때를 잠깐 언급한 니아 발그레이의 말을 막고 어머니께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세프.”

“아. 하와이에 다녀오셨대. 감사하 게도 이것저것 선물을 가져오셨더 라. 점심 아직이지? 발그레이 씨도 괜찮으시면 같이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오늘 내일은 손님들이 많네.”

당연히 화가 나서 대응하지 않은 거라 생각했는데 여행을 갔었다니.

어머니와 대화를 시작한 발그레이를 두고 계단을 오르자 2층에서 베 이스 소리가 들렸다.

진달래의 방에서 들리기에 가 보니 진달래가 연주하고 있고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으음."

“어때? 나 잘하지!”

“껄껄. 엉망이야.”

“엉망이라니!”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푸르트벵글러와 진달래는 접점이 없었을 텐데 마치 오래 함께한 사이 처럼 친근해 보였다.

“세프.”

푸르트벵글러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대꾸도 안 했다. 단단 히 삐친 모양이다.

“할배, 도빈이가 부르는데?”

“누굴. 날?”

고개를 저은 푸르트벵글러가 진짜 옹졸하게 나왔다.

“난 세프가 아니야. 도빈이가 왜 날 그리 부르겠나.”

“세프.”

“흐음. 자, 어서 다시 연주해 봐라. 엉망이지만 느낌은 있구나.”

“세프.”

“누가 날 자꾸 부르는 거 같은데.”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진달래가 나와 푸르트벵글러를 번갈아 보았다.

나도 조금 화가 나서 쏘아대듯 말했다.

“치사하게.”

푸르트벵글러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이제야 무시하지 않는다.

“뭐가 치사해?”

“그렇잖아요. 다들 걱정하는데 왜 자꾸 고집부리는 거예요?”

“흥. 망할 놈들. 저들끼리 잘하는지 보자. 감히 날 내쫓아?”

“그러니까 쉬라 할 때 쉬었으면 됐잖아요!”

“흥. 30년간 휴가 따위 없었어도 잘만 지냈다. 이제 와서 나이 좀 먹었다고 뒷방 늙은이로 취급해?”

“그게 아니라는 거 진짜 몰라서 그 래요?”

나도 푸르트벵글러도 언성이 높아 지기 시작했고 진달래가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런 것치곤 할배 휴가 엄청 잘 즐긴 거 같은데.”

진달래가 푸르트벵글러의 하와이안 티셔츠와 그 옆에 놓인 사진들을 가리 켰다.

“하와이 재밌었지?”

잠시 말을 멈춘 푸르트벵글러가 헛 기침을 하더니 진달래에게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와이키키란 곳이 말이다.”

“와! 할배 서핑도 할 줄 알아?”

“암. 내가 젊었을 적엔 못 하는 스포츠가 없었지.”

푸르트벵글러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고 진달래는 프로 방청객 수 준으로 반응해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지 금껏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방향으로 사고가 흘러갔다.

‘혹시 좋아하는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