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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10화 (210/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10화

47. 독거노인과 신입사원(1)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 직원들은 비명을 질러대고 싶었다.

찰스 브라움의 대성공으로 인한 여 파로 처리해야 할 일이 갑자기 쏟아 졌기 때문이었다.

자발적으로 추가근무를 하였지만 행정적, 대외적인 일이 여럿 겹치면서 직원들의 책상에는 카페인 음료 가 쌓여가고 있었다.

때문에 상임 지휘자를 결정하는 선 거도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 상 연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푸르트벵글러가 집권한 뒤로 매년 만장일치에 가까웠기에 그 의미가 무색해지기는 했으나 그 상징적 절 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후보자 등록은?”

카밀라 앤더슨이 형식적으로나마 부하 직원에게 물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단원들이 너무나 똘똘 뭉쳐 있었기에 외부 지휘자들은 도 리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꺼려했고 그나마 상임 지휘자에 가장 가까웠 던 니아 발그레이가 은퇴한 이후로 정식 후계자는 배도빈으로 거의 확 정된 사항이나 다름없었다.

푸르트벵글러가 총애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전체가 사랑하는 배도빈이 있으니 푸르트벵글러라는 거대한 성 뒤에 산이 있는 것과 진배없었다.

다른 후보가 생길 리 없거늘.

“아, 여기 있습니다.”

“••••••어?”

카밀라 앤더슨 앞에 세 장의 프로필이 놓였다.

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푸르트벵글러였고 다른 사람들은 케르바 슈타 인을 포함한 악장들이었다.

지금까지 지휘에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악장단이 나섰음에 카밀라 앤 더슨이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무슨 일이지? 물어봐야겠네.’

“잠깐 숨 좀 돌리자.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네.”

카밀라 앤더슨이 악장실로 향했다.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최근 만나는 사람들마다 건강을 물어오는 통 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강철 같던 그의 몸이 비록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단 한 번 쓰러진 것으로 벌써부터 뒷방 노인네 취급을 하니 심기가 불편했다.

퇴근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스 이 안이 푸르트벵글러를 찾았다.

“세프.”

“음. 무슨 일이냐.”

“최근에 우리 많이 바빴잖아요?”

“그랬지.”

‘이 녀석도.’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푸르트벵글러는 한스 이안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 지 알 것 같았다.

쭈뼛거리는 태도로 보아 분명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스 이안이 무엇인 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뭐냐?”

“홍삼이라고 몸에 좋은 거래요.”

쉬라는 말을 했더라면 크게 호통을 쳤을 텐데 그래도 좋은 것을 먹고 힘내라고 응원하는 듯해 푸르트벵글러의 굳은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고맙다.”

“네. 그럼.”

도망치듯 멀어져가는 한스 이안을 보며 푸르트벵글러가 허허 하고 웃었다.

다음 날.

아침에 카밀라의 사무실에 들른 푸르트벵글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밀라의 사무실 한쪽에 몸에 좋다는 식재료와 약재 등이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뭐야.”

“단원들이 전해주래요. 당신 건강을 생각하나 봐요.”

“녀석들……

“당신 생각하는 건 단원들밖에 없죠?”

“껄껄. 기특하지. 아, 이건 네게도 좋을 것 같은데. 같이 먹지.”

“됐네요. 선물 받은 걸 어떻게 나눠 먹어요. 단원들이 다 당신 생각 해서 선물한 거니까 꼬박꼬박 챙겨 먹어요. 운동도 좀 다시 시작하고.”

“요즘은 바빠서 말이야. 시간이 좀 난다면 운동도 하고 그럴 텐데.”

“혹시 또 몰라요? 휴가가 생길지.”

“음? 휴가라니. 무슨 일 있나?”

“아, 아니. 그냥요. 그러니까 휴가 가 주어지면 잘 활용하라고요. 있을 땐 몰라도 없을 땐 절실한 법이니 까.”

푸르트벵글러가 슬쩍 웃으며 카밀 라의 말을 받아들였다.

“오. 편지도 적었구만.”

푸르트벵글러가 가장 위에 있는 선 물을 들어보았다. 그 위에 붙여진 편지를 뜯어 읽었다.

단원들이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 지 물씬 느껴졌다.

‘그래. 녀석들도 결국 날 좋아하니 걱정하는 게지.’

요 며칠간 쉬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 짜증이 났던 푸르트벵글러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참, 내일 선거 있는 거 아시죠?”

“음. 올해는 늦었구만.”

이게 다 콘서트홀 공사랑 확대 편 성, 당신이랑 도빈이 욕심으로 연주 회를 너무 길게 끌어서라고요.”

“껄껄껄. 좋은 일이지.”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 선 푸르트벵글러가 연습실로 향할 때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단원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세프, 이거.”

“음?”

단원들이 푸르트벵글러에게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건넸다.

사이먼 래틀은 푸르트벵글러가 가 장 좋아하는 지휘자였다. 그런 사이 먼 래틀의 베토벤 교향곡, 더군다나 구하기 힘든 오래된 앨범이었으니 푸르트벵글러의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이걸 어디서 구했나?”

“발품 좀 팔았어요. 세프가 좋아하 실 것 같아서요.”

“하하. 그래. 고맙게 듣지.”

푸르트벵글러가 흡족하게 웃었다.

선거 D-day 하루 전.

퇴근을 하고 모인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좋은 뜻에서 모의한 일이긴 하지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어떻게 반응 할지는 눈에 선했다.

전세를 내다시피 한 레스토랑에서 단원들은 식사를 코로 하는지 입으로 하는지 몰랐다.

“어쩌지?”

“어떡하긴. 해야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그래서 선물 공세 했잖아.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쉬시라 했는데도 계속 무리하시잖아.”

“세프 상처받으면 어쩌죠?”

“네 아이디어였잖아.”

“끄윽. 잘못했어요……

“상처만 받으려고? 아마 우리를 다 죽이려 하실걸?”

나윤희가 바들바들 떨었다.

“걱정 마. 한두 달쯤 푹 쉬게 해드 리고 다시 모셔오자고.”

“안 돌아오신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카밀라 국장님이 잘 달랜다고 했어. 국장님이 악단주님한테도 얘기 했다나 봐.”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얼마나 화낼지는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들어온 지 6개월도 안 된 단원들 마저도 짧게나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알기에 도리어 고참들보 다 더 무서워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야. 고집 부리니 까 이러는 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최고참급에 속한 마누엘 노이어가 단원들을 달랬다.

다음 날.

푸르트벵글러는 자신 외에 후보자 가 있다는 것에 꽤 놀랐다.

30년 가까이 재임했고 최근 몇 년 간은 단일 후보였으니 관심이 적어 질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필 사무국의 업무가 과도하 게 늘어나면서 카밀라 앤더슨의 개 혁으로 선거는 간략하고 효과적으로 개편되었는데 변하지 않는 원칙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실력.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직 에는 다른 어떠한 부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오로지 단원들이 인정하는 실력자 만이 앉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공 약과 같은 것은 일절 받지 않았다.

둘은 즉시 개표.

160명의 단원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가운데 사무국 안내 위 원들이 신분을 확인하고 투표용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무슨 생각들이야?’

푸르트벵글러는 프로필로 올라온 악장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배도빈, 찰스 브라움, 소소를 제외 하면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 들은 모두 푸르트벵글러가 키워낸 인물들이었다.

현재는 은퇴한 니아 발그레이와 런 던으로 넘어간 레몽 도네크를 포함해 케르바 슈타인, 헨리 빈프스키, 파울 리히터까지 다섯 명의 악장은 푸르트벵글러의 아이라고 불리던 때 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악장들도 경력이 오래되고 세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푸르트벵글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자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선거에 나서자 푸르트벵글러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 니었다.

“도빈아.”

“네.”

“무슨 이야기 들은 거 없느냐.”

“무슨 이야기요?”

푸르트벵글러가 벽에 붙여진 포스 터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악장들이 선거에 나선 것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하고 싶었나 보죠.”

“음?”

꽤나 심각하게 물었거늘.

배도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 자 푸르트벵글러가 머쓱해졌다.

이윽고 투표가 모두 진행되고 곧장 개표식이 시작되었다. 악단주가 친 히 나와 개표를 했고 대형 스크린에 관련 내용이 시시각각 표시되었다.

악단주가 첫 번째 용지를 꺼내서 사람들에게 보였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순간 회장이 어수선해졌다.

‘당연한 걸 가지고 왜들 이래?’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의 이름이 호 명되자 저마다 속닥이는 단원들을 둘러보고는 생각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몇십 번이나 반 복되었던 일이었기에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리나 개표가 진행됨에 따라 푸르트벵글러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하였다.

개표가 마무리되고 네 명의 후보가 얻은 표가 전광판에 각인되었다.

회장은 차갑게 식었고 오로지 푸르트벵글러의 주변에 지옥불이 타오르는 듯했다.

케르바 슈타인(득표 수: 92) 당선 헨리 빈프스키(득표 수: 47) 파울 리히터(득표 수: 20)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득표 수: 1)

믿었던 악단주가 헛기침을 하며 도 망치듯 회장을 빠져나갔고 카밀라 앤더슨이 그를 붙잡기 위해 따라나 선 뒤.

회장은 더욱 조용해졌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딴에는 작게 말한 듯한데 너무 도 고요해 그 말만은 정확히 모두의 귀에 전해졌다.

“세프, 세프가 찍은 거겠지?”

그 말과 동시에 주변 단원들이 그 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치겠네.’

‘아니, 그래도 몇 명은 찍었어야지.’

‘망했어. 망했다고.’

몇 분간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 지 못한 채 고요함이 팽팽하게 유지 되었다.

순간 푸르트벵글러가 자리에서 일 어났다.

다들 이어서 들려올 호통에 가슴을 졸였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조용히 문으로 향했다.

문이 굳게 닫히고 너나 할 것 없이 단원들이 패닉에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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