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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06화 (20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06화

    45. 왕좌(10)

    푸르트벵글러의 말을 들은 사카모토는 잠시간 고민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 외적인 일 때문에 걱정되는 건가.”

    “그래. 그 아이의 순수함을 생각하 면 가슴이 너무도 아프네. 돈 밝히는 꼬맹이라고, 단원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고집쟁이라고 하지만 난 음악에 있어서 도빈이보다 순수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 그 아이를 지켜 주고 싶네만 곁에 두고 싶네만.”

    푸르트벵글러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늙은 몸과 너무도 거대하고 방대하게 펼쳐진 방해물이 마음에 걸렸다.

    사카모토 료이치가 슬쩍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푸르트벵글러가 그의 벗을 보았고 사카모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도빈 군만큼 순수한 음악가도 없을 거라고. 나 또한 그리 생각하네. 아름다운 음악을 하기 위해 도빈 군은 그 어 떤 일이라도 해결해 나갈걸세. 우리 보다도 더 간절하지 않은가.”

    “도빈 군이라면 세 살 때부터 봐왔네. 처음에는 그 천재성에 놀랐지.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그 누구보다도 노력가였지. 세상 모두 가 그를 천재라 하지만 난 그 말이 도리어 도빈 군을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지더군.”

    “그렇지.”

    “그런 도빈 군을 알게 되니 기특하기도 하면서도 안타깝더군. 매번 경 이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야 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음악에 쏟아붓고 있지 않은가. 자네 말대로 그 누구보다 순수해.”

    “그래서 걱정이란 말이야. 그런 아이가 다른 무엇도 아닌 멍청한 작자 들로 인해 자칫 엇나가는 것이.”

    사카모토 료이치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나와 자네가 젊었을 적과는 다르니 까.”

    푸르트벵글러가 눈썹을 좁혔다.

    “무엇이.”

    “도빈 군이 왜 인류의 희망이라 불 리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사카모토 료이치가 배도빈을 가장 높이 사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을 향 한 한국인의 반감은 뿌리 깊게 박혀 있네. 일본이 제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진실 된 사과를 하지 않는 한 한국인은 결코 용 서하지 못할걸세. 그런데 일본이 가 장 힘들 때 입학조차 하지 않은 한국 아이가 손을 뻗었지. 부끄럽지만 일본 정부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어. 하지만 국민들은 분명 기억하고 있네. 지금도 방사능이 가득한 농산 물을 자국민에게 팔아먹으려는 잔악 한 무리보다 도빈 군에게 더욱 감사 하고 있지. 그뿐인가? 유럽에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도빈 군이 빈곤층에게 생활비와 교육을 지원해 주었지.”

    “……오지랖 넓은 성격은 알고 있었지.”

    사카모토 료이치가 고개를 저었다.

    “히무라 군이 내게 하소연한 적이 있었네. 도빈 군이 대한민국 빈곤층 에게 기부하는 돈이 1년에 100만 달러라고.”

    그 말을 들은 푸르트벵글러가 마시던 탄산수를 뿜을 뻔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이 받는 연봉은 현재 평균 10만 유로, 달러화 로는 약 11만 달러였다.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최대 주주로 인한 수익이 있고 배도빈의 음반 판 매량과 저작권 수입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연간 100만 달 러라 한다면 수입의 대부분이라 생 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생각 은 정확했다.

    “도빈 군은 개인 수입의 대부분을 그런 데 사용하고 있네. 자기 가족 이 지낼 돈을 제외하곤 대부분 다시 베풀고 있어. 뿐만인가? 아프리카와 남미에는 아예 도빈 재단이 들어서 학교를 설립하고 식량을 제공하고 있지. 한 사람이 전 세계 모든 빈곤 층을 돌보려 하는 듯이 말이야.”

    “어리석은 짓.”

    “아니. 그렇지 않네, 빌헬름. 난 도빈 군의 음악 끝이 항상 희망차게 끝나는 것이 그의 진심이라 생각하 네. 멍청하고 무의미한 일이라 생각 되는 일을, 도빈 군은 벌써 14년째 계속해 오고 있네. 사람들은 그를 인류의 희망이라 부르고 있지.”

    “더군다나 재능 있는 음악가들을 발굴해 육성하고 직접 스카우트하고 있지. 그들 모두가 도빈 군의 힘이 라네.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알아. 하지만 나는 믿네. 도빈 군이 뿌린 씨앗이 반드시 그 무엇보다 그 에게 큰 힘이 되어 주리라 말일세.”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에 푸르트벵글러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중에는 자네와 베를린 필하모닉 도 있지 않은가. 걱정할 필요 없네, 빌헬름.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도빈 군과 베를린 필은 훨씬 더 굳건 하다네.”

    푸르트벵글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입가에 담긴 작은 미소만이 그의 기분을 표현할 뿐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확대 편성된 뒤 첫 연말 연주회 당일이었다.

    언제나 만석을 채웠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티켓 파워는 세간의 몇몇 이 야기 따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뉴튜 브, 웹플릭스,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 털 콘서트홀 세 개 플랫폼에서 4달 러를 지불하여 관람할 수 있었고 그렇게 모인 웹 시청자는 공연 시작 전, 동시 시청자 수 2천만 명에 도 달해 있었다.

    저가이지만 유료 서비스임을 감안 했을 때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에 대한 전 세계 팬들의 관심이 얼 마나 큰지 알 수 있는 기록적 지표였다.

    곧 첫 번째 무대가 준비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B가 무대 위에 올라서 케르바 슈타인의 지시로 음을 조율했고 이어 독주자 찰스 브라움과 지휘자 배도빈이 등장했다.

    베를린 환상곡 이후 약 10개월 만 의 신곡이 발표되는데 그것이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찰스 브라움을 위한 헌정곡임이 알려지면서 관 객과 시청자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

    배도빈이 관객들의 박수를 뒤로하 자 장내는 마치 아무도 없는 듯고 요해 졌다.

    조명이 모두 꺼지고.

    빛이 배도빈과 찰스 브라움에게만 떨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뿜은 찰스 브라움이 배도빈에게 시선을 준 뒤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배도빈 바이올린 협주곡 13번, 도장 조. 찰스 브라움.

    1악장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 O Cantabile: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 듯이).

    산들거리는 바람을 타고 파이어버 드의 깊은 음색이 객석에 전해졌다. 섬세하게 다룬 음이 활기찬 산새처 럼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장난을 치는 듯했다.

    배도빈이 손짓하자 플루트가 바람 처럼 노래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과 함께 어울려 오전의 활 기찬 숲을 표현하는데 때때로 트럼 펫이 추임새를 더했다.

    이어 모든 악기가 산새처럼 날아다 니는 바이올린을 뒤쫓기 시작했고 플루트는 바람이 되어 파이어버드를 인도했다.

    아기자기한 동화가 펼쳐졌다.

    ‘좋다.’

    객석에 앉은 진달래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밝고 기운찬 음표들이 흥겹게 날아 들어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좋나 보네.’

    진달래가 슬쩍 옆에 앉은 배도진을 보았다. 아주 살짝 엉덩이를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배도진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한편 사카모토 료이치는 뜻밖의 분 위기에 잠시 놀랐다.

    지금까지 격렬하다 못해 폭력적이 기까지 했던 배도빈의 풍과는 사뭇 다른 곡이었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느낌의 1악장은

    마치 그를 유년 시절로 되돌려 놓는 듯했다.

    ‘편안한 곡이구만. ……그도 아닌가.’

    1악장의 마지막에 들어 조금씩 무 거워지는 음을 들으며 사카모토 료이치는 역시 배도빈의 곡이라 생각 했고.

    이어지는 2악장의 분위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2악장 안단테 콘 테네레차(Andante Con Tenerezza: 천천히 우아하게).

    2악장에 들어 파이어버드는 본연의 음색을 보다 확실히 드러냈다. 천천히 늘어지는 음속에서 찰스 브라움의 뛰어난 표현력이 빛을 발하는 순 간이었다.

    배도빈의 지휘 아래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천천히 산경을 표현한다.

    첼로와 비올라가 나무를.

    콘트라베이스가 산을 그리듯 자연 스럽게 분위기를 확장시켜 나갔고 플루트와 오보에만이 템포를 빠르게 가져가다 때때로 천천히 잦아들며 바람을 표현했다.

    배도빈이 팀파니스트 디스카우에게 시선을 주며 지휘봉을 올리자 그가 간격을 길게 두고선 팀파니를 울리 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묘한 긴장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찰스 브라움의 카덴차가 시작되었다.

    음이 치솟았다.

    나뭇잎을 헤치고 솟구친 산새가 푸른 하늘을 향해 날개를 퍼덕인다.

    힘차게.

    더 높이.

    열기를 더해 가속하는 시위를 통해 관중과 시청자들은 마치 귓가에 파 이어버드의 날갯짓이 울리는 듯했다.

    ‘과연 찰스 브라움인가.’

    푸르트벵글러의 초청으로 베를린 필 연말 연주회에 참관한 지휘자 칼 에케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차 한계까지 끌어올린 빠른 박자를 이토록 정확하고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몇 없었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아니라 너무 도 맑은 음이 이어짐에 칼 에케르트와 관객들은 점차 ‘찰스 브라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긴 간격을 두고 소리를 내던 팀파 니가 바이올린과 같은 템포로 따라붙으며 긴장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오보에와 플루트가 슬프게 울어 가 슴을 옥죄고 나무와 산을 이룬 첼 로, 비올라, 콘트라베이스가 울기 시 작하는데.

    그에 따라 힘차게 날아가던 파이어 버드가 조금씩 지쳐갔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던 새가 마침 내 멈추었고.

    이내 추락하며 2악장이 끝났다.

    잠깐의 간격은 고요했다.

    ‘음.’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배도빈의 지휘와 그가 작곡한 ‘찰스 브라움’은 완벽했다.

    배도빈답지 않게 무척 밝고 활달한 1악장은 사람들의 가슴을 편안케 했고 그에 대비되어 느린 템포의 2으I 장은 점차 분위기를 고조시키더니 찰스 브라움의 카덴차로 인해 격정 에 이르렀다.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부족하단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단원들은 한마음으로, ‘악기’로서 배도빈의 곡을 노래했다.

    세기의 천재가 이끄는 오케스트라가 혹평을 받았기에 그들 스스로가 분발했던 덕분이었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쓰러진 뒤에 마음을 다잡 은 베를린 필하모닉 B는 어느새 폭 군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감정을 잡은 배도빈이 지휘봉을 들었다.

    그가 눈을 뜨자.

    베를린 필하모닉 B는 그의 눈동자 에 빨려들어 가는 듯했다. 자신들을 향한 그 깊은 눈.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뜨거운 눈빛 에 동조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완벽하다 하지 만 탐미하는 그는 지칠 줄 몰랐고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가장 먼저 연습실에 들렸고 가장 늦게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단원 한 사람, 한 사람 곁에서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내 주었으며 기다려주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단원은.

    비올라를 연주하는 단원은.

    첼로를 연주하는 단원은.

    모든 단원은 그들의 부족함으로 이 신이 내린 보석이 빛을 잃기 바라지 않았다.

    함께 빛나고 싶었다.

    배도빈이라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라는 빛나는 이름과 함께하고 싶다.

    그런 마음과 함께.

    배도빈이 지휘봉을 내리자 팀파니 와 트럼펫이 웅장하게 막을 열었고 그 순간.

    관객들은 등을 의자에 파묻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마왕이 비로소 자신의 수족을 얻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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