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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05화 (20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05화

    45. 왕좌(9)

    내일은 연말 연주회가 있으니 잠을 푹 자둘 생각으로 저녁 산책을 다녀 왔다.

    소소와 나윤희도 저녁을 먹고는 자 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최지훈과 채은이가 도진이와 놀아주었다.

    방으로 돌아와 향초를 피웠다.

    샤워를 하니 몸이 나른하다.

    머리를 말리며 퇴근 전 카밀라가 전해준 박스를 꺼냈다.

    잔뜩 쌓인 팬레터를 읽는 일만큼은 미룰 수 없는데 이제는 하나하나 답 장을 못 해주는 게 아쉬울 뿐이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편지 봉투 중 에 노란 봉투가 눈에 띄어 열어보니 한 면 가득 채운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베를린 필 악장 배도빈에게

    힘차고 정갈한 필체다.

    겨울의 베를린은 여전히 추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은평구에 사는 두 딸을 가진 아빠입니다.

    젊었을 적 음악을 하다 지금은 공 사장을 전전하고 있는데 몇 년 전부 터 딸들이 클래식 음악에 흠뻑 빠졌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나이의 두 딸은 영 화를 통해 ‘가장 큰 희망’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당신의 팬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음악이 나오는 지금, 오케스트라 음악을 듣는 아이들이 신기 하기도 하고 저도 소싯적의 기억을 떠올리며 딸들과 함께 당신의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습니다.

    삭막했던 우리 가족에게 당신의 힘 차고 격렬한 음악은 큰 힘이 되었고 비록 지금은 어렵지만 언제고 반드 시 가족들과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서 당신이 지휘하는 연주 회에 가고 싶습니다.

    최근 몇몇 사람이 당신과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아이들이 말해주었습니다.

    부디 힘을 잃지 않고 굳세게 그 자리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당신의 음악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힘내세요, 베를린의 마왕.

    편지를 읽고는 잠시 아무 일도 못 했다. 생계가 힘들어 보이는데 내 음악이 힘이 된다니 목 언저리가 꽉 조이는 듯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전문 기술이 없는 한 노동을 해서 가정을 이끄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반드시 찾아오겠다는 말에 베를린 필하모닉을 굳세게 지켜야겠다고 다 짐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편지를 읽고 있는데 카밀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일까 싶어 바로 받았다.

    “네, 카밀라.”

    -도빈아.

    카밀라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울음을 참아내듯 힘겹게 말했다.

    -빌이. 빌이 쓰러졌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카밀라는 대답하지 못하고 결국 울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에요?”

    몇 번을 다그쳐 물은 뒤에야 카밀라가 겨우 진정하였다.

    -샤리테 대학 병원이야.

    “지금 갈게요.”

    서둘러 외투를 둘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1층에서 어머니와 집사를 만났다.

    어머니께서 걱정스레 다가와 물으셨다.

    “무슨 일이니? 창백해져서는.”

    “푸르트벵글러가 쓰러졌대요.”

    어머니께서도 놀라셨다.

    “저 먼저 가볼게요. 소소와 윤희 누나한테 다른 단원들에게 연락해 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 샤리테 대학 병원이에요.”

    “그래. 걱정 말고 다녀와.”

    어머니께 부탁을 하고 신발을 대충 신었다.

    “집사님.”

    1층을 둘러보았는데 방금까지만 해 도 보였던 집사가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바로 나오시면 됩니다.”

    고맙게도 내 말을 듣고 바로 나섰 던 모양. 차에 올라탔다.

    ‘안 죽는다 했잖아.’

    병원으로 향하는 몇 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도착했습니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돌아가 계세요. 전화 드릴게요.”

    서둘러 차에서 내리고 응급실로 뛰었다.

    정확한 위치까지는 듣지 못해 한참을 돌아다녔는데 복도에 케르바 슈 타인과 찰스 브라움, 헨리 빈프스키, 파울 리히터 그리고 마누엘 노이어 가 있었다.

    “도빈아.”

    “세프는요?”

    노이어가 고개를 돌려 병실을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케르바 슈타인이 짧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심각한 건 아니래. 단순 과로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놀랄 수 밖에 없었을 테지만.”

    그 말을 들으니 그나마 안도가 되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워 있는 푸르트벵글러와 그의 손을 꼭 잡고 울고 있는 카밀라를 볼 수 있었다.

    “세프.”

    푸르트벵글러가 나를 보더니 인상을 썼다.

    “설마 단원들 모두 오는 건 아니겠지? 왜 다들 난리야?”

    “어떻게 된 거예요?”

    카밀라가 눈물을 훔치고 돌아섰다.

    “그간 너무 무리한 것 같아. 신경 쓸 일도 많았고.”

    “나이 먹으면 그럴 수도 있는 게 지. 신경 쓸 것 없다. 내일은 중요 한 날이니 돌아가 쉬어라.”

    푸르트벵글러에게 다가가 그의 얼 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간 A와 B로 나뉘어 자주 못 봤는데 확실히 많이 야위었다.

    “이, 이거 무슨 짓이냐.”

    “왜 이리 수척해졌어요.”

    왼쪽 얼굴도 오른쪽 얼굴도 볼이 쏙 들어가 있다. 눈 아래가 짙은 걸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다.

    “이 녀석이! 손 놓지 못해!”

    “세프••••••

    안쓰럽게 그를 보고 있자 푸르트벵글러가 내 손을 잡아 내리고 카밀라 에게 말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 들어오라 해.”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악장들을 불러들였다.

    푸르트벵글러가 잠시 눈을 감고 생 각을 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

    “당분간 쉬어야 한다더라. 연말 연주회 뒤에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케르바 슈타인이 나섰다.

    “그 말씀은 이 상태로 내일 지휘를 하신다는 뜻입니까?”

    “그럼. 팬들이 오는데 취소라도 하란 말이냐?”

    케르바 슈타인이 나를 보았다.

    “다른 일도 아니고 건강 문제입니다. 배도빈 악장도 저도 있습니다. 내일은 저희에게 맡기고 쉬세요.”

    푸르트벵글러 가 으르렁 댔다.

    “내 일이고 팬들과의 약속이다. 그 런 말 다신 하지 마라.”

    케르바 슈타인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푸르트벵글러는 고집을 부렸다. 그것이 그다운 행동이라고 생각 하면서도 나도 걱정이 되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나를 보았다.

    “네가 내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 도빈아.”

    “……할 거예요.”

    “그래.”

    악장들을 둘러본 푸르트벵글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하지만 목소리가 꽤 지쳐 있다.

    “우리에겐 중요한 시기다. 내년은 너희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탱해야 하니 마음 굳게 먹길 바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악장단과 마 누엘 노이어가 답했다.

    “네, 세프.”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하게 문을 바라보았고 곧 단원들이 물밀듯 이 들어왔다.

    “세프!”

    “죽으면 안 돼요!”

    “꺼어허억! 끄으헝!”

    침대에 누워 있는 푸르트벵글러에 게 달려든 단원들이 눈물을 쏟으며 달려들었고 그들을 본 푸르트벵글러 가 호통을 쳤다.

    “당장 안 나가!”

    병실을 나온 뒤 카밀라가 단원들에 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향한 공세가 시 작된 뒤로 푸르트벵글러는 여러 방 면에서 자신의 권위와 역량을 발휘해 여러 집단을 규합했다고 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베를린파의 중 심으로 있을 수 있었던 데에는 거장 중의 거장이라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덕분인 것 같다.

    당연하게도 푸르트벵글러에게 부담 되는 대외적 업무가 갑작스레 늘어 났고 베를린 필하모닉도 확대 편성 하였으니 쓰러지는 것도 무리는 아 니란 생각이 들었다.

    단원들은 예전보다 훨씬 나은 근무 환경에서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지 만 정작 푸르트벵글러 본인은 그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자신을 더욱 몰아붙였던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왕.

    말뿐만이 아니라 몸소 자신의 왕국을 지켜왔던 것이다.

    “세프가……

    푸르트벵글러다운 이야기라 다들 숙연해졌다.

    그러나 내일 공연이 중요했기에 다 들 해산했고 소소, 나윤희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B팀을 온전히 내가 맡는 것으로도 푸르트벵글러의 부담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은 괜찮더라도 언젠가 분명, 멀지 않은 날에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

    주먹을 꽉 쥐었다.

    가장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푸르트벵글러가 얼마나 많은 일을 부담하 고 있었는지 몰랐던 내게 화가 났다.

    더 이상 그가 혼자 싸우게 두지 않을 거라고.

    가슴에 새겼다.

    거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입원 소식은 감출 수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말 연주회 당일, 베를린은 물론 유럽 전 지역에 해당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베를린 필의 사무국은 끝없이 이어지는 문의 전화에 대응해야 했고 카밀라 앤더슨은 겨우 정신을 차린 채 점심을 지나기 전, 기자회 견을 열어 일정과 출연진에 변동이 없다고 일축하였다.

    최근 들어 여러 거장이 타계하였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역시 적지 않은 나이였기에 다들 우려하고 있는 사이, 베를린 필의 연말 연주회를 듣기 위해 사카모토 료이치가 베를린에 방문했다.

    공항에서 소식을 접한 사카모토 료이치는 즉시 푸르트벵글러의 자택으로 향했다.

    “빌헬름! 빌헬름!”

    사카모토 료이치가 다급히 문을 두 드렸고 한참 뒤 푸르트벵글러가 귀찮다는 듯 문을 열었다.

    “귀찮게 왜 또 왔어?”

    푸르트벵글러의 얼굴을 확인한 사카모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마지막 연주회가 될 수도 있다고 해서 왔지.”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푸르트벵글러가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서 사카모토 료이치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 병원에서는 뭐라 하던가.”

    “정말 단순 과로일 뿐이야. 며칠 쉬면 나아지니 걱정 말게.”

    사카모토가 소파 옆에 놓인 수액과 주사기를 보고서는 씁쓸히 웃었다.

    “담배도 끊어. 나이 먹어서도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으니 그런 거 아 닌가.”

    “잔소리 할 거면 돌아가.”

    틱틱 대지만 오랜만에 사카모토를 만나 기분이 좋아진 푸르트벵글러가 그가 좋아하는 음료를 내놓았다.

    “유진희 씨가 준 매실청이란 것을 탄 탄산수야. 맛이 좋더군.”

    “매실청이라. 좋지.”

    음료를 마시며 잠시 정원에 시선을 둔 푸르트벵글러가 사카모토에게 물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도빈이는 뭘 바라는 것 같나.”

    “음?”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카모토 료이치가 잠시 고민하다가 허허 하고 웃었다.

    “즐거운 음악을 하는 걸로 족할 것 같은데 말일세.”

    “그런가.”

    간격을 두었다가.

    다시 말을 붙였다.

    “베를린 필에서의 녀석은 어떤가.”

    “보기 좋네. 혼자서 있던 때랑은 다르게 활발해 보여 좋네만. 그건 왜 묻는가.”

    “글쎄. 여러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사카모토 료이치는 굳이 묻지 않았다. 느긋하게 기다리면 알아서 말해 줄 거라 여기며 매실청을 섞은 탄산 수를 마셨다.

    마침내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열었다.

    “난 도빈이가 자유로워졌으면 싶네. 런던이니 베를린이니 인터플레 이 같은 거지같은 놈들에게 신경 쓰 기엔 너무나 아까워. 그래서.”

    잠시 말을 멈춘 푸르트벵글러가 남은 음료를 모두 털어 넣었다.

    “그래서 녀석이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되는 게 옳은 일인가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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