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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04화 (20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04화

    45. 왕좌(8)

    하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들어가 려는데 마침 채은이가 엘리베이터에 서 내렸다.

    “오빠!”

    평소보다 묘하게 목소리가 높다.

    “응.”

    “나 부탁이 있는데……

    “부탁?”

    생전 내게 부탁한 적이 없었기에 의아했다. 되물어 보니 채은이가 고 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이번에 신곡 연습 마무리되었지?”

    신곡이라면 찰스 브라움을 말하는 걸 테고 이미 마지막 연습만 남은 상황이다.

    “응. 그런데?”

    “나 연습실 데려가 주면 안 돼?”

    “안 돼.”

    “연주회 전까지는 절대, 절대 기사

    안 쓸게. 응?”

    “안 돼.”

    연말 연주회에서 신곡을 발표하는 건 여러 매체를 통해 홍보했지만 곡 은 철저히 관리했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물어본 걸 보면 채은이도 그걸 의식하는 것 같은데 녀석을 믿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내가 주도해 대외비로 다뤘던 일을 내가 부정해 버리는 꼴이 되니 말이다.

    채은이도 더는 조르지 않았다.

    “왜 그러는데?”

    “나 글 쓰는 속도가 느리잖아. 베를린 환상곡 분석도 일주일 뒤에나 기사로 썼고. 자꾸 발표가 늦으니까 이상한 인간들 말이 더 먹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 네 글 은 비교적 정확하니까.”

    “그런 건 아는 사람들만 그렇게 생 각한단 말이야. 그치?”

    채은이가 최지훈을 보며 동조를 구 했다. 의외로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요즘 인터플레이 쪽 평론가 들이 지나치니까 이런 것도 필요할

    것 같아. 굳이 채은이가 아니더라도 그쪽 일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왜 쓸데없는 말을 해!”

    채은이가 최지훈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푸르트벵글러도 비슷 한 말을 했고 생각해 볼 여지는 있는 듯하다.

    그의 말대로 음악가로서의 내 고집 과는 무관하게 지휘자로서는 단원들 이 연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할 테니 말이다.

    ‘협연 이후에 묘하게 다들 바짝 약 이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최근 계속된 헛소리들에 단원들의

    신경이 예민해져 풀어줘야 하는 건 알면서도 방법을 모르겠다.

    “이번에는 악단과 이야기한 일이라 안 돼. 다음에는 생각해 볼게.”

    채은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인터플레이 말이야.”

    최지훈이 뭔가를 떠올린 듯 말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인터플레이 관련해서 무 슨 일을 하시나 봐. 정확히는 가르 쳐 주시지 않는데 그게……

    말끝을 흐려 의아하게 보니 최지훈 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되게 즐거워 보이셨어.”

    영국 헤이스팅스에 위치한 인터플 레이의 자회사 레독은 녹음, 음향기 기를 다루었다.

    최근 인터플레이 소속 오케스트라 에 제공할 혁신적인 설비를 준비 중 에 있기에 케이 볼튼 대표는 무척이 나 바쁘게 움직였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어서 오시오, 통스 뒤샹.”

    케이 볼튼이 얼마 전 파트너십을 맺은 통스 뒤샹을 반갑게 맞이했다.

    프랑스 출신의 개발자이자 사업가 인 통스 뒤샹이 개발한 녹음 기술은 인터플레이가 주목할 정도로 대단한 성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인터플레이는 그들의 음향 장비와 통스 뒤샹의 기술이 결합된다면 세 계 최고 수준 품질로 음악 서비스를 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고액을 지불하여 통스 뒤샹 의 기술과 그의 회사를 인수한 레독 은 오늘부터 기술 이전을 위해 여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 공정 과정은 어떻게 되었소.”

    “간소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품질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단 낫겠지요.”

    “하하하. 옳은 말이오. 하지만 결코 늦어서는 안 될 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케이 볼튼은 통스 뒤샹이란 남자가 퍽 마음에 들었다.

    보통 개발자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제품이나 기술에 대해 독점 욕 심을 내 스스로 어떻게든 팔아보려 하지만 케이 볼튼은 그렇게 성공한 인물을 보지 못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인터플레이와 같이 대기업에 붙어 사업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협력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통스 뒤샹이란 사람은 쓸데없는 고 집 없이 흔쾌히 레독에게 핵심 기술 과 회사를 팔았고, 대신 본인을 자 문 역할로 받아들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다루기 쉬운 친구야. 유능하고.’

    “그럼 저는 잠시 둘러본 뒤 돌아가 보겠습니다.”

    “음음. 그렇게 하시오.”

    통스 뒤샹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서자 사무실에 남은 케이 볼튼이 만족스럽게 시가에 불을 붙였다.

    한편 헤이스팅스에서의 일을 마친 통스 뒤샹은 자신의 차에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발신음 뒤에 전화가 연결 되었다. 통스 뒤샹이 능숙한 솜씨로 한국어를 사용했다.

    “접니다, 보스. 레독과의 일은 잘 처리하였습니다.”

    -아, 수고했네. 시간은 잘 벌었는가?

    “네. 지시하신 대로 고정 과정을 간소화할 수 있다고 하니 며칠 더 말미를 얻었습니다.”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건 좋은 일 이지. 물건은 오늘 도착할 테니 마 무리까지 잘 부탁하네.

    “네. 차질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교 체 시기는 내년 2월부터 3개월로 잡혀 있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그 말에 통스 뒤샹이 멋쩍게 웃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통스 뒤샹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_참.

    통화를 나누던 통스 뒤샹의 또 다른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80만 유로가 입금되었다는 알림을 확인한 통스 뒤샹의 입이 찢어질 듯했다.

    “감사합니다.”

    -유능한 동료에게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수고하게.

    통스 뒤샹이 차에 시동을 걸고 물 건이 도착하기로 한 이스트본으로 출발했다.

    ‘똑똑하고 돈 밝히는 사람보다 다 루기 쉬운 사람도 없지.’

    통스 뒤샹과 통화를 마친 최우철은 슬며시 웃었다.

    유장혁 회장과 손을 잡은 그는 WH그룹에 플랫폼 사업을 진행하면 서 인터플레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지반이 무너지면 쓰러지게 마련인데 인터플 레이도 어쩔 수 없군.’

    최우철은 그가 준비하고 있는 일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목적은 인터플레이를 무너뜨리고 유럽 전역과 미 동부 지역에 새로운 플랫폼을 세우는 일인데.

    수단은 여러 가지였다.

    하나는 통스 뒤샹 등 유령 회사를 내세워 WH그룹의 우수한 기술력을 인터플레이의 기반 시설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불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최우철이 EI전자의 부장으로 있었을 시절에 여러 중소업체나 경쟁사를 무너뜨렸던 방법이었고 그런 비열한 수법들이 최우철이 결국 사장 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근거였다.

    통스 뒤샹을 통해 모든 기기 제품을 교체하면 그 뒤부터 인터플레이 의 음향 설비는 세계 최악이 될 예정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인터플레이 가 통스 뒤샹에게 책임을 물으려 할 때는 이미 유럽에서 그를 찾을 수 없게 되고.

    모든 기기를 교체, 수리하기 위해 선 통스 뒤샹이 일한 시간 이상으로 소요될 것이 뻔했다.

    현재 여러 악단과 음악가들에게 가 장 중요한 음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등에 문제가 생긴 인터플레 이에 소속 음악가들이 항의할 것은 당연한 수순.

    그때 인터플레이 소속 음악가들의 불만을 터뜨릴 기폭제도 준비해 두었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최우철이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무슨 일인가.”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 앤드류 제이 조정의원과 베를린 필하모닉 카밀라 앤더슨 사무국장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정중히 모시도록.”

    이내 집무실에 들어온 두 사람을 최우철이 반갑게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몇 달 전, 배도빈이 헌정곡이라며 악보를 넘겼을 때 찰스 브라움은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에게 곡을 받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의 그 누구 도 찰스 브라움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악장이 불쌍해요.”

    “저걸 안 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해요. 찰스 브라움 악장이 아니고서 야 누가 이걸 연주할 수 있겠어요?”

    단원들의 생각을 찰스 브라움이 모를 리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악장으로 취임 한 뒤 찰스 브라움은 배도빈이 만들 어 준 바이올린 협주곡 13번, 도장조 ‘찰스 브라움’을 연습하는 데 대부 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 난이도는 극상.

    처음 악보를 받았을 때 찰스 브라움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건 날 위한 곡이 아닌 거 같은 데……

    “ 맞아요.”

    “……이거 연주할 수 있는 곡 맞아?”

    “글쎄요. 하지만 찰스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글쎄요라니.”

    “전 안 켜봤거든요.”

    그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배도빈의 눈은 너무도 당당하게 찰스 브라움에게 향했다.

    그는 시선을 피하듯 다시 한번 악보를 살폈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빽 빽하게 들어선 음표들을 보고선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

    베를린 필하모닉 연말 연주회, 즉 ‘찰스 브라움’의 초연을 하루 앞둔 지금 찰스 브라움의 몸은 비명을 지 르고 있었다.

    ‘나니까 가능했지.’

    ‘찰스 브라움’을 완벽히 마스터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목욕을 마친 그가 가운을 둘렀다.

    라임을 반으로 잘라 탄산수에 짜낸 뒤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배도빈이 추천한 온수 목욕으로 인 해 노른노른한 기분에 취한 찰스 브라움은 채널을 돌리며 라임 탄산수를 들이켰다.

    청량감이 몸을 누볐고 때마침 무릎 위로 올라온 고양이 엘리자베타의 엉덩이를 긁어주었다.

    ‘볼 게 없군.’

    채널을 돌리다 지친 찰스 브라움은 조금 이르지만 잠을 청할까 고민했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으로 전화를 건 사람이 케르바 슈타인임을 확인한 찰스 브라움이 스피커 모드로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인가, 케르바 슈타인. 전야제라면 사양하겠네.”

    -……세프가 쓰러지셨네.

    그 순간 찰스 브라움이 잔을 놓쳤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의 유리잔이 깨졌고 깜짝 놀란 엘리자베 타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찰스 브라움은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나도 방금 연락받았네. 샤리테 대 학 병원으로 와주겠나?

    “바로 가지.”

    통화를 마친 찰스 브라움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배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발신음이 모두 가고 안내음 이 나올 때까지 배도빈은 전화를 받 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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