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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03화 (20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03화

    45. 왕좌 (7)

    도빈이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B는 경이롭다.

    만들어진 지 이제 겨우 두세 달 된 오케스트라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한 악기처럼 느껴졌다.

    연습할 때부터 느꼈지만 단원들이 도빈이를 얼마나 신뢰하며 따르는지 알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복잡한 감성을 이렇듯 절절히 표현하진 못할 거다.

    신뢰로 이어진 도빈이와 베를린 필하모닉 B가 함께하니 조금씩, 지금 까지 무엇을 망설였는지 잊기 시작 했다.

    하루에도 스무 번씩 반복해 연주했고 그 외의 시간은 언제나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노력은 배신하 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피아노를 치기 싫을 때가 있더라도 단 하루도 연습을 빼먹지 않았다.

    내 안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 주곡 2번은 분명 완성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단지 내 손을 통해 연주되 지 않을 뿐. 그렇기에 자꾸만 내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무대에서 연주를 이어나가는 지금 도 그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 자리.

    객석을 가득 채운 팬들과 베를린 필하모닉 그리고 지휘봉을 든 도빈 이를 앞에 두고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다.

    지금의 내가 부족하다면 그것을 받 아들이고 할 수 있는 한 이 몸과 영혼을 다할 뿐.

    그뿐이었기에 그마저도 못하고 오 늘의 무대를 후회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싸우자.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는 알고 있으니 손가락이 무거워 움직이지 않는 다면 평소보다 더 힘을 주어 연주하 자.

    도망치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꽁꽁 묶어 가슴 한편에 묻어두고 악을 질러서라도 나아가자.

    당장 나아지진 않겠지만 그렇게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분명 좀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한다.

    그렇게 1악장을 연주하니.

    그간의 노력과 나를 믿어주는 도빈 이와 채은이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 일 수 있게 되어 마음이 조금 편해 졌다.

    무거웠던 가슴과 손가락이 오랜만 에 편안함을 느낀다.

    연주를 마쳤을 때.

    관객들이 일어서 박수를 보내주었다.

    도빈이가 한발 물러나 오늘 밤의 영광을 내게 돌리려 했다. 나는 고 개를 저었다.

    도빈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섰다. 소소 누나를 보며 웃자 누나가 단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이렇게 훌륭한 음악가들과 팬과 함께하니 망설이고 두려웠던 것도 잊을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다.

    이 박수 소리가 답답했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내 주었다.

    실력은 나아지지 않는데 짙은 안개가 갠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분 명 기분 탓일 거다.

    하지만 음악이 즐겁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계속 노력할 수 있다.

    ‘고마워요.’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목욕하고 푹 쉬어야지.’

    돌아갈 준비를 하고 도빈이를 만나 러 복도로 나섰는데 도빈이의 대기 실 앞에 기자들이 잔뜩 있었다.

    어찌나 많은지 복도를 지나갈 엄두 조차 나지 않는다. 어렸을 적부터 이런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대하는 도빈이가 신기하다.

    평소 성격이었으면 귀찮게 군다고 짜증을 낼 텐데 말이다.

    “지훈!”

    “아, 사라 씨.”

    리스텀지의 기자 사라 씨가 인파를 헤치고 내게 다가왔다.

    예전부터 도빈이의 기사를 다뤘던 분인데 크리크에서 우승한 뒤로는 내 특집 기사를 내주시곤 했다.

    고마운 분이고 오랜만에 만나 반갑 게 악수를 나누었다.

    “최고였어.”

    “정말요?”

    “짓궂게 묻는 거 보니 정말 슬럼프는 괜찮아진 모양인데?”

    “마음이 편해졌어요.”

    나를 잘 아는 분인 만큼 이야기하 기도 편하다.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도 있으니까.

    ‘도빈이는…… 한참 걸리겠지?’

    지휘자 대기실 쪽을 보니 도빈이가 해방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대기실에 음료수가 있던데 마시면 서 이야기해요.”

    “이래서 네가 좋다니까.”

    독주자 대기실로 돌아와 사라 씨와 마주 앉았다.

    “좋아. 그럼 우선 오늘 연주회 이야기부터 해야겠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 이유는?”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와 도빈이 그리고 제가 회의 끝에 정했어요. 마에스트로는 베를린 필하모닉 B가 다양한 음악을 하길 바라는 것 같았고 저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서 결정하게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아주 좋은 결정이었던 것 같아. 최근 조금 지쳐 보였던 느 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거든. 오 늘은 정말 멋졌어.”

    사라 씨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슬럼프가 꽤 길었으니 까요.”

    “그 슬럼프 말이야. 그것 때문에 개인 연주회를 하지 않은 지 벌써 몇 달인데 팬들에게는 조금 의아한 가 봐. 그도 그럴 게 최근에 차이코 프스키에서 우승도 했고 오늘 같은 훌륭한 연주도 들려주었으니 팬들은 네 슬럼프가 뭔지 궁금해하더라고.

    말해줄 수 있어?”

    잠시 생각하고 답했다.

    “심리적인 게 가장 큰 거 같아요.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꾸준히 실력이 늘었는데 최근에는 정체되어 있으니 까요. 툭타미셰바나 니나 누나같이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사람 들에게 뒤처진다고 생각했어요. 그 런 생각이 절 괴롭혔던 것 같아요.”

    “객관적인 지표만 놓고 보면 그 둘 보다 네가 훨씬 인정받고 있는데 도?”

    “툭타미셰바는 작년에 비해 실력이 부쩍 늘었고 니나 누나는 정말 과소평가 받고 있어요. 도빈이도 저도 니나 누나의 피아노는 정말 대단하 다고 생각해요.”

    사라 씨가 녹음기를 잠시 멈추고 물었다.

    “니나 케베리히가 유니크한 피아니스트인 건 알지만 내겐 네가 최고 야, 스위티.”

    “하하. 고마워요. ……하지만 오늘 연주로 슬럼프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제 연주를 듣고 기 뻐하시는 분이 계시고 함께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니 즐겁더라고요. 피아노.”

    사라 씨가 서둘러 내 말을 받아 적었다. 바쁜 그녀 대신 녹음기를 다시 켜주었다.

    “고마워. 그럼 슬럼프는 극복한 거 네? 이제 다시 리사이틀을 기대해도 되는 거야?”

    “그럼요. 그래야죠.”

    “좋아! 아, 맞다. 이건 디지털 콘서트홀에 올라온 댓글인데…… 읽어줄 게? 슬럼프라 하더니 레파토리에도 없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 번을 이렇게 멋지게 연주하다니. 최지훈 대체 정체가 뭐야? 라는 글이 야. 다들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아서

    캡처해 놨는데, 팬들에게 답변해 준다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천재니까요.”

    사라 씨도 따라 웃었다.

    ***

    시장적 성공을 거둔 베를린 필하모닉 B와 최지훈의 협연은 종종 그러 하듯 전문가와 팬들 사이에 다른 반 응을 보였다.

    디지털 콘서트홀을 포함해,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찾은 팬들은 과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 번을 연주했던 이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평을 받는 ‘헤르베르트 카 라얀-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나 ‘안 토니오 마마예스—레이첼 오베 안네 스’1)와 어깨를 나란히 할 명연주로 여겼다.

    1)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안토니오 파파노, Rachmaninov: Piano Cone ertos 1&2, EMI Classics, 2005

    ㄴ 지훈이 연주 뭔가 좀 슬펐어

    ㄴ 나도. 치열하다고 해야 하나? 뭔가 정말 연주를 위해 몸은 던진다는 느낌이었어.

    ㄴ 아마 실제로도 그랬을걸? 자기는 슬럼프지 무대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인데 지휘자는 자기랑 가장 친 한 친구니까 엄청 부담스러웠겠지.

    ㄴ 슬럼프 진짜임? 못 믿겠음ㅋㅋㅋ 너무 좋앜ㅋㅋㅋ

    ㄴ 월간 관중석에 차채은 칼럼 읽어 봐. 정말 눈물 나올 것 같더라. 3주 내내 잠도 줄여가며 연습했대.

    ㄴ 나도 그거 봤어. 그렇게 연습하는 최지훈을 안쓰럽게 보면 안 될 것처럼 치열했다고. 응원하게 되더라고.

    반면 전문가들의 평은 달랐다.

    배도빈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 주곡 2번 해석은 놀랍도록 진취적이었지만, 그것을 연주한 베를린 필하모닉 B는 아직 베를린 필하모닉이 란 명성을 따라가기 멀었다는 입장 이 주를 이루었다.

    더불어 독주자 최지훈의 연주에 대 해서는 열정적이었으나 새로움은 없었다는 다소 박한 평을 하였다.

    인터플레이 측에서 베를린 필을 공 격해 오던 잡지사가 아니라 우호적이었던 독일의 평론가들도 비슷한 평이었으니 베를린 필하모닉 B 의 자존심은 뭉개질 대로 무너져 버리 고 말았다.

    이승희, 나윤희와 함께 차를 마시 며 해당 기사를 접한 소소는 잡지를 꾸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기사를 함께 읽은 나윤희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간신히 분을 삭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평론 같은 거 도빈이부터 무시하잖아.”

    이승희가 소소와 나윤희를 위로하고자 말을 꺼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선 말을 줄였다.

    음악가로서 지금 그들이 어떤 심정 일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장난 아니겠네.’

    이승희의 생각대로 지금껏 열심히 활동했던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단 원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에 이를 갈았다.

    지휘자 배도빈이 아깝다는 뉘앙스 의 이야기에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 라 했다.

    연말 연주회를 코앞에 둔 시점.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단원들이 자발적으로 출근 시간을 앞당겨 연습을 하는 원인이었다.

    * * *

    기사를 본 최지훈이 웃었다.

    “나 혼났어.”

    부정적인 기사를 접하고도 저러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온 듯해 안심했다.

    단원들도 약이 바짝 올라서 연습에 박차를 가하는데 자세가 된 사람들만 모였으니 조만간 한 단계 올라설 거라 믿었다.

    “팬들이 좋아하면 된 거야.”

    “응. 나도 즐거웠으니까.”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데 진달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감기로 며칠 고생하 더니 이젠 힘이 넘치는 모양이다.

    “배도빈! 너 양말 자꾸 뒤집어 놓을 거야?”

    “••••••어?”

    “내가 못 살아 진짜! 왜 자꾸 뒤집는 거야! 이건 또 뭐야. 왜 이렇게 어질러 놨어?”

    진달래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악보랑 음반 그리고 악기들 뿐이다.

    “깨끗한데?”

    “깨끗하긴 개뿔! 바닥이 안 보이잖아! 대체 무슨 수로 하루 만에 이 넓은 방을 이렇게 어지럽히는 거냐? 나가, 나가! 다 치우면 들어와.”

    “나 놀고 있잖아. 그리고 왜 자꾸 시키지도 않는 청소랑 빨래를 하는 거야. 그 시간에 독일어 공부하라고.”

    “누굴 거지로 알아? 먹여 주고 재 워 주고 입혀 주는데 어떻게 가만있냐? 아주머니는 돈도 안 받으시고 이런 거라도 해야지!”

    “나중에 벌어서 갚아. 지금은 그냥 공부만 하고.”

    “아, 쫑알쫑알 대지 말고 빨리 나 가! 시상에 옷 벗어둔 것 좀 봐. 허물 벗냐?”

    “핳하하하하!”

    어어 하는 사이에 진달래에게 쫓겨 나와 버리고 말았다.

    최지훈이 그때까지도 계속 웃었다.

    “뭐가 웃겨.”

    “재밌잖아. 나 너한테 이렇게 대하는 사람 처음 봐.”

    “나도 처음이야.”

    생활력과 자립심이 강한 건 좋은 일이지만 녀석이 빨리 공부에 집중 할 수 있도록 날을 잡아서 이야기해 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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