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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02화 (202/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02화

    45. 왕좌(6)

    베를린 필하모닉 B와 최지훈의 협 연은 많은 관심을 받았던 만큼 인파 가 밀려들었다.

    이틀에 걸쳐 총 네 번의 협연을 하는데 오늘 첫 무대를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베를린 시내 가 북적거렸다.

    여러 유명 인사들이 얼굴을 비추었고 그중에는 독보적인 스타일의 피아니스트 니나 케베리히도 있었다.

    클래식 음악의 부흥으로 인해 클래식 전문 잡지를 발간하게 된 슈피겔 의 빌리 브란트 기자가 니나 케베리 히에게 단독 인터뷰를 따냈다.

    그녀가 오늘의 두 주인공과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갑습니다. 니나 케베리히.”

    “안녕하세요.”

    “보스턴과 뉴욕, 필라델피아 연주 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공개석상 에는 처음 나오셨습니다. 그간 어떻

    게 지내셨나요?”

    “스케줄이 많아 지쳤는데 충분히 쉴 수 있었어요.”

    “쉴 때는 보통 무엇을 하십니까?”

    “피아노를 치거나 들어요.”

    “하하. 일과 휴식이 같다니 대단하 네요. 최근에 듣는 음악이라면?”

    “배도빈, 가우왕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요. 사실 한국에서 했던 홍과의 실황 녹음본을 가장 좋아하지만요. 언젠가는 도빈이랑 함께 연주해 보고 싶어요.”

    “명반으로 잘 알려져 있죠. 그 음 반의 주인공이 지금은 베를린 필의

    악장이 되었습니다. 배도빈 지휘, 최지훈 독주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데 두 사람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 립니다.”

    니나 케베리히는 잠시 고민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오디션 무렵, 자신을 그렇게 좋아해 주던 최지훈 이 화를 냈던 것이 떠올랐다.

    “그보다 잘 어울리는 조합은 없을 거예요. 두 사람, 정말 친하거든요.”

    “두 사람의 친분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평소 두 사람에 대해 말씀 해 주신다면?”

    “도빈이는 음악 말고는 평소에 정말 엉뚱해요. 일주일에 세 번은 카 레를 먹어야 한다든지, 아침에 커피를 내릴 땐 꼭 60알을 간다든지. 음, 그리고 요리를 정말 못 해요.”

    뜻밖의 이야기라 기자들이 니나 케베리히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지훈이는 뭐랄까. 평소에는 순둥 순둥한데 음악을 할 때는 무척 열정 적이에요. 피아노를 치는 걸 보고 있으면 저도 뜨거워지더라고요.”

    “니나, 이제 들어가야 해.”

    니나 케베리히와 함께 있던 박선영이 곧 공연이 시작됨을 알렸다.

    그 말을 들은 기자가 다급히 나섰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쭙습니다! 최근 일부 평론가들이 배도빈 악장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내 놓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돌아서려던 니나 케베리히 가 기자를 보았다. 그리고 차분하고 단호하게 답했다.

    “도빈이는 언제나 음악으로 말해왔어요. 오늘도 그럴 거라 믿어요. 만 약 그들이 도빈이의 연주회를 듣고 도 변치 않는다면 그건 그들의 자질 에 문제가 있는 거겠죠.”

    “니나, 들어가자.”

    말투는 차분했지만 니나 케베리히의 답변은 그녀가 현 상황에 얼마나 화나 있는지 알려주었다.

    생방송을 통해 중계된 그녀의 말은 전 세계에 송출되었고 박선영은 니 나 케베리히가 혹시나 경솔한 발언으로 피해를 입진 않을까 우려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디지털 콘서트홀에 모인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야 기하기 시작했다.

    ㄴ 니나 케베리히 실수하네.

    ㄴ 니나 케베리히의 말은 옳습니다. 최근 런던 측 평론가들이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계속하는데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실제로 배도빈 악장 이 베를린 필과 함께하면서 베를린 필의 성장은 눈부실 지경입니다. 팬 과 시장이 증명하는 일을 부정하는 해먼 쇼익 및 일부 평론가들은 평론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ㄴ 난 어려운 건 잘 모르겠고 음악 가면 음악으로 말하는 게 맞지. 배도빈은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고. 단 한 번도 실망한 적 없음.

    ㄴ 중국이나 북한도 아니고 생각은 다를 수 있지. 배도빈을 까면 무조 건 자격이 없는 거라니. 니나 케베 리히가 잘못 생각하는 거임.

    ㄴ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그걸 표현 할 수 있지만 거짓된 정보를 사실인 양 의도적으로 하는 건 범죄지.

    ㄴ 생각은 다를 수 있댘ㅋㅋㅋ 제정 신인 척하고 있네. 벌레 새끼가. 최 소한의 예의와 지식은 갖추고 떠벌 려야지, 인마.

    ㄴ 다양, 다원이란 명제는 알면서 사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남을 까내 리는 게 범죄란 건 왜 모를까?

    ㄴ 저런 걸 보고 덜 배웠다고 하는 거임.

    ㄴ ㅇㅇ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이거 다 언론 통제 아님?

    ㄴ 미친 소리 해.

    ㄴ 언론 통제가 아니지. 너처럼 망 상과 무식과 비인간적인 인간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음악가를 욕되게 하니까 자정하는 거임.

    ㄴ 꼭 저런 놈들이 지들이 하는 짓 이 범죄라는 건 모르더라.

    연주회 직전 바흐의 칸타타를 들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겹쳤다.

    “네.”

    최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며칠 전까지 불안해하던 얼굴이 아 니라 조금은 안심했다. 어렸을 때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손을 떨었는데 마음을 다잡을 계기가 있었던 모양 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내 연주가 요즘 안 좋았던 거 알았을 텐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지금이라면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네가 힘들어했으니까.”

    “……그랬구나.”

    최지훈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슬럼프를 심각하게 자각하고 있는 녀석에게 이것저것 말해봤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고.

    동시에 난 형제를 믿었다.

    많은 사람이 어느 날 벽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넘기 위해 노력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나 그것을 넘어설 때까지 노력 하는 사람은 무척 적다.

    그러하기에 누구나 다 노력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것을 노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음악가라면 누구나 벽을 마주한다.

    나조차 몇 년째 대교향곡의 1악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재능의 차이로 벽을 만나는 시점과 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차이 가 있을지 몰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 것을 극복한 순간, 나는 그때까지의 시간과 노력을 노력이라 여긴다.

    그리고 최지훈은 그 누구보다도 그 러한 노력을 이어왔다. 나나 채은이, 니나와 같은 재능을 목도하고도 부

    단히 걸어온 녀석은 결국 나와 함께 무대에 오를 정도로 성장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렇기에 굳이 사족을 덧붙이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연락하며 가르침을 주는 진 마르코나 나카무라 료코 등과 달리 최지훈만큼은 내가 보살필 존재가 아니라 등을 맞댈 수 있다고 생각하 기 때문이다.

    “난…… 이 상태로 너랑 같은 무대 에 서도 되는지 모르겠어. 내가 바 란 무대는 이런 식이 아닌데.”

    최지훈이 말했다.

    어렸을 적부터 내 곡의 독주자로 함께하고 싶었던 최지훈의 마음을 알기에 저 아쉬움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대학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어.”

    최지훈이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 냐고 묻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보를 들고 그의 이름을 읊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어렸을 적부터 재 능을 발휘했대. 4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0살부터 작곡을 했다나.”

    슬슬 연주회가 시작될 시간이기에 천천히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20대 때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이 꽤 혹독한 평을 받았다고 해. 그 이후로 라흐마니노프는 꽤 오랜 시간 슬럼프를 겪었는데 우 울증까지 걸렸다고 하니 심각했겠지.”

    최지훈의 가슴에 주먹을 뻗었다.

    툭 하고 밀치며 말했다.

    “그랬던 라흐마니노프가 재기에 성 공한 곡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는 데.”

    “난.”

    “할 수 있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은 슬럼프를 겪으며 쌓였던 그의 감 정이 격정적으로 드러나는 곡이다.

    어렸을 적부터 승승장구한 천재가 겪은 첫 실패.

    그로 인한 두려움에 라흐마니노프는 괴로워했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만큼은 막아내지 못했다.

    역사는 라흐마니노프가 슬럼프를 겪은 4년간 단 하나의 곡도 만들지 못했다고 기록하지만, 그 시간은 그 의 생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4년이 ‘작곡하 지 못한 시간’이 아니라 ‘피아노 협 주곡 2번을 만든 시간’이라 여긴다.

    지금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최지훈이 멈춰 있는 게 아니라 생각 하는 것처럼.

    "응."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무대로 향했다. 형제와 함께 오르는 지금보다 든든할 때가 또 있을까.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찾은 팬들이 박수로 나와 최지훈을 맞이 해 주었다.

    소소가 단원들을 향해 일어나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나는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어 최지훈도 소소와 손을 맞잡았고 지휘대에 올랐다. 계속해서 열렬 한 인사를 보내오는 팬들에게 고개를 숙여 화답하고는 단원들을 정면 에 두었다.

    최지훈과 시선을 마주했다.

    담담한 얼굴이지만 속에는 불안함 이 남아 있을 거다.

    녀석이 이 무대를 꿈꿨던 만큼 나 도 기다렸기에 잘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클지도 잘 안다.

    몇 마디의 말로 해결할 수 있다면 슬럼프라고 할 것도 없을 테니 분명 지금도 자문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을 생 각해야 하는지 등등.

    하지만 최지훈이라면 내 지휘에 맞춰 지금까지 함께한 이 곡을 잘 표 현해 줄 거라 생각한다.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1악장 모데라토 (Moderato: 보통 빠르기), C단조.

    피아노에 손을 얹고 작고 무거운 첫 음을 내었다. 점차 분위기가 고조 되며 피아노는 내달리기 시작한다.

    오케스트라가 함께할 때다.

    운명이 도래했다.

    ♪♫♬

    새벽이 오기 전 어둡고 푸른 밤에 겨울바람이 옷깃에 스며든다.

    말에 탄 남자는 우수에 젖은 채 끝없이 펼쳐진 길조차 보이지 않는 대지 위를 달린다.

    사명을 다하라고 말하는 듯한 오케스트라의 압박 속에서도 피아노는 묵묵히 제 앞으로 나아간다.

    작은 길조차.

    이정표조차 없는 한없이 넓은 대지 에서 피아노만큼은 자신이 갈 길을 알고 있다는 듯 망설임 없이 달린다.

    바이올린이 남자의 굳은 의지를 드 러내고 갑작스레 매서운 바람이 닥 친다.

    일순간 정적.

    남자는 천천히 그가 걸어온 자리를 뒤돌아본다. 찬란했던 과거를 꿈꾼다. 달콤한 추억이 그를 괴롭히나 다시금 나아갈 수 있는 힘이기도 함을 깨닫는 순간.

    여리게 터치하듯 연주하던 피아노 가 호른이 함께하며 생기를 되찾는다.

    트럼펫이 그가 다시 달리길 응원하 고 남자는 다시금 내달리기 시작한다.

    ‘훌륭해.’

    최지훈은 마치 감정을 쏟아내듯 연주했다. 지금까지 악보에 충실해 연주하던 녀석이 마침내 자신을 드러 내기 시작한 것이다.

    슬럼프를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 덕 분일까.

    녀석의 연주는 굳센 의지와 함께했다.

    바이올린이 이끄는 웅장하면서도 신비로운 멜로디 사이를 누비는 피아노.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이 웅장한 곡을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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