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99화
45. 왕좌(3)
분위기를 전환할 겸 채은이와 각각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나 정말 못 하는데.”
“ 괜찮아.”
차채은을 위한 피아노 연습곡 1번 C 장조.
천천히 연주를 시작하자 채은이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닌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다.
여전히 완벽한 박자 감각을 가졌지 만 타건은 예전의 발랄함 없이 무겁다.
머뭇거릴 때는 거기에 맞춰 대신 음을 채워 넣었고 그러면 그 뒤에는 다시 연주를 이어나갔다.
“와, 이건 뭐야? 너무 좋잖아.”
연주를 마치자 진달래가 손으로 허벅지를 치며 박수를 대신했다.
“차채은을 위한 피아노 연습곡. 예전에 연습할 곡이 딱히 없어서 만들어줬어.”
“와. 내가 다 간지러운 이름이네.”
진달래가 웃었다. 그러고는 자기 방으로 가더니 베이스를 가지고 왔다.
“나도 같이할래. 엄청 하고 싶어졌어.”
최지훈과 채은이가 말을 하진 않았지만 꽤 놀란 눈치였다. 진달래의 의수를 못 봤을 리가 없기에 그런 듯하다.
최지훈에게 피아노 자리를 양보했고 바이올린을 들었다.
“뭐 하지?”
채은이와 진달래의 레파토리가 좁 아서 연주할 만한 게 딱히 없었다.
“즉흥으로 하지 뭐.”
내가 음을 내기 시작하자 최지훈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진달래 가 베이스로 아래를 깔아주기 시작 했다.
채은이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최지훈의 멜로디에 반주를 넣었다.
“핳핳핳핳. 엉망이잖아.”
연주를 마치자 진달래가 웃기 시작 했고 채은이와 최지훈이 따라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
엉망이지만 꽤 즐겁다.
그러다 문득 지구방위대 가랜드가 떠올랐다. 예전에 최지훈도 채은이 도 봤고 비슷한 또래인 진달래도 알 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 나 이거 알아!”
활기를 되찾은 채은이가 연주에 합 류 최지훈이 채은이의 연주를 보조 했다.
그렇게 어렸을 때 봤던 만화영화의 주제곡을 연주하다 보니 조금씩 호 흡이 맞아갔다.
나중에 루트비히 오케스트라를 만 들면 이렇게 시작하게 될까?
그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연말 연주회를 준비하는 기간에도 OOTY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화두로 올라섰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왔는데 채 은이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베를린 필이지!”
“ 나도.”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고 진달래는 고민하다가 ‘난 잘 모르겠어’라 고 했다.
소소와 나윤희도 당연히 베를린 필하모닉이라 답했는데 나카무라 료코 의 대답은 달랐다.
“기준이 뭔데?”
본격적인 이야기라 조금 고민하다 가 대답이 갈렸다.
나와 최지훈과 채은이는 음악성이 라 말했고 소소는 매출액, 나윤희는 팬층에 대해 언급했다.
“그…… 얼마나 다양한 사람을 포용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돈이 최고야. 좋은 음악이랑 팬이 많다는 걸 나타내는 게 돈이니까.”
소소가 의외로 현실적인 점을 지적 했다. 그녀의 말도 확실히 일리가 있다.
음악성과 대중성(팬)을 정확히 나 타낼 수 있는 지표가 마땅히 없으니 매출액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소의 말에 다들 심각하게 고민하 기 시작했고 진달래가 나섰다.
“되게 칙칙하잖아. 돈 좀 덜 벌면 어때. 멋진 음악을 하는 게 중요하지.”
이 역시 정론.
답이 없는 와중에 어머니와 나윤희를 보기 위해 놀러 온 이승희가 명 쾌한 답을 내렸다.
“본인들이 제일 잘 알지 않을까?”
그 말에 다들 이승희를 보았다.
“그렇잖아? 난 솔직히 베토벤이나 브람스는 베를린이 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오페라 쪽은 빈 필이 아 무래도 낫더라고.”
그 이야기를 푸르트벵글러에게 전 했더니 그가 껄껄 웃었다.
“그 말대로다. OOTY를 누가 받느
냐도 중요하지만 명심해라, 도빈아.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내년은 더 열 심히 해야 해. 런던의 음악가들이 스스로 느끼도록 말이야.”
푸르트벵글러는 인터플레이에 협조 하는 음악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가 보다.
그뿐만이 아니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반인터플레이 음악가들은 대 부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한 데 솔직히 말하면 난 그들의 음악을 조금도 낫게 본 적 없었다.
도리어 런던 필과 런던 심포니의 경우에는 좋아한다.
명장 브루노 발터가 이끄는 런던 심포니의 연주에서는 고전의 향수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싸울 이유가 없는데 말이지.’
여러 사람에게 누차 해왔던 말이지 만 질 나쁜 음악은 있어도 나쁜 장 르는 없는데.
결국 런던파와 베를린파는 지향하는 음악적 세계관이 다를 뿐.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일이 아니다.
‘나쁜 건 그걸 선악 구도로 만들어 시장을 장악하려는 인터플레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OOTY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전 세계 음악 팬들이 모두 주목한다 면 런던의 음악이든 우리의 음악이든 좋다는 걸 인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때마침 좋은 이야기가 들렸다.
“잠시 주목해 주세요.”
카밀라 앤더슨이 연습실에 들어왔다. 모두 시선을 돌렸고 카밀라가 공문 하나를 게시판에 꽂았다.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에서 내년 2월에 대회를 연다고 해요. OOTY 평점에 포함된다니까 확인해 주세요. 세프와 악장단은 잠시 시간 좀 내주시고요.”
사무국에서 카밀라가 참여 의사를 물었다.
“당연히 참가해야죠.”
케르바 슈타인이 먼저 나섰다. 파울 리히터가 그에 동조했고 찰스 브라움은 보류, 소소는 아직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OOTY와 열의를 태우던 푸르트벵글러가 가만있는 게 의외였는데 소소가 입을 열었다.
“일정 애매해.”
소소가 말을 마치자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열었다.
“연말, 연초 연주회를 준비하는 것 만으로도 빠듯하다. 기껏 인원을 늘렸거늘 다시 단원들을 잡을 순 없지. 게다가 대회 일정이 한 달이군. 확장 공사 때문에 석 달이나 정기 연주회를 못 가졌는데 이번에도 그럴 순 없다. 팬들을 기만하는 짓이야.”
역시 푸르트벵글러의 최우선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팬인 듯하다.
나도 어쩔 수 없지만 정기 연주회 에 집중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에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동조하려는데 그가 단호히 말했다.
“B팀으로 참가한다.”
카밀라와 악장단이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놀랐다.
“네?”
“연습실로 가자. 카밀라 자네도 함께 와주게.”
푸르트벵글러가 단단히 마음을 먹 은 모양이다. 폭군답게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발을 옮겼다.
모든 단원을 앞에 두고 푸르트벵글러가 지휘단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가 보 낸 공문서를 통해 대충의 상황을 공유하고 있던 단원들에게 정기 연주 회의 중요성을 강조.
대부분의 단원들이 동조했다.
“그러니 B팀이 참가하도록 하겠다.”
역시나 반응이 애매하다.
상황상 A팀이 출전하지 않는 것은 다들 공감했지만 그렇다고 B팀의 출전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러나 런던을 쳐부순다고 천명한 푸르트벵글러에게 불참이란 선택지는 없는 모양이다.
‘다들 어떨떨한 표정이네.’
사람들을 살펴보니 조금 당황한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B팀은 입단한 지 두세 달밖에 안 된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단원으로 들일 정 도로 수준급 실력을 보유했지만 아직 오케스트라로서는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구성부터 호흡까지 전체적으로 퀄 리티를 끌어올리기엔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편성으로 참가할 다른 오케스트라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배도빈 악장, 앞으로.”
푸르트벵글러 옆으로 가자 그가 다 시 단원들에게 말했다.
“여기 배도빈 악장이 B팀을 이끌 고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 할 것이다. 이의는 받지 않는다.”
“이의 있습니다.”
한스가 손을 들었다.
푸르트벵글러가 그를 무시하고 계 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나윤희가 축 늘어진 한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빈 필, 암스테르담 허바우, 런던 심 포니와 함께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이겠지. 너희가 아직 부족함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푸르트벵글러가 먼저 B팀에게 시 간이 필요함을 말하자 수심 가득했던 B팀 단원들의 얼굴이 조금은 펴 졌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참가한다면 용서치 않는다. B팀이라 해서 2군이 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 라도 짐 싸 들고 나가.”
푸르트벵글러가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
“베를린 필하모닉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어정쩡한 마음가짐과 연주는 허용하지 않는다. 너희는 이 내가 선택한 최고의 연주자다. 내 얼굴에 먹칠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 길 바란다.”
푸르트벵글러가 나를 잡아끌어 지 휘단에 세웠고 스스로 내려갔다.
“목표는 우승. 최고의 악장이 너희 와 함께할 거다. 최고의 연주를 하고 와라.”
푸르트벵글러가 한발 물러섰고.
단원들이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뭐라도 한마디 해줘야 할 것 같은 데 앞서 푸르트벵글러가 멋진 말을 다 해버렸다.
“평소보다 열심히 하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A팀 단원들이 B팀을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 * *
베를린 필하모닉 B팀은 지휘자 배도빈이 준비한 스케줄러를 확인하고는 절망에 빠졌다.
09:00~09:30 미팅
09:30~12:30 파트 연습
13:30~17:00 합동 연습
17:00~17:30 개인 정비
18:00-1930 실내악 연주
19:30~20:00 연주회 합평
점심시간 1시간과 저녁 시간 30분을 제외하고는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쉬지 않았다.
더군다나 틀린 부분은 귀신같이 포 착하는 지휘자 배도빈 덕에 단원들 은 매시간 단단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19시 30분부터 시 작하는 합평 시간이 너무도 괴로웠 기 때문이었다.
연주회가 없는 날이면 퇴근은 빠르 지만 그만큼 개인 연습을 요구했기 에 단원들은 날로 피로가 쌓였지만 유독 아시아 측 단원들은 쌩쌩했다.
대한민국 출신의 배도빈과 B팀 제 2바이올린 수석이 된 나윤희.
중국 출신의 B팀 악장 소소와 콘 트라베이스의 시엔 얀.
일본 출신의 B팀 바이올린 주자 오오타 타카히코 등은 평범하게 생 활했다.
결국 고된 일정을 견디던 제1바이올린 주자들이 소소를 찾았다.
“악장, 악장은 안 힘들어요?”
점심을 먹고 있던 소소가 고개를 돌렸다.
“ 뭐가요?”
“일정이 너무 빡빡하잖아요. 쉴 시 간은 줘야죠.”
‘지금도 쉬고 있지 않나?’
소소는 잠시 생각하다 무엇인가 생 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점심시간 뒤에 낮잠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요.”
점심 뒤에 낮잠 시간이라니 이상하 게 생각했지만 단원들은 우선 악장 이 휴식 시간을 늘리는 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안심했다.
제2바이올린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들은 그들의 수석 나윤희에게 물었다.
“수석, 일정이 너무 과한 거 같은 데 어떻게 생각해요?”
“그, 그런가요? 저는 너무 편해 서……
고등학교 때부터 네이즈 시절까지.
하교와 퇴근 시간이 10시 이전이었던 적이 없었던 나윤희에게 베를린 필하모닉의 근로조건은 천국과도 같았다.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니 독일과 타 지역에서 온 단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독한 아시아인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불만도 단 2 주 만에 자신들의 실력 향상을 몸소 체험하니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