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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98화 (19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98화

    45. 왕좌(2)

    저녁 식사 시간이 정말 정신없었다.

    소소와 진달래가 평소대로 우걱우 걱 포식했고 도진이가 그 모습을 따라했다.

    체할까 걱정되어 도진이를 말리는 사이에 최지훈은 얌전히 교양 있게 밥을 먹었다.

    채은이는 최근 조금씩 주목받고 있는 나윤희에게 이것저것 물었는데 과도한 관심을 받은 나윤희는 쩔쩔 맸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티격태격하시 다가 채은이의 어머니와 수다를 떨 기도 하셨고 아버지는 김 실장님과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셨다.

    북적북적하다.

    식사를 마치고 최지훈과 옥상 테라스에서 커피를 한잔하는데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으으. 베를린 필과 협연이라니 너무 긴장돼.”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아.”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면 될 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뭔가 느낌이 다른걸. 그래서.”

    최지훈이 뜸을 들이다 말했다.

    “좀 도와줄 수 있어?”

    “ 뭘?”

    “ 연습.”

    어이가 없어서 최지훈을 빤히 보다 가 말했다.

    “그래서 콩쿨 끝나자마자 왔구만?”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표정인데 사실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두 번째 크리크에서 우승하고 재도 전한 쇼팽 콩쿠르에서도 우승할 때 최지훈의 기량은 부쩍 늘었지만 어 딘지 모르게 나와 닮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최지훈이 받는 가장 많은 평 중 하나가 제2의 배도빈.

    나도 최지훈도 세간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최지훈의 음악 세계에 더 관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11살 때부터 그는 이미 어엿한 피아니 스트였으니까.

    “싫어.”

    “어? 왜?”

    “어렸을 때야 네가 무리하고 있기 도 했고 부족한 점도 많아서 도와줬 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까지 혼자서 잘해왔잖아. 이 번에도 잘할 수 있어.”

    내 말에 최지훈이 입을 쭉 내밀었다. 예전에도 내가 도와주긴 했지만

    결국에는 혼자서도 잘해왔던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 무슨 일이 있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실은 요즘 조금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연습을 게을리 하는 것도 아닌데.”

    슬럼프인가.

    최지훈이 난간에 기대어 턱을 괴었다. 옆으로 가니 베를린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멈춰버리는 건 아닐까 걱 정돼.”

    “피아노는 여전히 재밌어?”

    “그럼.”

    그 대답에 안심했다.

    “오랜만에 같이할까?”

    “응!”

    내 층으로 내려가 연주실에 들어섰다. 히무라와 칠삼의 도움으로 악기 란 악기는 있는 대로 사서 그 넓던 장소가 조금 좁게 느껴질 정도다.

    피아노 앞에 앉자 최지훈도 마주하 고 있는 피아노에 자리했다.

    “드뷔시 행렬.”

    “어?”

    연주를 시작하자 최지훈이 곧잘 따라왔다.

    드뷔시가 남긴 작은 모음곡 중 행 렬은 힘찬 주 멜로디 주변을 보조 멜로디가 재잘대며 발랄한 느낌으로 함께하는 연탄곡이다.

    당당한 걸음을 연상시키는 연주 속 에 날아가듯이 들려오는 연결음들.

    짧은 연주를 마치고 말했다.

    “잘하잖아.”

    “갑자기 시작하면 어떡해.”

    “ 미뉴에트.”

    드뷔시의 작은 모음곡 중 미뉴에트는 간질거리며 시작한다.

    최지훈이 약이 올랐는지 멜로디를 뺏어 자기가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고 나는 최지훈의 연주를 더욱 돋보 이게 해주기 위해 약간의 변형을 주어 즉흥적으로 연주하였다.

    즐겁다.

    피아노 소리에서 최지훈이 조금 당황한 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지훈도 원래 악보에서 벗어난다. 더 자유롭게 더 아름다운 멜로디를 또는 엉망으로.

    이제 연주는 더 이상 드뷔시의 작은 모음곡이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연주를 마치자 최지훈이 말 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쇼팽의 에튀드 G플 랫 장조, 흑건이다.

    빨리 덤비라는 듯한 연주에 흥이 나 중간부터 조금씩 음을 변형시키 는데 역시 즉흥 연주에는 아직 그리 능숙하지 않은 듯 조금씩 최지훈의 연주가 꼬이기 시작했다.

    슬쩍 피아노 너머로 녀석을 보니 독이 바짝 올라 있는데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 있다.

    연주가 끝났다.

    “좋아하다 보면 알고 싶고 그래서 찾다 보면 실력은 자연스레 따라와. 너무 걱정하지 마.”

    다른 일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적어 도 음악은 사랑과 같다. 사랑하는 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관심이 생 긴 뒤의 과정은 비슷하다.

    나 같은 경우는 내 몸과 영혼을 불태워 어둠 속에 있는 음악을 찾아 다녔고.

    최지훈의 경우에는 순수한 마음을 키워왔다. 그 마음이 계속되는 한 녀석은 끝없이 발전할 것이다.

    그래서 잠깐의 슬럼프 따위 걱정하지 않는다.

    내 의도가 잘 전달되었는지 최지훈 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엄청 잘하네.”

    그때 진달래가 쟁반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에 채은이가 케 이크를 들고 있다.

    “와, 이게 다 뭐야?”

    채은이는 연주실을 둘러보며 감탄 했다. 이 집에는 처음 오는 만큼 이 것저것 신기한가 보다.

    “아줌마가 간식 주셨어.”

    진달래와 채은이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고마워.”

    “둘이 재밌게 놀더라. 부럽다.”

    피아노 소리를 들었는지 채은이가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뭔가 피아노로 놀 수 있다는 게 부러운 눈치다.

    “왜 부러워?”

    최지훈이 의아하게 물었다.

    “잘 치니까?”

    채은이의 말을 들은 최지훈이 정말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어버버버 대면서 나보고 뭐라 말 좀 해달라는 듯하다.

    그냥 웃자 최지훈이 채은이에게 말 했다.

    “아니, 너 피아노 엄청 잘 쳤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무슨 소리야.”

    채은이가 깔깔대며 웃었는데 나도 조금은 충격이었다.

    “기억 안 나?”

    정색하고 묻자 채은이가 골똘히 생 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오빠랑 놀면서 쳤다는 기억은 조금 있는데, 그래 봐야 일년에 며칠뿐이었잖아? 아, 그래도 오빠가 만들어준 곡은 계속 연습했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얼마나 서 러웠는데. 그땐 오빠가 일하러 외국 가버리면 왜 그렇게 슬펐는지 몰 라.”

    채은이의 말을 듣고서 나는 나와 최지훈이 뭔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본래 어른스러웠던 최지훈이 본격 적인 훈련을 받은 시기도 여덟 살이었다.

    나야 한평생을 살았기에 어렸을 적 부터 있었던 일들에 대해 모두 기억 하고 내 의지대로 행동했지만(비록 어휘력의 문제로 인해 지금도 이불을 걷어찰 기억이 몇몇 있지만).

    채은이가 내게 피아노를 배운 나이는 고작 다섯 살 때의 일. 그마저도 처음 한 달을 제외하고선 바쁜 와중 에 며칠 만나지도 못했다.

    녀석이 자기의 목표가 ‘평론’이라 말했을 때도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 한 해의 겨울이었다.

    나나 최지훈이나 몇몇 사람을 빼놓고 생각하면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 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한 나이다.

    친구 한 명 없이, 과하게 소심했던 채은이에게 나와 최지훈은 유일한 또래였고 피아노는 그저 함께 노는 도구였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도진이도 그랬으니까.’

    도진이가 과학 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시기를 떠올려 보았다. 우연 히 함께 본 과학 다큐멘터리에 나온 이야기를 도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 께 말했고 두 분은 깜짝 놀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녀석이 그 말에 대해 이해는 했을까 싶은데 시작은 부모님이 기뻐하셨다는 데 있다.

    그때부터 도진이는 그런 쪽에 관심을 가졌고 자기가 본 지식을 아버지와 어머니께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교육 수준이 높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나 신기해하셨고 말이다.

    최지훈이 물었다.

    “난 너 피아노 듣고 좌절할 뻔도 했단 말이야. 그런 애한테 이런 말 들 으니까 엄청 충격이다.”

    “글쎄……. 그렇게 말해도 난 잘 기억 안 나. 그냥 오빠랑 도빈 오빠 나오는 TV 보면서 놀았지 뭐. 어차 피 그때부터 바빴잖아. 둘다. 내 기억엔 그런데?”

    내 생각대로.

    나와 최지훈과 함께 놀지 못하는 채은이는 우리가 나오는 화면을 보 며 시간을 보냈고 평론가든 패널이든 나와 최지훈에 관련한 이야기를 자기 아버지에게 들려줬을 거다.

    예전에 채은이의 아버지가 채은이 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내게는 평론을 한다는 채은이의 선 택이 뜬금없었지만 채은이에겐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거다.

    ‘……생각해 보면 지훈이도 자기 엄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시작했지.’

    그 과정이 계속되다가 피아노 자체 에 흥미를 붙였던 거라 생각하니 조금 황당해졌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최지훈이 다시 물었다.

    “정말, 정말 피아노 못 쳐?”

    “그렇다니까. 심심할 때 치긴 했어 도 오빠들처럼은 절대 무리지.”

    “아깝잖아! 지금이라도 시작하는 게 어때? 분명 엄청난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내가 무슨. 오버하지 마.”

    채은이는 웃으며 말했다.

    최지훈이 농담을 하는 거라 받아들 이고 있는 듯했다.

    “난 심각해! 너 네가 어떤 사람인 지 모르는 거야?”

    최지훈이 언성을 높였다.

    스스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 라는 걸 알아줬으면 하지만.

    최지훈은 항상 나와 채은이를 의식 했다.

    곧고 바른 마음 때문에 최지훈은 나와 채은이를 두고도 조금도 시기 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재능을 부정하는 채은이의 태도에 흥분한 것이다.

    그런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왜 노력 하지 않냐고.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테지 만 슬럼프를 겪느라 괴로운 시기의 녀석이 채은이를 닦달하듯 말했다.

    아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 최지훈이 흥분해서 말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심이지.’

    그건 나와 최지훈의 욕심일 뿐이다. 찬란한 재능이 만개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일 뿐.

    피아노를 치는 것도 평론을 하는 것도 모두 채은이가 선택할 일이다.

    채은이가 자신의 재능을 모를 수밖 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음악을 분 석하는 일을 하게 된 것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굳이 나와 최지훈의 욕심으로 채은이에게 다시 피아노를 하라고 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야, 너 왜 채은이한테 화내냐?”

    가만히 있던 진달래가 최지훈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 만났는데 꽤나 친해진 모양이다.

    “피아노를 치든 말든 얘 마음이지. 왜 네가 하라 마라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래. 난 너희 둘이 얼마나 친한 지도 모르고 오늘 처음 봤지만 그런 걸 왜 강요하는데?”

    진달래의 말을 들은 최지훈이 뭐라 말하려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닫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최지훈이 채은이에게 사과했다.

    “미안. 강요할 생각은 없었어. 그 냥. 그냥 내가 널 부러워했던 거야.”

    최지훈의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슬럼프로 인해 녀석이 그간 얼마나 많이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난 녀석을 쭉 어른처럼 대했다.

    이제 고작 18살. 한 달 뒤 내년이 라도 19살인데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도 잠시 흥분하긴 했지만 제대 로 이성적으로 생각할 정도로 녀석 은 어른스러우니까.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최지훈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무척 당황했을 채은이에게 말했다.

    “놀랐지?”

    채은이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놀 라서 그런지 무엇 때문인지 조금 울 먹이고 있었다.

    “난 내 음악에 대해 정확히 이야기 해 주는 친구가 있어서 기뻐. 지훈 이도 네가 써준 글을 보고 나한테 얼마나 자랑했는지 몰라.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음악을 정확히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 나 기쁜 일인지 모를 거야.”

    채은이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진심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도 사실 아쉽기도 해. 네 선택이라 존중했지만 네 피아노는 정말 좋았어. 지금도 기억이 생 생하니까. 나도 지훈이도 네 피아노를 좋아하니까 아쉬워하는 거야. 나 쁜 뜻은 없었어.”

    그리고 오해하지 않도록 사실대로 말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배운 화법은 이 럴 때 정말 크게 도움이 된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말해줘야 할 지 상대의 마음이 어떨지 제대로 이 해하지 못한 채 그렇게 관계를 잃었을 테니까.

    참 아이러니하게도.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내게 또래 친구를 만들어주려 하셨던 마음을 요즘에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홍승일과 토마스 필스가 떠나고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의 얼굴에 주름이 짙어지면서.

    내 주변을 둘러봐도 내 또래에 함께할, 음악을 향유할 친구들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겐 지금 이 방에 있는 이들이 너무도 소중하다.

    이들의 사이가 틀어지면 그보다 슬 픈 일도 없을 것이다.

    최지훈이 채은이에게 다시 한번 사 과했고 채은이는 고개를 저으며 최지훈을 안아주었다.

    “너희 엄청 친하구나?”

    진달래가 부러운 듯 말했다.

    “물론이지.”

    19살의 최지훈. 16살의 차채은.

    모두 성장통을 겪을 뿐 서로를 생 각하는 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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