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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97화 (19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97화

    45. 왕좌(1)

    슈니첼 특제 카레는 먹지 못했지만 피셔 디스카우가 재밌는 말을 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새로운 단원을 뽑는다고 들었는데 B팀의 팀파니는 아직 공석이잖나? 아무렴 사내라면 도전해야지!”

    피셔 디스카우가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이 들어온다면 즐거울 것 같았기에 진심으로 응원했다.

    “합격하길 바랄게요.”

    “크으! 이렇게 상냥한 마왕이 있을 수 있나. 약속하지! 당당히 합격해 서 함께하겠다고.”

    가지런하고 하얀 이를 보이며 웃는 그를 보니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 졌다.

    다음 날.

    일어나 커튼을 치자 창밖으로 하얗게 덮인 베를린 시내를 볼 수 있었다.

    ‘벌써 또 1년인가.’

    베를린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어머니께선 그림 그리는 일을 다시 시작하셨고 도진이는 대학에 입학했고 하숙생이 생겼다.

    성악 과외를 받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진달래와 당당히 베를린 필하모닉 B팀의 악장이자 A팀 얼후 독주자가 된 소소(박선영은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큰 축이 빠졌음에 애 통해했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계약금으로 지난 빚을 모두 청산해 현재 무일푼 이 되어버린 나윤희가 마지막 하숙 생이었다.

    “흐어어엉.”

    나윤희가 감격한 나머지 꺼이꺼이 울고 있다.

    지금까지 게스트하우스에서 버텼다 니 놀랄 따름이다.

    “울지 마요. 힘들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하지만, 하지만.”

    “핫핫핫하. 정말 못 살겠다. 아니, 사무국에다가 이야기라도 했으면 임 대주택이라도 알아봐 줬을 텐데 왜 그랬어.”

    이승희가 깔깔 웃었다.

    달래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호했지만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것은 확실하다.

    아무래도 멀리 타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 게 나윤희에게는 큰 힘 이 되는 듯하다.

    “아니, 그런데 지금까지 모아둔 돈이 하나도 없었던 거야?”

    “그, 그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네이즈 때 그녀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계, 계약 종료하고 아빠랑 유럽 여행으로 기분을 내는 바람에……

    “의외로 호쾌한 면이 있네요.”

    “미안해 도빈아.”

    당장에라도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기에 그만 놀려야겠다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집이 너무 넓었는데 잘된 일이다.

    그 소식을 들은 마누엘 노이어와 찰스 브라움이 헛소리를 하지만 말 이다.

    “연상의 여성 세 명과 동거라니. 질풍노도의 악장에겐 너무 자극적인 환경 아닌가?”

    연상이라니.

    귀여운 햇병아리들일 뿐이다.

    마누엘 노이어가 히죽히죽 웃으며 나를 놀리기에 짜증이 나 퉁명스레 답했다.

    “징그러우니까 그렇게 웃지 말아요.”

    “뭐, 뭐라고?”

    한편 찰스 브라움은 다시금 예전의 나르시스트적인 면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게 더 짜증 났다.

    “소소 악장과 나윤희 부수석 그리고 학생과 함께 산다고 들었어.”

    “네. 그런데요?”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넌 너의 외모를 가꾸는 법을 배워야 해. 자고로 훌륭한 재능을 지닌 자가 자신을 갈고닦지 않는다면 그 것은 죄악. 내가 가르쳐 주마.”

    “찰스가 하는 것처럼 느끼하게 하고 다닐 생각 없어요.”

    “느, 느끼하다니.”

    느끼하다는 말을 들은 찰스 브라움 의 멍청한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재 밌다.

    ‘더할 나위 없지.’

    굳이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건 그 만큼 베를린 필하모닉에 애정이 깊어졌기 때문이리라.

    새롭게 들어온 단원들도 잘 적응했고 단원들 사이의 친분이 끈끈해질 수록 오케스트라에는 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터플레이라는 몹쓸 놈들이 귀찮게 굴긴 했지만 최근 1년이 너무도 즐겁게 느껴진 만큼 말이다.

    ‘슬슬 준비할까.’

    눈이 내려 오늘은 산책을 접어두고 곧장 출근할 채비를 했다. 씻고 머 리를 말리고 있자니 도진이가 눈을 비비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형아, 일하러 가?”

    “응. 일찍 일어났네?”

    아직 7시밖에 안 됐는데 일어난 걸 보니 기특하다.

    “할아버지 오는 날이니까.”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어머니께 그 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도빈아, 다음 주에 채은이네가 할 아버지랑 같이 놀러 온대.’

    골똘히 생각해 보니 같은 게 아니 라 그랬다.

    “까먹었었어?”

    “그러게.”

    “할아버지가 이놈 해.”

    “하하하하. 무섭겠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는지 신 기할 따름이다. 귀여운 나머지 도진이의 엉덩이를 팡팡 두들겨 주었다.

    “자, 엄마 아빠한테도 인사드려야지?”

    "응."

    그러고 다시 머리를 말리는데 핸드 폰이 울렸다. 이따 봐야지 하고 넘 겼는데 다시 한번 울려서 확인해 보 니 최지훈과 채은이에게서 각각 메 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지훈

    [나 베를린 필하모닉하고 협연 잡 혔어! 대박이지!]

    채은

    [나 지금 어디게?]

    지금보다 더 시끌벅적해질 것 같다.

    이른 시간에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 도착했다. 차갑게 식은 복도를 지나 연습실에 들어섰고 히터를 틀었다.

    적당히 몸을 데우곤 바이올린을 들 어 바이올린 협주곡 13번, D장조 ‘찰스 브라움’의 카덴차 부분을 연주했다.

    찰스 브라움에게 맡길 부분이지만 악보로 만들어놓았는데 그가 어떤 식으로 이 부분을 채울지 생각하면 무척 기대된다.

    “어머. 일찍 왔네?”

    “좋은 아침이에요.”

    연습실에 카밀라가 들어섰다.

    “부지런한 건 알았지만 요즘은 더 그런데?”

    “이게 다 세프 때문이에요. 은근슬 쩍 지휘권을 넘기고 있으니까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편제는 예전과 매우 달라졌는데 역시나 A팀과 B팀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A팀과 B팀 모두 푸르트벵글러가 통솔하고 있지만 연말 연주 회를 시작으로 B팀의 일을 조금씩 내게 넘기고 있었다.

    이번 베를린 필하모닉 연말 연주회는 3부로 나뉘어 첫 1부는 B팀의 ‘찰스 브라움’, 2부는 A팀의 ‘로엔그 린’, 3부는 A팀과 B팀 모두가 연주 하는 내 D단조 교향곡(합창)이었다.

    1부의 지휘와 3부의 악장 역할을 준비해야 하기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만큼 널 믿고 있으니까. 게다가 세프도 나이가 있잖아? B팀까지 신 경 쓸 힘은 없을 거야.”

    푸르트벵글러가 나이를 먹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 건강한 편이다.

    나 역시 하루빨리 온전한 지휘자가 되고 싶지만 그렇다고 푸르트벵글러 의 은퇴를 바라는 건 아니다.

    가급적 나는 그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을 오래 듣고 싶다.

    내 표정에서 불만을 본 모양인지 카밀라 앤더슨이 빙그레 웃더니 핸 드폰을 꺼내 무엇인가를 찾았다.

    “재밌는 일이 생겼어.”

    그녀의 핸드폰 액정에는 2023년 최 고의 오케스트라는 어디인지에 대해 예상하는 기사가 떠 있었다.

    “이게 왜요?”

    “Orchestra of the year. 크리크 준 비 위원회 기억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를 중심으로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가 발족했는데 내년부터는 각 언론사가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선정하는 모양이야. 그것들을 취합해 서 내년 겨울에 발표한대. 즉, 가장 많은 언론사에서 선정한 악단이 최고의 영예를 얻는 거야.”

    내가 이런 일에 관심 없는 걸 아는 카밀라였기에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빌헬름은 인터플레이의 코를 납작 하게 만들어줄 생각인 것 같던데?”

    지기 싫어하는 고집불통 푸르트벵글러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그만 그런 게 아님을 간과 하고 있었다.

    단원들이 모이자 OOTY(Orchestra of the year) 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 작했고 기운과 자부심이 넘치는 그들은 벌써부터 투지를 불태웠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인터플레이의 행 적과 레몽 도네크와 몇몇 단원의 런 던행 때문에 경쟁의식이 더욱 강해진 것 같다.

    “당연히 우리가 해야지!”

    “우! 우! 우! 우!”

    마누엘 노이어의 외침에 한스 등이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는데 꼭 전쟁을 앞둔 부족전사처럼 보였다.

    “아하하. 재밌겠는데? 이거 근데 기 준이 뭐야?”

    이승희 역시 흥미를 보였다.

    “카밀라 말로는 10월까지의 언론사 별 선정 수에 따른대요.”

    “타임즈, 슈피겔, 그래모폰 등 백여 개 언론사에서 선정한다고 하는데 솔 직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어느 한 악 단이 특출할 것 같진 않아.”

    내가 설명하자 케르바 슈타인이 부연설명을 했다.

    “왜요? 당연히 우리랑 빈, 암스테르 담 삼파전 아닌가? 그치, 윤희야?”

    “마, 마, 마, 맞아요.”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빨리 끄덕이던지 목이 떨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연고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비슷한 수준이라면 일단 자기 연고의 오케스트라를 1순위로 올릴 테니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어.”

    “그렇지는 않을 거다.”

    “세프.”

    오늘은 B팀만 연습하는데 푸르트벵글러가 연습실에 방문하자 사람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눈이 쌓인 모자를 툭툭 털어내며 들어온 푸르트벵글러가 주변을 둘러 본 뒤 말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게다가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가 주관하니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진 못 할 거다.”

    심술궂은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중 대발표를 할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런던을 쳐부순다. 다들 각오해!”

    “예, 세프”

    예상대로 의지 가득히 선전포고를 날렸다.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니 할아버지 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으셨다. 어렸을 적부터 반복된 일이지만 익숙해 질 수 없는 힘이다.

    숨이 막힌다.

    “하, 항복.”

    “하하하하! 잘 지냈니, 음?”

    “그럼요. 할아버지도 건강해 보이시네요.”

    “욘석. 잘 지내면서 일 년 내내 할 애비 한 번 보러 안 오는구나.”

    맞는 말이라 뭐라 답할 수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 증축 기간에 살짝 시간이 남았으니 한 번쯤 갔어도 됐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부담 없을 때 놀러 갈게요. 계시는 동안 같이 있어요.”

    “그래. 껄껄.”

    할아버지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놀이방으로 향하셨다.

    이 시간이면 도진이가 한창 만화영 화에 빠져 있을 때인데 아마 도진이 와 놀고 싶으신 모양이다.

    도진이가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할 아버지는 서운해하면서도 도진이를 보고 계실 것 같다.

    그때 최지훈과 채은이가 달려들었다.

    “도빈아!”

    “오빠!”

    채은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온 것은 알고 있었는데 최지훈도 있을 줄은 몰랐다.

    “놀랬지!”

    “이야기 들었어. 난 지훈이가 있어 서 놀랐는데. 콩쿠르 나간다 하지 않았어?”

    “나간다 했어!”

    채은이가 내 뒷말을 따라 하며 최지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채은 이가 무척 들떠 있는데 아무래도 놀러 온 것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다.

    최지훈을 보니 씩 하고 웃으며 핸 드폰으로 기사를 보여줬다.

    “우승했지!”

    “와, 대박!”

    채은이가 뿌듯해하는 최지훈이 만 족할 만큼 크게 반응해 주었다.

    “축하해.”

    “약해. 약해. 더 기뻐해 달라고.”

    “콩쿠르 그만 다니고 앨범에 집중 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축하해 줘서 고마워.”

    씩 하고 웃곤 최지훈을 끌어안아 등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정진하고 있는 형제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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