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96화
44. 맑은 오보에와 불쌍한 팀파니(3)
유장혁 회장의 말에 최우철이 작게 웃었다.
그가 받은 서류는 전 세계를 시장으로 한 전문 음악 사업의 개요였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기본으로 제작, 유통 전반을 아우르며 스피커와 이어폰 등 기기까지 접목시킨 초월적 규모였다.
그러나 이 일의 요지에 대해 최우 철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인터플레이를 망가뜨리 자는 이야기 아니십니까.”
“망가뜨리다니. 그런 표현은 좋지 않네. 밟는다는 고상한 말이 있지 않나.”
‘황당하군.’
최우철은 일단 서류를 넘기며 천천 히 그것을 읽었다.
“……레드오션인 시장이라 진입하 기 어려울 겁니다. 스트리밍은 뉴튜브와 웹플릭스, 인터플레이가 장악 했고 음반 제작이야 두말할 것도 없죠. 음향기기 역시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해서 그리 좋은 선택 같지는 않습니다만.”
최우철의 말에 유장혁이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를 부르지 않았나.”
“이 업체는 좋은 명분이 되어줄 걸 세.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자네와 지훈이의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고.”
“지훈이는 혼자서도 잘할 겁니다.
도와주고는 싶지만 저를 닮아 자립 심이 강하거든요.”
“그럼 적적한 삶을 달랠 소일거리 가 생각하면 되겠지. 옛 생각도 하 면서 말이야.”
영국 최대의 재벌가 버만 그룹을 상대하는 일인데 유장혁 회장의 얼 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나왔고 눈에서는 강한 의지가 비쳤다.
여든 먹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 지 않았고 여전히 박력 있는 모습에 최우철은 숨을 돌린 뒤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가이드라인은 있습니까?”
“한 친구가 재밌는 말을 해주더군. 콘텐츠 사업을 하는 업체의 시장 점 유율을 빼앗는 것보다 콘텐츠 제공 루트를 막는 게 효과적이라고 말이 야.”
유장혁 회장의 말을 들은 최우철이 작게 웃었다.
자신을 EI전자의 사장으로 만들어 주었던 인물이 떠올랐다.
“차승현입니까?”
“자네랑 같이 불렀는데 거절하더 군. 아쉽게 되었어.”
‘콘텐츠 제공 루트를 막는다라.’
그렇지 않아도 아들 최지훈에게 여 러 차례 러브콜을 보냈던 인터플레 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해 둔 상태였다.
또 그들이 어떤 식으로 시장을 확 보해 나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에 그의 머리에 대충의 계획이 잡히 기 시작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 뭔가.”
“이건 회장님 개인의 보복입니까?”
“그럴 리가. 열심히 사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뭐라고 보복을 하겠나. 단지 사업가로서 영역 확장에 욕심을 낼 뿐이지. 그 과정에서 어 느 한쪽이 도태되는 거야 늘 있는 일이고.”
최우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사업가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인터플레이의 행동은 사세를 확보하기 위한 지극히 자연스러 운 행보로 보였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아군을 끌어들인 뒤 독점을 통해 시장성을 확보한다.
그 일에 도덕적 관념을 적용시킬 사업가는 없었다.
만약 유장혁 회장이 사랑해 마지않는 손자에 대한 보복을 생각했더라 면 함께하지 않았을 터.
‘어떻게 시작할지, 인터플레이를 어떻게 무너뜨릴지 계산되어 있군. …… 80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현역이란 말 인가.’
서류 검토를 마친 최우철이 입을 열었다.
“소일거리가 하나 생겼군요.”
“잘 생각했네.”
주말.
오랜만에 진 마르코로부터 연락이 왔다.
2년 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빈 필하모닉의 오보에 부수석이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초대를 해주어 기뻤다.
‘영입할 때 힘들겠지만.’
아무튼 그가 빈 필의 연주회에 초 대했기에 가족들과 박선영, 소소, 진달래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오후 3시쯤 연주회장 앞에 이르자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보지 못했음에도 한 눈에 진 마르코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야!”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진 마르코는 앳된 모습을 찾을 수 없이 장성했다.
“오랜만이에요, 마르코.”
“6년 만이지? 와줘서 정말 고마워.”
반갑게 인사한 마르코가 우리 일행 에게 인사했고 나와 가족도 마르코 가족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르코의 어머니 티나 마르코는 잘츠부르크 축제 때 한 번 만났는데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반가워요, 잘 지내셨죠?”
“덕분에 잘 지냈어요. 오시는데 불 편하진 않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가장을 잃고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려움을 겪었을 모자는 진 마 르코가 빈 필에 입단하면서 행복을 되찾았다.
애틋한 두 사람을 보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럼 이따 봐!”
손을 흔들고 서둘러 대기실로 향하는 마르코를 배웅했고 티나 마르코 와 함께 빈 필의 연주를 듣기 위해 객석으로 향했다.
시작은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빈 필의 연주는 여전히 훌륭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라이벌이라 할 만큼 그 높은 수준을 유지한 채 고 전을 탐구하는 느낌이라 옛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듯했다.
연주회를 들은 뒤에는 오페라 공연 전에 마르코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두다니?”
진 마르코가 티나 마르코를 보더니 이내 미소 지은 채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도와준 뒤로 빈 필의 연주에 따라갈 순 있었지만 그게 내 연주는 아니더라고.”
티나 마르코는 그간 아들이 아버지 의 뒤를 좇는 것을 걱정스레 지켜본 듯했다.
빈 필하모닉이라는 근사한 악단에 들어가 조금씩 인정받는 모습은 대 견했지만 그럴수록 아들의 맑고 자 유분방한 오보에가 틀에 갇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나 역 시 걱정하던 이야기를 모자지간에 계속해 이야기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연주를 찾을 때까지는 혼자 활동해 보려고 해. 어렵겠지 만.”
솔로 오보이스트는 활동이 많지 않을 텐데 큰 결심을 했다.
그러나 도전하는 그 모습이 무척 밝고 굳세어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샛별 엔터테인먼트는 어때요?”
박선영이 불쑥 나서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시작했다.
“샛별 엔터테인먼트라면 분명 예전 에 도빈이가……
“네! 지금은 니나 케베리히, 엘리 자베타 툭타미셰바 등도 활동하고 있어요. 솔로 오보이스트라면 활동 이 제한적일 텐데 개인 리사이틀은 물론 협연도 준비해 볼게요.”
“그, 그렇게나요?”
“물론이죠. 빈 필의 부수석 출신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샛별 엔터테인먼트에 있으면 나중 에 영입하기도 쉬울 테니까.
박선영이 열심히 영업을 하도록 두 고는 도진이에게 샐러드를 주었다.
짧은 오스트리아 나들이를 다녀온 뒤 겨울이 불쑥 다가왔다.
예년보다 훨씬 추웠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성공적인 복귀 연주회를 가 질 수 있었다.
몇 사람의 이탈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더욱 단단해졌고 새로 들인 단 원들이 빨리 적응하여 연말, 연초 연주회를 적절히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0명이나 된 베를린 필하모닉은 A팀과 B팀으로 나누어졌고 기존 A 팀은 정기 연주회를, 신인들로 구성 된 B팀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만큼 실내악이나 오페라 연주, 타지로 이 동하는 일 등을 맡았다.
B팀은 푸르트벵글러에게 연일 혹 독하게 교육받아야 했지만 그 덕에 A팀이 가지고 있었던 부담이 크게 해소되었다.
그렇게 점차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고 진달래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나섰다.
“생활비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정말 그러고 싶니?”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네! 어차피 시험에 떨어졌으니까 말도 배울 겸해서요.”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시험에 합격 한 도진이가 월반에 성공(잘은 모르겠지만 뭔가를 증명해낸 것으로 특 혜를 받았다고 한다), 진달래는 어 학시험에서 떨어졌는데.
말을 빨리 익히기 위해서라도 사회 생활을 하길 바랐던 나로서도 조금 은 걱정되었다.
노력했으면 싶지만 무리하진 않았으면 한다.
“그래도……
“괜찮아요. 저 알바 많이 해봤어요. 게다가 일하는 곳도 근처인 걸요.”
“어디?”
“요 앞에 카레집이요. 사장님도 한국 사람이라서 괜찮을 거예요.”
훌륭한 선택이다.
요 앞 카레집 슈퍼 슈바인(슈퍼 돼지)이라면 나도 연습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가끔 들리는데 한정 판매를 하는 슈니첼 특제 카레는 먹기 힘든, 어마어마한 요리다.
진달래가 직원으로 있다면 굳이 들리지 않고 재료가 남아 있는지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욕적이고 행동력 있는 모습에 어 머니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하지만 혹시 무슨 일 생기 거나 하면 꼭 말해주는 거야? 여기 있는 동안에는 칠삼 씨 대신 내가 보호자니까.”
“옙!”
진달래가 힘차게 대답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슈니 첼 특제 카레를 먹기 위해 슈퍼 슈 바인으로 향했다.
매일 일정량만을 파는데 인기가 많은 집이라 종종 헛걸음을 했는데 이 제는 크나큰 아군이 생겼다.
“ 여보세요.”
-바빠! 왜!
“슈니첼 특제 카레 남았어?”
—어? 어…… 어!
정찰병에게 희소식을 확인한 뒤 발을 재촉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슈퍼 슈바인의 사장 김덕배가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언제 들어도 호쾌한 목소리다.
TV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실황 영상이 틀어져 있었다.
“오, 도빈이구나.”
“안녕하세요.”
“어? 여긴 왜 왔어?”
“단골이시지. 어서 안내해 드려.”
“엑.”
김덕배가 우람한 팔로 진달래를 밀었다. 엄청 불만이라는 표정으로 주문을 받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는 사이냐?”
“네. 친구예요. 어때요?”
“싹싹하고 부지런하지. 요즘 보기 드문 아이야. 조금 덜렁거리기는 하지만. 하하하!”
좋게 봐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오스트리아 대학 병원에서 의수를 착용한 진달래는 처음에는 신경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힘들어했지만 결 국 잘 적응해냈다.
‘의지가 있으니까.’
원래 아득바득 살아온 녀석이 기특 했다.
요즘에는 베이스도 치고 일상생활 에 차차 적응해 나가고 있으니 본래 자기 손만큼은 아니더라도 만족하는 듯싶다.
“크아! 주인장, 이거 정말 최고구 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요란하 게 카레를 먹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김덕배에게 인사했다.
머리 한쪽에 문신이 있는 대머리다.
“그럼! 버섯과 양파로 맛을 낸 우 리 카레는 최고지. 어때. 더 줄까?”
“음! 이 밥도 추가로!”
호쾌한 주인장과 호쾌한 손님이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아니, 배도빈이잖아.”
카레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음식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를 보곤 놀랐다.
“안녕하세요.”
“이럴 수가. 내가 베를린의 마왕을 직접 만나다니. 영광이야. 영광.”
그가 서둘러 냅킨으로 손을 닦더니 악수를 청했다.
원래는 이런 식의 인사는 달갑지
않아 하지만 묘하게 붙임성 있는 남 자의 악수를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손을 잡았다.
팔뚝이 두툼하고 손바닥은 거칠다.
“피셔 디스카우. 팀파니스트지.”
“피셔 디스카우?”
독일 출신의 빼어난 가수가 떠올라 되물어 보니 그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버지께서 디트리히 피 셔 디스카우의 팬이어서 말이지. 아, 당신도 여기 단골인가?”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카레는 남자의 음식이지. 특 히 이 밥. 슈니첼까지 곁들이면 그 야말로 무적의 저녁이란 말씀이야.”
그가 팔짱을 꼈는데 우락부락한 팔 뚝이 엄청나게 도드라졌다.
‘재밌는 사람이네.’
“그리고 당신의 음악도 남자의 음악이지. 암! 그 강렬함은 잊을 수가 없어. 음악은 그렇게 힘 있는 게 최 고란 말이지.”
호쾌한 성격에다 대머리, 우락부락 한 팔뚝의 팀파니스트라니.
이렇게 악기에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팀파니스트라 했죠? 어디서 있어요?”
“쾰른 서독 방송에 있다가 얼마 전 이쪽으로 이사했지.”
“그만둔 거예요?”
“음. 이렇게 된 이상 감출 이유가 없네. 하하! 이게 다 배도빈, 당신 때문이야.”
그가 자세를 돌려 벽에 걸린 TV를 향해 손을 뻗었고.
마침 뒤에 진달래가 슈니첼 특제 카레를 들고 내게 오는 중이었다.
“슈니첼 특제 카. 아!”
천천히.
놀란 진달래의 얼굴과 피셔 디스카 우의 손에 맞아 튕긴 그릇과 쏟아지는 카레가 눈앞에 천천히 움직였다.
“끄아아아악!”
깜짝 놀라 일어섰는데 다행히 진달 래는 다치지 않아 보였고 등을 보인 피셔 디스카우의 사타구니에 카레가 쏟아져 있었다.
“괘, 괜찮아요?”
진달래가 서둘러 행주를 찾았고 슈 퍼 슈바인은 갑작스러운 소동에 시 끄러워졌다.
잠시 뒤.
어떻게든 처리를 한 피셔 디스카우 가 죽다 살아났다는 표정으로 벽에 기대었다.
“정말 괜찮아요?”
진달래가 걱정스레 물었고 피셔 디 스카우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런 걸로 쓰러질 남자가 아니다. 괜찮아.”
피셔 디스카우가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런 어쩌지. 도빈아, 슈니첼이 떨어졌는데.”
“••••••네?”
오늘도 못 먹다니.
최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