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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95화 (19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95화

    44. 맑은 오보에와 불쌍한 팀파니(2)

    찰스 브라움과 레몽 도네크의 소식은 팬들에게 큰 충격인 것 이상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에 전해졌다.

    아침, 시가를 태우며 느긋하게 신문을 펼친 푸르트벵글러의 손이 크 게 떨렸다.

    전화도 방문도 거절하던 그였기에 더욱 걱정하고 있었던 카밀라 앤더 슨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커피를 내리던 배도빈은 박선영이 전달한 소식을 듣고 눈썹을 좁혔다.

    * * *

    해당 기사가 발표되기 하루 전.

    나윤희는 네이즈 엔터테인먼트 2팀 의 대리이자 옛 자신의 매니저였던 이재은으로부터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잠깐 만나 할 이야기가 있어.]

    [무슨 일이야기

    [잠깐이면 돼. 부탁이야.]

    될 수 있으면 만나고 싶지 않았지 만 몇 년이나 함께한 이재은이 부탁 한다고 하니 나윤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하고 마음 불편하게 있는 것보 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자고 생각하며 이재은이 언급한 카페로 향했다.

    “여기.”

    이재은이 손을 들었고 나윤희는 숨을 한번 내쉰 다음 그녀와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인데?”

    “오자마자? 주스라도 마셔.”

    “ 괜찮아.”

    나윤희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음을 인지한 이재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인터플레이가 네이즈를 합병했어. 덕분에 연봉 좀 올랐지.”

    이재은을 경계하고 있던 나윤희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비롯해 그간 인 터플레이가 얼마나 많은 음악가를 상대로 자본과 인프라를 앞세웠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니도 알다시피 인터플레이는 앞으로 더 커질 거야. 유럽에서는 독일 과 동유럽 빼고는 거의 다 인터플레 이가 장악했으니까. 네덜란드의 암스 테르담도 최근 힘 못 쓰고 있는 거 알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이쪽으로 오라고.”

    “뭐, 뭐라고?”

    이재은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내 첫 연주자라서 그래. 언니 실 력이면 정말 더 잘될 수 있어. 내가 괜히 이런 말 하는 것 같아?”

    나윤희가 무엇을 말하려 했지만 이 재은이 그녀의 말을 막으며 주장을 이어나갔다.

    “인터플레이에서 제대로 푸시 받으면 그것만으로도 유럽이랑 미국 동 부 시장에 언니 음악이 일주일 내내 울릴 거야. 실력이 없으면 말도 안 해. 언니는 그렇게 프로모션 받으면 분명 뜰 수 있다니까?”

    “ 나는.”

    “돈 벌고 싶어 했잖아. 그 길을 걷 게 해준다잖아.”

    나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그러지 않을래.”

    “뭐가 문제야? 네이즈 때? 언니는 그럼 아직 실력도 안 되는 연주자를 밀어주는 게 옳은 거라 생각해? 네 이즈는 그때 언니가 아직이라 판단 했던 거고, 대신 기다려줬잖아. 이제 언니가 실력을 갖췄으니 도와준다는 게 그렇게 납득이 안 돼?”

    ‘맞는 말일지도 몰라.’

    나윤희는 답답하다는 듯 호소하는 이재은을 보며 혹시 그녀의 말이 옳 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윤희는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음을 알고 있었다.

    베를린 필에 합류한 뒤로 그 생각 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돈이 전부가 아니야. 재은아.”

    나윤희의 말에 그때까지 열변을 토 하고 있던 이재은이 헛웃음을 지었다.

    “바보 같은 말 좀 그만해. 돈 좀 벌 어서 이제 배 좀 찼어? 돈 백만 원 없어서 라면만 먹던 시절 생각 안 나? 돈이 전부가 아니라니. 하참. 언 니, 돈이 전부야. 돈 없으면 그렇게 좋아하는 바이올린이고 언니 아버지 수술도 못 해드렸어.”

    나윤희가 테이블 아래 주먹을 꾹 쥐었다. 파르르 떨렸지만 자꾸만 말을 더듬을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아버지가 그녀 에게 무엇이 소중한지 확신을 주었던 덕분이었다.

    “맞아. 배가 좀 찼어. 그래서 내 길 찾으러 가는 거야.”

    “뭐?”

    “매일 울고 주저앉고 싶어도 돈 벌 어야 하니까 네이즈가 시키는 대로 했어. 네 말대로 돈이 없으면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아버지도 잃었을 테니까.”

    나윤희는 잔혹하기까지 했던 스케 줄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제 좀 여유를 찾아서 내 가 하고 싶은 음악 하겠다는 게 네 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보이니?”

    “그래! 바보 같아. 눈앞에 몇억이 기다리고 있는데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그 돈보다 그래서 편해질 삶보다 내겐, 내겐 좋은 음악을 하는 게 더 중요해.”

    비싼 차를 사고 좋은 옷을 입고 매일 호화로운 음식을 먹는 것보다 중요했다.

    존경하는 음악가들과 함께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삶이 그녀에게 보다 값진 삶이었다.

    이재은은 그런 나윤희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윤희는 이재은의 말을 인 정하지 못한다.

    서로 의견을 좁힐 수 없다고 판단 했기에 이재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인터플레이는 더욱 커질 거야. 음악 듣는 사람들은 모두 인 터플레이에서 듣게 될 테고. 그때가 되어서 후회하지 마.”

    이재은이 카페를 나섰고 나윤희는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 멋있는데?”

    깜짝 놀란 나윤희가 고개를 돌렸고 하늘 같은 선배이자 롤모델인 이승희가 그녀 뒤에서 서 있었다.

    능글맞게 웃는 그녀를 보고 나윤희 가 당황했다.

    “어, 언니.”

    이승희가 이재은이 앉았던 자리에 자리했다.

    “일부러 들은 건 아니야. 커피 한 잔하려고 들어왔는데 심각한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기다렸어.”

    “……네.”

    “걔 진짜 싸가지 없더라. 원래 같이 일했다던 애가 걔지?”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인 채 주스를 빨아 마시는 나윤희를 보며 이승희가 기특하 다는 듯 말했다.

    “정말 멋졌어. 말도 더듬고 소심해 서 걱정했는데 엄청 똑 부러지던 걸?”

    “그, 그렇지 않아요.”

    단지 소중한 것을 부정당해 필사적 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승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더 나은 삶을 바라기 마련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봉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흔히 생각 하는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선택의 기로에서 ‘하고 싶은 음악’을 선택한 어린 동생이 기특했던 것이다.

    그것이 ‘베를린 필의 음악’이라 더 욱 기쁜 것이고 말이다.

    “실은 나한테도 제안이 왔었거든.”

    “ 네?”

    “왜. 도이체 오퍼 오케스트라에 단 원들이 런던으로 갔다며. 아마 우리 쪽에서 알게 모르게 그런 연락을 받 은 사람이 많을 거야.”

    “그럴 수가……

    “정말 기가 찰 노릇이지. 돈으로 사람을 사려고 하다니. 그게 돈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음에 안 들어.”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여러 음악가와 음악 단체와 의 연합으로 뭉쳐 인터플레이의 언 론 플레이에 대항했고.

    베를린 환상곡과 투란도트의 성공으로 자본의 힘에 음악으로 맞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긍정적인 추세야. 인터플레이를 이 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는 하지

    만 그것만 보는 사람은 늘지 않고 있어. 분기마다 10% 이상 성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우리도 선방하고 있다는 거지.”

    “인터플레이는 관심 없어요. 우리 가 잘되는 게 중요하니까.”

    “두말할 필요 있니? 네 덕분에 기 존 팬 이외에 새로 유입되는 사람이 정말로 많아. 이번 연도 하반기는 확실히 우리의 승리야.”

    카밀라와 히무라는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이 인터플레이의 독주를 막아 냈다며 기뻐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은 천천히 단원들 사이에 피어나 굳어졌고.

    다른 오케스트라와 개인 연주자들 도 인터플레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 들만의 음악을 해나가는 분위기가 갖춰진 듯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무척 바람직하게 여겼고 푸르트벵글러나 사카모토, 마리 얀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베를린에 큰 빛을 가져다준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감사합니다. 제가 드리는 이 훈장은 베를린 전체의 마음입니다.”

    베를린 시장이 내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이체 오퍼의 투란도트는 오페라가 발전할 방향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에코 클래식 상이라는 것을 받고 언론과 팬들은 크게 기뻐해 주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지 만 우리의 음악이 사랑받고 있음에 기뻤다.

    그런 팬들의 마음에 부응하고 싶었다.

    “자자, 연습합시다.”

    “힘내자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자발적으로 레퍼토리를 늘리고 연주의 질을 높이 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콘서트홀 개관에 맞춰 최고의 음악을 하기 위해 연습을 이어나갔다.

    타이트한 일정으로 인한 연주자들 의 컨디션 저하를 생각해 단원들도 유례없이 많이 뽑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레몽 도네크를 비롯한 세 명의 이적 소식은 너무도 큰 충 격으로 다가왔다.

    연습을 시작하기 전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참다못한 한스가 나서서 모 두의 속마음을 대변했다.

    “어떻게 우리에게 한마디 말도 안 하고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 레몽 도네크한테 무슨 말 들은 사람 없어요?”

    “그만해.”

    “노이어는 분하지도 않아요? 우리는 대체 뭐였냐고요.”

    “한스, 도네크도 사정이 있었을 거 야. 우리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제가 화나는 건 그가 자기 힘든 건 우리에게 한마디도 털어놓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에겐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거잖아. 지금 껏 그 사람을 믿고 연주를 해온 우리는 뭐가 되냐고요!”

    다들 말이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레몽 도네크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한스의 말처럼 우 리에게 아픈 아들을 위한 치료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음에 서운한 것이다.

    그와 가장 친했던 제1바이올린의 존 아서에게 아들이 아프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의 이적 사실 자체가 주는 충격 보다 스스로 감추고 우리를 피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신뢰의 문제.

    자부심과 소속감으로 뭉쳐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레몽 도네크뿐만이 아니잖아요. 세 명이나 나갔다고요. 그것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인터플레이 로요.”

    “……빌어먹을. 다들 솔직하게 말 해보자고. 여기 제안 안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솔직히 다 들 흔들렸잖아. 안 그래?”

    레몽 도네크와 단원들의 일탈에 분 노한 사람들이 불평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간 혹독한 스케줄을 소화해내면 서까지 지켜왔던 자부심에 상처를 받았던 탓에.

    일부는 소속을 바꾼 이들을 욕했고 또 일부는 사태를 관망했으며 또 나 머지는 인터플레이의 좋은 환경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섰다.

    “한스의 말이 맞아요.”

    “••••••악장.”

    “하지만 전 그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부정하고 싶진 않을 거예요. 즐거웠으니까.”

    나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떠났고 우리는 새로 운 단원들을 맞이해 새로운 베를린 필을 만들어 나가야 해요. 베를린 환 상곡과 투란도트를 통해 알게 되었잖아요. 우리의 음악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하면 서 힘주어 말했다.

    “한 명의 단원은 소중하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이란 악기보다 소중한 단원은 없어요. 그리고 한 명의 팬

    보다 위대한 악단은 있을 수 없어요. 우리는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하면 돼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 럼.”

    나윤희가 일어섰다.

    “마, 맞아요. 저, 저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베를린의 음악이 좋아요. 여, 여러분과 함께하는 음악이 좋아요.”

    마누엘 노이어가 나윤희의 어깨에 손을 얹고 힘을 보탰다.

    “배도빈 악장과 나윤희 부수석의 말이 맞아. 갈 사람이 갔을 뿐이야. 우리는 우리의 음악을 해야지.”

    이승희가 일어섰다.

    “불만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연습할 때랑 무대 위에서는 영향이 없었으면 좋겠어. 악장 말대로 우리 음악을 들으려고 온 팬들 앞에 부끄 럽고 싶진 않아. 다들 그렇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할 뿐이다.

    WH그룹의 유장혁 회장의 부름에 한 남자가 사옥을 방문했다.

    맨손으로 시작해 EI전자의 사장직 까지 오른 굴지의 사업가 최우철이었다.

    “어서 오게.”

    유장혁 회장의 비서가 자리를 잡고 앉은 최우철 앞에 서류를 두고는 자리를 피했다.

    최우철이 눈썹을 좁히고 그것을 봤다.

    “아들에게 떳떳하고 싶은 사람에게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하하하! 재밌을 것 같지 않나? 옛날 생각도 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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