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92화
43. 도전(6)
공연을 5분 앞두었다.
개인 대기실에 있다가 단원들이 무대로 오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스테이지 뒤로 향했고.
한 명, 한 명과 눈인사를 하며 단원들을 무대로 올려보냈다.
악장 케르바 슈타인의 차례에 그가 말없이 씩 하고 웃어보였다.
그와 단원들의 눈에서 나를 신뢰하 고 있음이 전해졌다.
단원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악기 점검은 몇 번이나 했을 텐데 각자 위치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몸을 푼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도 긴장을 풀어내고자 소리를 내보기도 하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공연을 준 비했다.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웅성 이고 있다.
75,000명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당연한 일일 터.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은 박수로 단원들을 맞이했다. 저만한 수가 모이 니 그것만으로도 귀가 떨어질 듯했다.
케르바 슈타인이 일어서 오보에 수석에게 시선을 주었고 그가 A음을 내어 주자들이 마지막 점검을 시작 했다.
“떨린다.”
곁에 있는 소소가 드물게 긴장했다.
여러 차례 개인 무대를 가졌던 그 녀도 이런 자리는 처음일 것이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베를린 필과 도 이체 오퍼 그리고 내게도 처음이었고 앞으로 이런 공연을 또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성공시켜야 해.’
이번 공연의 성패로 앞으로 몇 번 더 가질 수 있을지 결정된다.
재정난과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도 이체 오퍼의 사운이 걸려 있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세계 최고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푸르트벵글러가 이렇게 큰 무대의 지휘를 맡긴 것과 팬들의 마음에 부응하기 위해.
베를린 필과 나를 공격하는 이들에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이 일을 받아들인 것이다.
말 그대로 도전이다.
“올라가죠.”
"응."
소소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관중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냈고 그 가슴 벅찬 인사가 가슴을 때렸다.
‘보라, 벗이여.’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나를 들들 볶았던 친구를 떠올렸다.
처절한 삶 끝에 마지막 불꽃을 불살랐던 피아니스트.
그의 말처럼 세상은 나를 희망이라 부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이는 나를 음악의 신으로 어떤 이는 마왕으로 또 다른 이는 타락했다 한다.
사명감을 주려던 그의 마음을 이해 하면서도 그에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노래하는가.’
희망인 나를?
아니다.
음악사를 위해?
더더욱 아니다.
‘다른 무엇 아닌 저들을 위해 노래할 뿐이다.’
오늘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든 저 많은 이에게 기쁨을 주기 위함이다.
‘나를 위해 노래할 뿐이다.’
단지 나와 동료와 저들을 위해 소리 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만 생각하기에도 이 육신과 영혼은 벅차오른다.
나는 악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저들과 함께 웃고 슬퍼하며 남기를 바 란다.
박수 소리가 사그라지고.
가슴 깊이 감사하며 허리를 숙였다. 더욱더 커지는 함성.
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봉을 들자.
노래할 때다.
관객들은 숨죽인 채 무대를 보았다.
웅장하게 들리는 튜바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신비로운 음 속에서 비극 적이고 기형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부탁한다.’
도이체 오퍼의 총감독 구스타프 제르너는 무대 뒤에서 지휘자 배도빈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배도빈의 악보를 본 뒤 크나 큰 모험을 결심했었다.
기존 투란도트의 서사를 따르되 부각하는 인물을 투란도트와 칼라프에 서류로 이동시킨 것.
고전 중의 대작에 손을 대는 일은 배도빈처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음악가마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문 제였으나 그는 도이체 오퍼의 미래를 위해 과감히 배도빈과 상의해 투 란도트의 마지막 부분을 바꿨다.
긴장감 속에 음악은 가슴을 더욱 쥐고 흔들었다.
무대는 이제 막 3막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투란도트의 세 문제를 맞힌 칼라프. 약속대로 두 사람은 결혼해야 하지 만 투란도트는 납득하지 않는다.
칼라프는 투란도트에게 날이 밝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기꺼 이 죽겠다고 한다.
칼라프는 승리를 확신한 채 노래하 고(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 ‘공주는 잠 못 이루고’) 투란 도트는 칼라프의 아버지 티무르와 그의 시종 류를 잡아들인다.
‘저 둘은 나를 모르오.’
칼라프는 부정한다.
‘나는 그의 이름을 듣고 싶다.’
투란도트가 티무르와 류를 다그치고.
류는 오직 자신만이 그의 이름을 안다고 말한다.
오케스트라가 벼락이 내리치듯 긴 장감을 조성했다.
칼라프는 아버지와 류를 살리기 위 해 노예 주제에 무엇을 아냐고 화를 낸다.
칼라프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티무르도 류도 투란도트로 부터 고문받을 것이 당연했지만.
류는 자신의 가슴속에만 칼라프의 이름이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 말한다.
고문 끝에도 끝끝내 칼라프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류에게 투란도트가 묻는다.
‘무엇이 너를 그토록 강하게 하느냐.’
‘사랑입니다.’
죽음을 자청하며 결국 칼라프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류.
싸늘하게 식은 그녀를 위해 티무르는 오열한다.
그리고 배도빈과 구스타프 제르너 에 의해 재구성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절함.
오케스트라는 단지 하루를 살기 위 해 몸도 마음도 영혼의 자유마저도 억압당한 류를 노래했다.
‘왜 일부러 고난의 길을 걷느냐.’
‘예전 왕궁에서 왕자님이 미소 지 어주셨습니다.’
단 한 번의 미소로 시작되었다는 류의 대사로 풀어낸 이야기는 관객 들의 가슴을 짓이겼다.
아무런 희망도 꿈도 없이 그저 시 키는 대로 움직일 뿐인 노예의 삶 속에서.
류는 기억조차 못 하는 미소에 의 지해 살아왔던 것이었다.
소소의 얼후가 류 역의 리릭 소프 라노와 함께 구슬프게 그러나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노래했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는 이 기형적인 이야기.
배도빈과 구스타프는 류의 감정을 극대화시켜 그 비극적 이야기를 들 려주고 보여주었다.
그녀에게는 칼라프가 전부였음을 알리며 그녀의 죽음을 함께 슬퍼할 수 있도록 했다.
두 시간에 달하는 공연이 막을 내렸다.
누가 먼저라 할 수 없었다.
수백 명이 일어나 힘차게 박수를 보냈고 그에 따라 앉아 있는 사람 없이 모든 이가 일어서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이 체 오퍼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 사이에 처음 오페라를 접한 진 달래는 무대에 압도되어 온몸에 희 열을 느끼고 있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대와 음악이 어떤 상황을 말하는지 대략이나마 알려주었다.
아니.
그 감정만큼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사정없이 가슴을 후벼 파는 오케스트라와 듣고 있으면 울 것만 같은 류의 노래.
배도빈과 베를린 필, 도이체 오퍼가 혼신을 다했던 이 날의 투란도트는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았고.
진달래와 몇몇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공연을 하기 전부터 전 세계의 주 목을 받았던 구스타프 제르너 총감 독, 배도빈 지휘의 투란도트는 첫 공연을 마친 즉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과감한 편곡과 고전의 재해석을 통 해 사람들은 투란도트를 보다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구스타프 제르너의 재해석은 탁월 했습니다. 사실 류의 희생을 통해 얻은 칼리프와 투란도트의 사랑은 얼핏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너 무도 가혹한 면이 있었죠.”
“구스타프 제르너가 그 아이디어를 배도빈으로부터 얻었다고 발표했죠. 푸치니와 그 제자의 대작을 과감히 편곡했으니 말이에요.”
“정말 신선하고도 깊이 있는 공연 이었습니다. 도이체 오퍼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만나 더욱 진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군요.”
“네. 베를린 필하모닉, 아니, 배도빈을 통해 정체되어 있던 클래식 음악에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틀림 없이요.”
유명 음악 평론가들을 모여놓고 진 행한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새로운 투란도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새로 발표되는 곡은 거의 없고 반 복했던 레퍼토리가 배도빈의 과감한 도전 끝에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었고 그것이 무척 성공적이었기에.
음악 평론가들은 베를린 환상곡과 더불어 ‘도이체 오퍼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투란도트’를 21세기 음악사 의 전환점이라 말하기도 했다.
오페라를 접하지 않았던 이들도 각종 매체에서 연일 배도빈, 구스타프 의 투란도트를 언급하니 관련 영상을 통해 접했고.
그들의 반응은 음악 평론가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ㄴ 오페라 처음 보는데 재밌네.
ㄴ ㅇㅇ. 의외로 잼씀.
ㄴ 칼라프 개새끼.
ㄴ 솔직히 ㅠㅠ 너무 불쌍함. 얼마나 힘들었으면 한 번 웃어줬다고 목숨까지 바치냐 ㅠㅠ
ㄴ 저기 사람들 전부 불쌍한 게 투란도트는 원하지 않는 결혼을 강요 받았고 티무르는 나라 잃고 눈 잃고 시종까지 잃음. 류는 말할 것도 없고. 결론은 칼라프 개새끼.
ㄴ 그렇게도 보네. 난 그냥 슬퍼서 보는 내내 울었음.
ㄴ 시대를 감안해야지. 투란도트 만 들어졌을 때가 20세기 초였음. 당시에도 약간 판타지적 사극 느낌이었으니 설정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음.
ㄴ 그래도 원본에 비해선 엄청 과감 한 변형임. 마지막을 투란도트와 칼 라프의 키스로 끝내는 게 아니라 류 의 죽음에 초점을 맞췄잖아.
ㄴ 쑈 얼후도 진짜 좋더라
ㄴ 쑈가 뭐임?
ㄴ 소소 쑈 얼후 독주했던 사람.
ㄴ 헐.
ㄴ 나 영화도 지루해서 잘못 보는 데 투란도트는 진짜 팝콘도 안 먹고 봐버림. 진짜 몰입 미쳤더라.
ㄴ 음악 때문임 연출도 훌륭했는데 음악이 진짜 개넘사벽이었어.
ㄴ 배도빈이니까 ㅇㅇ.
ㄴ 3막은 진짜 지려버림.
ㄴ 직접 가서 듣지 못한 게 진짜 너무 아쉽다.
ㄴ 오페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런 거 추천 좀.
ㄴ 응 없어~ 돌아가~
ㄴ 음.
ㄴ 없어.
ㄴ ???
ㄴ 베를린 필하모닉이랑 도이체 오 퍼가 혼을 갈아 넣어서 만든 무대 임. 게다가 세기의 천재라는 배도빈 이 욕먹을 거 각오하면서까지 곡 전 체를 현대적으로 편곡하고 새로 쓰 기도 해서 이런 느낌 받을 수 있는 거 없음.
ㄴ 그럼 어떡함?
ㄴ 어쩌긴 뭘 어째. 배도빈이 또 다른 거 할 때까지 기다리면 됨.
누군가의 의도로. 혹은 누군가의 진심으로 인해 두 갈래로 나뉜 클래식 음악계에 새로운 이들이 밀려들 고 있었다.
자본과 언론이 아닌 단지 음악에 의하여.
사람들은 배도빈에게 이끌려 클래식의 세계를 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