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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91화 (19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91화

    43. 도전(5)

    “다녀왔습니다.”

    늦은 시간 배도빈이 귀가했다.

    1층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유 진희가 아들을 맞이했다.

    “늦었네? 밥은 먹었어?”

    “네, 알아볼 일이 있어서 김 실장

    님이랑 만났어요.”

    “오늘도 작업할 거지?”

    “네, 먼저 주무세요.”

    배도빈이 꽤 피곤해 보였기에 유진 희는 얼른 아들을 올려보냈다.

    배도빈이 바쁘게 움직이는 건 여러 번 봐왔지만 볼 때마다 걱정되는 것 은 어쩔 수 없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들은 무슨 일을 시작하면 몸을 챙기지 않고 달려들었고 이번에는 특히 어려워하는 듯 해 더 그랬다.

    “벌써 11시네.”

    슬슬 자야겠다고 생각한 유진희는 배도빈이 작업할 때 먹을 수 있도록 주스와 과자를 챙겼다.

    ‘어쩜 자기 아빠를 그렇게 닮는지.’

    배영준 역시 최근 일곱 점의 유물을 발견해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무엇 하나에 빠져서 그것만 보는 외골수적인 면은 우남편인 배영준이 나 아들 배도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괴물이다!”

    “으햐햐!”

    그때 1층 놀이방에서 진달래와 배도진이 뛰쳐나왔다.

    진달래에게 잡힌 배도진이 꺄르르 웃었고 유진희는 그 모습을 보며 슬 쩍 웃은 뒤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진아, 이제 자야지?”

    배도진이 고개를 끄덕이곤 이를 닦 기 위해 샤워실 앞 세면대로 향했다.

    진달래가 멋쩍게 웃었다.

    “죄송해요. 놀다 보니까 늦었어요.”

    “아니야. 괜찮아. 도진이가 저렇게 재밌게 노는 거 오랜만에 보거든. 놀아주니 고맙지.”

    그러고 보니 도진이도 책만 읽어 걱정이었는데 진달래가 온 뒤로는 꽤 활발히 놀아서 걱정을 덜었다.

    “주스 마실래?”

    “네. 이건 뭐예요?”

    진달래가 쪼르르 다가가 유진희가 건넨 주스를 받아 마시고 물었다.

    “도빈이 와서. 또 늦게까지 일하면 배고플 테니까. 더 있으니까 먹어.”

    사양하지 않고 하나를 뜯어 먹은 진달래가 물었다.

    “지금 들어왔어요?”

    시간을 확인하니 꽤 늦은 시간이기에 진달래는 의아했다.

    “응. 바쁜가 봐.”

    “어린데도 대단하네요.”

    “지금은 그래도 그러려니 해. 네 살, 다섯 살 때부터 밤새우면서 곡 쓰고 그랬으니까. 그땐 정말 걱정이었어.”

    유진희는 웃으며 덤덤하게 말했지 만, 진달래는 놀랐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늦게까지 무엇인가를 했다고 하니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유진희가 쟁반을 들려 하기에 과자를 다 먹은 진달래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제가 가져다줄게요. 6층으로 가면 되죠?”

    “아니야. 아줌마가 갈게.”

    “신세 지고 있으니까 이런 것쯤은 맡겨주세요.”

    한 손으로 들기 꽤 불편해 보였는 데 굳이 걱정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유진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부탁할게. 고마워.”

    유진희가 세면대로 향했다. 혼자서 도 잘 씻는다고 하지만 항상 물만 묻히는 도진이가 이는 잘 닦는지 확 인하기 위해서였다.

    진달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내렸고 작업실 문 앞으로 가서 말했다.

    “문 좀 열어줘. 간식 가져 왔어.”

    잠시 뒤 배도빈이 문을 열고 그것을 받았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쟁반을 꽉 쥐고 있어 고통스러웠던 진달래의 왼팔과 왼손이 비로소 쉴 수 있었다.

    “고마워.”

    배도빈이 쟁반을 책상 옆에 두었고 다시 악보를 살피기 시작했다. 진달 래는 그 넓은 방 가득, 어지럽게 놓인 악보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런 식의 작업 환경은 처음 보는 지라 궁금해 슬쩍슬쩍 악보를 구경 했다.

    “뭐 해?”

    “아니, 그냥 좀. 신기해서. ……지 금 뭐 하는 거야?”

    “오늘 연습을 해보니 튜바가 버거 워 보여서. 수정 중이야.”

    “튜바? 아, 그 큰 거?”

    “큰 거라니.”

    “안 커?”

    “•…”크지.”

    ‘크기야 하지만.’

    그런 악기는 너무 많아 적당한 표 현이 아니라 생각하며 배도빈이 다 시 악보에 집중했다.

    베토벤 사후 여러 악기가 나왔고 튜바도 그중 하나였다.

    그것을 직접 연주해 본 적 없는 배도빈은 작곡을 할 때 튜바의 특징 과 한계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했었다.

    지금까지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튜 바 연주자가 너무도 뛰어나 별문제 없었고 그 때문에 해당 부분에 대해 상정하지 않은 배도빈은 튜바의 부 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음색을 활용하

    고자 다른 곡보다 적극적으로 활용 하려 했다.

    그런데 오늘 연습 도중 도이체 오 퍼 오케스트라의 튜바 주자가 연주 에 어려움을 보였기에 연습 뒤 그와 따로 면담을 가진 것이다.

    “연습 때 조금 힘든 것 같았어요. 템포가 빨랐나요?”

    음이 뭉개지는 현상에 대해 굳이 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튜바 연주 자도 자신의 연주가 완벽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네, 아무래도.”

    여러 곡을 통해 튜바의 가능성을

    확인한 배도빈은 편곡에 어느 정도 실험적으로 진행했고.

    크기가 큰 만큼 힘도 많이 드는 악기인 튜바 연주자가 그 빠른 템포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연주가 망가진 것이었다.

    배도빈은 악보를 보여주며 튜바 주자가 힘들어하는 부분을 확인했고 그의 정확한 지적에 튜바 주자는 순 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화는 배도빈이 악장, 지휘, 작곡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생 각했던 부분이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았기에 배도빈은 종종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한 명씩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것 이 베를린 필이 배도빈을 가장 높게 사는 이유 중 하나였다.

    완벽하게 보이지만 자신의 무지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악장은 아주 작은 문제라도 잡아냈고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 해결해내고야 말았다.

    “의외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진달래가 입을 열었다.

    “뭐가?”

    “결국에 빠르게 잡은 걸 연주자가 소화 못 했다는 거잖아?”

    “그렇지.”

    “난 그럼 연주자를 바꿀 거라 생각 했어. 너 고집 세잖아.”

    “그것도 고려할 일이지.”

    배도빈이 무심하게 답했다.

    “하지만 이건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이체 오퍼의 연주야. 베를린 필의 튜바는 투란도트에 참가 못 해서 도 이체 오퍼 오케스트라에서 나왔는데 그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우리의 연주가 아니게 되잖아.”

    배도빈이 펜을 내려놓고 주스 잔을 들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너도 편곡할 때 그게 가장 좋으니까 그렇게 바꿨을 거 아냐. 그 연주를 못 하게 되 면 아쉽지 않아?”

    “아쉽지.”

    배도빈이 주스를 단숨에 비운 뒤 잔을 내려놓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튜바 수석 지오 마틴이었다면 아마 연주가 가능할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트비히였을 적이라면 지금의 튜 바 주자를 해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도빈은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최고의 연주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지만, 구성원을 버리는 건 다른 문제야.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판 단했으면 어쩔 수 없이 주자 교체를 생각했겠지만.”

    과자를 입에 넣은 배도빈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 맛을 음미한 뒤 펜을 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편곡은 베를린 필, 도이체 오 퍼의 연합 공연을 위한 편곡이니 구 성원에 맞출 필요도 있어. 내 곡이었으면 고치는 일 없었어. 네 말대 로 더 잘하는 사람을 찾았겠지.”

    “어렵다.”

    “예를 들어 악기 수도 마찬가지야. 실외에서 공연하니 아무리 음향 시 설이 좋아도 음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더 늘린 거고. 상황에 맞춘다는 의미야.”

    단 한 번의 연주를 위한 맞춤 악보를 만든다는 말에 진달래는 조금 놀랐다.

    악보는 이 넓은 방의 바닥을 모두 가릴 정도로 많았다.

    모두 투란도트를 위해 준비된 악보란 걸 알고 있는 진달래로서는 솔직 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연주를 위해 이 많은 양의 업무를 감당한다니. 아니, 자청 한다니.

    지휘자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지 몰랐던 진달래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네. 다들 이러는 거야?”

    “적어도 나랑 푸르트벵글러는 그래.”

    진달래는 다시 악보에 집중하기 시작한 배도빈을 보며 생각했다.

    ‘엄청 열심히네.’

    세기의 천재.

    그녀 역시 배도빈을 달리 보지 않았다.

    그가 해낸 일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 로 대단했고 그 음악은 천재라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베를린에 있으면서 본 배도빈은 항상 음악과 함께 있었다.

    공부할 게 있나 싶은데, 당연히 뭐든 뚝딱 해낼 듯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았고 변화를 추구했다. 듣고 연주하고 쓰는 것뿐 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나갔다.

    발전시켰다.

    그 과정이 너무도 고통스럽고 두렵다는 것을 진달래는 잘 알았다.

    ‘엄청 열심히네.’

    문득 자기가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달래는 조심스레 배도빈의 작업실에서 나왔다.

    도이체 오퍼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투란도트는 전례 없는 규모로 준비 되었다.

    무대 준비에 20억 원이 소요되었고.

    등장하는 배우만 300여 명(보조

    배우 포함)에 달했고 메인 가수들과 50명의 합창단.

    두 악단의 연합 오케스트라 역시 역대 최고급 인원을 자랑했다.

    더군다나 이 공연을 위해 천재 작곡가 배도빈이 자코모 푸치니를 대신해 그의 제자 프란코 알파노가 만든 부분을 새롭게 작곡.

    대규모 편성과 현대적 감각에 어울 리게 앞선 부분을 편곡했다고 하니 음악계는 물론 일반 팬 사이에서도 크게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석 300유로라는 고액의 티켓 이 75,000매 전량 판매된 것이 그 증거.

    런던파에 속한 영국, 이탈리아, 프 랑스 등지에서도 음악 팬들은 티켓을 구하지 못해 난리였다.

    티켓 구한 사람 있냐 ㅠㅠ

    ㄴ 간신히 구함. 와이프랑 갈 수 있다니 진짜 운이 좋았다.

    ㄴ 나한테 팔면 안 됨? 두 배로도 삼.

    ㄴ 흐흐 너 같으면 팔겠냐?

    ㄴ 티켓도 못 구하고 어쩔 수 없이 블루레이랑 음반으로 사야지. 진짜 기대된다.

    ㄴ 난 좀 걱정되던데. 배도빈이 암만 천재라도 지휘 경험이 많지도 않고 워낙에 대작이라 괜한 소리 나올 것 같음.

    ㄴ 배도빈 견제하는 사람들이야 항상 있었지.

    ㄴ ㅇㅇ. 그래서 괜한 먹이 주는 거 아닌가 싶네.

    ㄴ 믿음이 부족한 자여, 왜 의심하느냐. 마왕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신다.

    또 다른 명반이 나올 거라는 기대와 대작을 건드려 괜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우려.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와중에도 투란도트는 차분히 준비되 어 마침내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에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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