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88화
43. 도전(2)
오페라에 대해서는 안 좋은 기억이 많은데 만들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를 찾기 어려 웠고 의뢰를 받은 것 역시 그리 내 키지는 않았다.
몇 차례의 실패 뒤 대본을 두 번 이나 고치고 나서야 피델리오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오페라를 만들 고자 했지만 그다지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파우스트는 언제고 만들어보고 싶다만.’
다시 태어난 뒤에도 재밌는 일이 너무 많았기에 굳이 건들지 않고 있었는데 타인의 오페라를 지휘할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다.
참 고마운 일이다.
“흐음.”
악보를 한참이나 살핀 구스타프 제 르너가 신음했다. 악보를 테이블 위
에 내려놓은 뒤 양손 끝을 모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배도빈답군. 과감한 해석이 야. 시간이 없었을 텐데 설마 초안 인가?”
“네.”
“……더 믿을 수 없군.”
푸르트벵글러가 우리 대화에 끼어 들었다.
“배도빈 악장의 음악이 베를린 필 의 음악일세. 그러니 자네가 잘 도 와주길 바라네.”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구스타프 제르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악수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지휘봉을 누가 잡는지에 대해 도이 체 오퍼도 받아들였으니 이제 곡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베를린 필이 주도하도록 맡기긴 했지만, 도이체 오퍼 오케스트라가 전혀 참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무엇 보다 총감독인 구스타프 제르너는 이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한이 충 분히 있었다.
이번 오페라 연주에서는 두 가지 큰 시도를 했는데 하나는 3막의 일부를 다시 작곡하는 일이었고 둘은 사용되지 않았던 악기를 삽입하는 일이었다.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더군. 설명해 줄 수 있나?”
꽤 부담이 있는 시도였기에 역시나 구스타프 제르너도 이에 대해 언급 했다.
“네. 정확히는 일부를 다시 만드는 거지만요. 푸치니를 따라 하진 않겠지만, 최대한 이야기에 빗대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초본은 보신 그대로고요.”
“……솔직히 기대된다고밖에 할 말이 없군.”
투란도트의 3막 중에 가장 가슴 아프고 화나는 장면이었는데 그것은 류의 죽음이었다.
그 뒤의 음악은 그 전까지와 상당 히 다른 느낌이라 이상하게 느꼈건 만 알아보니 그 이유가 있었다.
류의 죽음과 티무르가 오열하는 장 면까지 작곡한 푸치니는 그 뒤 생을 마감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작곡해 마무리했다는 것.
이 대작에 손을 대는 것은 내게도 크나큰 도전이었다.
“네. 즐겁게 작업하고 있어요.”
구스타프 제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새 악기가 있는데. …… 뭐라 읽는 건지 모르겠군.”
“얼후라고 해요.”
“아, 차이니즈 피들이군.”
“차이니즈 피들이 아니라 얼후.”
“실례했군.”
명칭은 중요하다.
김치를 코리안 샐러드라 하거나 카 레를 인도 스튜로 부르는 것만큼 무 례한 행위니까.
“얼후라는 악기는 생소한데 과연 해가 될지 득이 될지 의문이네.”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사실 투란도트 자체가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지만 설정은 다른 세 계라 인식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동양에 대한 선망을 기 반으로 한 신비한 이야기에는 분명 적절할 거라 판단했다.
내가 대교향곡에 아리랑의 반복구를 삽입하고자 노력하는 중인 것처 럼 말이다.
“음. 자네 말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지만 연주자는 어떻게 할 생각인 가?”
“멋진 사람이 있어요.”
단원들이 많이 빠져나간 상태.
도이체 오퍼의 위기 속에서 벌이는 초대형 공연이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는 구스타프 제르너에게 중국의 천재 얼후 연주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와의 인연을 시작해 한국에서 활 동하기 시작한 소소는 지난 몇 년간 니나와 함께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몇 년간 그녀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여러 연주회를 가졌고 그 때마다 그녀의 실력에 걸맞은 평을 받으며 고정 팬을 늘려나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연주 실력은 익히 알았기에 투란도트에서는 필히 소소를 영입하 고 싶었다.
“그래서 소소가 와줬으면 해요.”
-싫어.
멋진 연주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전화를 걸었건만 소소가 언제 나 그러하듯 단호히 말했다.
한국에서 오래 활동해서 그런지 한국말도 곧잘 한다.
“왜요?”
-도빈이 연습 힘들다고 소문 다 났어.
어떤 놈이 그런 헛소리를 퍼뜨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다 거짓말이에요. 그리고 소소에 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고요.”
-가면 맛있는 거 사 줘?
“그럼요.”
- 잠은?
“가우왕이 묵은 곳보다 더 좋은 방을 마련해 줄게요.”
-TV도 좋아야 해.
굳이 이런 말을 안 해도 대우는 최고로 해주겠지만 꼼꼼하게 체크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어차피 소소야 집안에 틀어박혀 맛 있는 음식과 영화 DVD만 공급하면 밖으로 나올 리 없으니 그거라도 최 대한 좋게 맞춰줘야 한다.
물론 내 돈은 아니고 도이체 오퍼가 지불할 돈이지만.
좋은 연주회를 위한 일이니까 그들이 부담스러워한다면 카밀라에게 부 탁해 봐야겠다.
“그럼요. 그럼 히무라에게 연락할게요.”
_ 응.
소소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 려놓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누 군가 싶어 확인하니 페인 킬러를 운 영하는 칠삼이었다.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에 곧장 전 화를 받았다.
“아저씨.”
-잘 지내냐~
칠삼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조 금 차분했다. 본래 말투가 느릿느릿 하긴 했지만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럼요. 아저씨는요?”
-나야 뭐. 아, 아닌 게 아니라 달 래랑 유럽 여행을 가는디 얼굴이나 한번 보면 싶어서 전화했지.
유럽 여행이라니.
칠삼이 큰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그럼요. 독일에 있게요?”
-글씨 뭘 알아야지. 록페스티벌이 있어 그거 구경하고 독일로 가려고. 바쁠 텐디 괜찮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러 악기를 소개해 주고 록에 대해서도 가르쳐 준 칠삼이라면 환영이다.
“독일에 있을 땐 우리 집에서 머물러요. 언제 오는데요?”
-내일 출발하니께 베를린에는 한 일주일쯤 뒤에 가려고.
“기다릴게요. 연락해요.”
-이. 그려 그럼.
록페스티벌 이라.
달래 녀석이 그간 열심히 베이스를 연습했는지 조금은 궁금했다.
단원들과 투란도트 연주에 관련한 미팅을 이어나가는 한편 도이체 오 퍼의 가수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모두 실력자들이라 공연이 기다려 졌는데 그들과 함께 연습할 날이 다 가올수록 조금씩 지루했던 일상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박선영과 소소가 베를린에 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먹는 걸로 친해진 두 사람은 이제 자매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제는 팀장님인 박선영이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마에스트로 배도빈 씨?”
“왜요?”
“우리 소속 연주자에게 일을 의뢰 할 때는 회사를 통해 해주시겠어요?”
나와 소소가 시선을 마주한 뒤 동 시에 박선영을 보았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잡으려고 했던 일정이 엉망이 되었잖아. 끄윽. 난 망했어.”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아요.”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마.”
박선영이 이곳저곳에서 일을 많이 따내서 샛별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주자들이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것 쯤이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이번 기회가 소소에 게도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모를 리 없으니 그저 투정일 뿐이리라.
얼후라는 악기가 동양적이라 중국 외에는 한국에 작게 팬층을 형성할 뿐이니 이번 기회에 유럽 무대에서 도 활약하면 활동 반경이 넓어질 것 이다.
“실은 좋은 기회 줘서 고마워. 소소한테도 큰 힘이 될 거야.”
“알고 있어오7
“……내 농담은 왜 다들 안 받아주지?”
“히무라가 마음이 넓은 거죠.”
웃으며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그리고 칠삼과 약속한 날.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칠삼 이 어디서 구했는지 거대한 자기 몸 만 한 배낭과 캐리어를 이끌고 나왔다.
그 옆에 삐쩍 마른 애가 함께 있었는데 못 알아볼 뻔했다.
진달래의 머리는 전보다 훨씬 길었는데 턱까지는 검은 머리였고 그 아 래는 탈색한 금발이 아무렇게나 자 리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놔둔 느낌이다.
“여.”
“야!”
“어서 와요.”
칠삼의 우악스러운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나누며 시선을 돌렸는데 진 달래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웃을 수 없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없다.
우리 가족과 박선영, 소소, 칠삼, 진달래가 함께했다.
“우와.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진달래가 힘차게 인사했고 어머니는 그런 진달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밝게 웃으셨다.
오늘 저녁은 셰프가 솜씨를 뽐내 중식으로 차렸는데 다들 입에 맞는 모양이다.
소소와 박선영이 입을 가득 채웠고 진달래도 왼손을 어색하게 놀리며 저녁을 했다.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도빈이랑 떨 어져 있을 때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셨다면서요. 미리 인사드리지 못했네요.”
“아뇨.”
칠삼이 드물게 사투리를 안 썼는데 무척 어색했다.
“언니, 나 저거 좀 줄 수 있어?”
진달래가 소소에게 말을 걸었고 고개를 돌려 음식을 확인한 소소가 그 릇째로 가져다주었다.
“이렇게나?”
“입에 가득 넣고 씹어야 맛있어.”
소소가 만두를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도토리를 가득 머금은 다람쥐 같다.
“이루케?”
자기를 따라 만두를 넣은 진달래를 보더니 소소가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박선영과 소소, 진 달래는 저들끼리 어울리기 시작했는 데 나는 세 사람의 사교성에 대해 감탄했다.
게스트룸을 안내해 준 뒤에 칠삼과 함께 옥상에 올라갔는데 그에게는 독일의 생맥주를 권했더니 벌컥벌컥 잘도 들이켰다.
탄산수에 오렌지 과즙을 넣어 마신 나는 잠자코 그가 맥주잔을 비우길 기다렸고.
이내 칠삼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을 무슨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