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85화
41. 무뚝뚝한 비올라와 찌질한 바이올린 (5)
“크흠.”
“아, 과자를 좀 더 가져올게요.”
“제가 돕죠.”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어머니께 서 일어나셨고 히무라가 따라나섰다. 사카모토는 도진이와 함께 쎄쎄 쎄를 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그런 도진이를 흐뭇 하게 바라보았고 나카무라는 음료수를 주며 료코를 달랬다.
그렇게 잠시 뒤 어머니와 히무라가 왔고 나카무라가 장난스레 물었다.
“그래서. 도빈아, 어때? 베를린 필 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네. 열심히 하면 멋진 비올리스트 가 될 것 같아요.”
“정말?”
나카무라가 정말 기뻐했다.
“그럼요.”
음악에 대해서는 농담조차 안 한다.
나카무라 료코는 비올라의 특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중후하면서도 특색 있는 음색을 잘 다루었다.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 과 경험 그리고 노력이 그녀를 크게 도울 터.
이대로 성숙해진다면 훌륭한 연주 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17살이란 어린 나이에 이미 이만 한 연주를 할 수 있을 만큼 노력가 이니 말이다.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나카무라 료코가 모두에게 인사했다.
“ 벌써?”
“네. 내일 아침 일찍 수업이 있어 서요. 오늘 초대 감사합니다. 아빠, 내일 봐.”
나카무라는 조금 아쉬운 듯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웃으며 딸을 마중했고 어머니께서는 집사에게 그녀를 바래다주길 부탁하셨다.
료코가 떠나고 나와 히무라 그리고 나카무라는 오랜만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화제는 역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인터플레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장 점유하는 속도가 빨라. 관건 은 역시 유럽인데 뭔가 대책을 마련 해야 해.”
나카무라가 걱정스레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찰스 브라움의 소속 사도 인수된다 하더라고요.”
“뭐?”
히무라와 나카무라가 깜짝 놀라 되 물었다. 얼마 전 찰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하니 허탈하게 의자 에 등을 파묻었다.
“세이렌도 결국엔 어쩔 수 없었나 보네. ……거기 소속 음악가들이 모두 쟁쟁해서 팬 이동이 클 텐데.”
“찰스는 고민이 많나 봐요. 런던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독일에 남을 지.”
“그 남자라면 입장상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신분도 있고 무엇보다 인터플레이가 장악하고 있는 시장에 서는 연주회든 앨범이든 반응이 보 장되어 있으니까.”
이러니저러니 많은 이야기가 복잡 하게 얽혔지만 결국에는 돈 문제로 귀결된다.
나 역시 돈은 좋아하지만, 일정 이 상의 수입을 올린 뒤로는 그렇게 중 요하지 않게 여겼는데.
그렇다고 돈의 소중함을 부정하는 건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일이다.
돈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생존과 직 결되고 그 이후에는 삶의 질을 정하 니 돈을 탐한다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니, 도리어 그래야 한다.
살기 위해서.
더 나은 음악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나카 무라에게 물었다.
“료코는 어떻게 유학을 온 거예요?”
나카무라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 니 료코에게는 비밀이라며 신신당부 했다.
알겠다고 하니 별것 아닌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했다.
“료코 꿈이 네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거거든. 내가 이야기했다고 하면 료코가 내 등을 때릴 거니까 이건 꼭 비밀 로 해야 한다.”
사이좋은 부녀다.
“고마운 일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좋은 오케스트라는 많고 제가 언제 지휘자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 아이한테는 네가 울트라맨이니 까.”
울트라맨이 뭐지.
나카무라가 도수가 낮은 샴페인을 들이켠 뒤 말했다.
“내 다리가 이렇게 되고 나서 1년을 병원에서만 있었으니까 료코도 함께 있었거든. 집에 혼자 두기 어렵고 또 그때는 요코와 다시 재결합 하기도 전이었으니까.”
당시 그 나이의 딸을 집에 혼자 두는 건 확실히 무리다.
내 앨범에 대한 평론을 쓰기도 했던 평론가이자 나카무라의 아내 요 코에게 보내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는데.
나카무라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사고에 충격을 많이 받았었나 봐. 하하. 그도 그럴 게 눈앞에서 아빠가 피를 흘리고 쓰러졌으니 말이야. 엄마에게 가 있으라 해도 죽어도 안 떨어지더라고.”
“그때 함께 있으면서 네 음악을 듣고 너에 대해 말해주곤 했는데 료코 입장에서는 신기했나 봐. 자기랑 같은 나이의 꼬마가 전 세계를 상대를 음악을 하고 있으니까.”
나카무라가 잔을 내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완전 히어로였다고. 울트라맨.”
“그러니까 그 울트라맨이란 게 뭔 데요?”
“아니. 울트라맨을 모른단 말이야?”
잠시 티격태격한 뒤에 히무라가 웃 으며 말했다.
“히어로라고 하니 그렇지. 한국이 랑 유럽,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일걸?”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네가 말했잖아. 음악을 하고 싶은데 환경 때문에 못 하는 아이들을 후원해 달라고. 한국이랑 아프리카 에 배도빈 학교도 있어. 전에 이야 기했는데 잊고 있었나 보네.”
예전에.
내가 가정교사로부터 내가 납 중독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히무라에게 부탁한 것이 떠올랐다.
재단을 운영하게 되면 무지와 가난 때문에 죽는 아이들을 도와달라고.
그 말을 잘 지켜준 듯해서 무척 기뻤다.
배고픔.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죽는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가 난을 겪었기에 아직도 그런 이들이 있음에 안타까웠다.
모든 사람을 충분히 돕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내가 하지 못한 그 일을, 히무라가 대신해 주고 있으니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다.
“고마워요, 히무라.”
예나 지금이나 나의 가장 큰 조력 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올라.
우스갯소리로 현악 4중주를 놓고 괜찮은 바이올리니스트(제1바이올린), 무능한 바이올리니스트(제2바이올린), 예전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연주자 (비올리스트), 바이올린을 싫어하는
연주자(첼리스트)라는 말을 하지만 말 그대로 우스갯소리다.
비올라의 특성상 바이올린과 첼로 에 소리가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조 금만 신경 써도 비올라가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실내악 연주회를 가질 때 종 종 비올라를 직접 연주하기도 했는 데 중간 음역을 다루며 전체적으로 조율사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바흐나 모차르트, 하 이든도 비올라를 직접 연주하곤 했는데 특히 오케스트라에서는 그 역 할이 더욱 커진다.
제2바이올린을 돕는가 하면 첼로와 함께 저음부 역시 다루기에 비올라 가 빠지면 연주가 상당히 빈약해지 는데 말하자면 곡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조력자와 같다.
‘ 비올라라.’
그러고 보니 비올리스트는 아직 마 땅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제1바이올린은 찰스 브라움.
제2바이올린은 나윤희.
첼로 이승희.
오보에 진 마르코.
바순 마누엘 노이어.
피아노 니나 케베리히.
등등 조금씩 영입 명단을 구성하고 있는데 비올라는 가능한 곡에 대한 이해가 깊고 노련한 사람으로 채용 하고 싶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연주 자들을 꾸리는 것도 게을리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히무라와 대화하면서 이런 생각을 내비쳤더니 명단 하나를 넘겨주었다.
도빈 재단이 후원하고 있는 음악가 또는 학생들이었는데 히무라가 직접 확인하고 선발한 만큼 믿을 수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이 사람들이 어떤 콩쿠르에 출전한다거나 하면 찾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랜만에 주어진 휴가를 즐겼다.
가을이 다가왔다.
9월.
베를린 필하모닉은 새 단장을 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악단주 귄터 부르비츠가 큰마음을 먹고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확장하기로 결정한 덕에 연주자들은 정 말 오랜만에 강제적으로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공사 기간은 무려 2달.
물론 그 기간을 모조리 쉬기에는 악단주의 지갑에도 팬들에게도 단원 들에게도 너무나 큰 고문이었기에 인근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간혹 가지고 연습도 모여 하지만 그 간격 이 길었다.
나는 적당히 산책을 하며 대교향곡 에 쓰려고 메모해 두었던 것을 정리 하거나 대학 강의를 듣는 등 여유롭 게 시간을 보냈는데.
‘졸립단 말이지.’
하지만 3일에 한 번씩 연주회를 가지던 일정에서 벗어나니 일상이 무료해지는 것도 사실.
옥상 정원에서 책을 읽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좋은 날씨다.
* * *
1778년 쾰른.
‘내가 여섯 살이었나. 여덟 살 같은데.’
[여섯 살 천재 루트비히 판 베토벤 연주회]
아버지를 따라 쾰른에 왔는데 이상한 벽보가 붙어 있다.
“루트비히,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빨리 따라오지 못해.”
“네.”
아버지의 재촉에 걷고는 있지만 처음 보는 쾰른의 거리에 눈을 돌리기 바빴다.
사람이 무척 많다.
“으으. 긴장된다. 넌 괜찮냐?”
아버지의 제자 콘트랄토 요하나 아 버동크가 물었다.
“뭐가?”
“에휴. 그래. 꼬맹이가 긴장이 뭔지는 알겠냐.”
“오르간 치러 가는 거 아니야?”
“그래. 그것도 엄청 많은 사람 앞 에서지.”
“그럼 좋은 거잖아.”
아버동크가 나를 이상하게 봤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지만 사람 들에게 오르간을 들려줄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없네. 아버지가 또 거짓말을 했나.’
아버지를 따라간 곳에는 술 냄새를 풍기는 아저씨가 열 명 정도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고개를 연 신 숙인 아버지가 돌아와 내 어깨를 잡고 또 화내듯이 말했다.
“루트비히, 실수해선 안 된다. 네 연주에 우리 집 다음 주 식비가 달렸어.”
거짓말.
아버지의 술값으로 나갈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어머니랑 동생들이 배고파하는데.’
우선은 오르간 앞에 앉았다.
아버지가 연주하라고 해서 2주 동 안 방에 갇혀 연습했던 바다 아저씨 의 푸가를 연주했다.
조금 어렵지만 열심히 연습해서 한 번도 안 틀렸다.
연주를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다 들 테이블에 엎드려 있거나 술병을 흔들었다.
‘첫 연주회라 기대했는데……
의자에서 내려와 아버지에게 갔다.
순간 고개가 돌아갔고 뺨이 터질 것 같았다.
“대체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그딴 식으로 연주를 하니 사람들이 좋아 하질 않잖아!”
아팠지만 울기 싫었다.
지는 거 같으니까.
내 연주가 옳아.
하지만 자꾸 눈물이 나와서 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