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84화
41. 무뚝뚝한 비올라와 찌질한 바이올린 (4)
며칠 뒤 나카무라가 일본으로 돌아 가기 전에 맞추어 료코를 초대했다.
“안녕하세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나카무라 료코 가 어머니에게 꽃을 드렸다.
“꽃 너무 예쁘다. 고마워. 정말 예 뻐졌는데?”
“아니에요.”
어렸을 적이지만 한 번 만난 적 있는데 료코가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안녕.”
“안녕.”
나도 료코와 인사를 나눴지만 그리 친근한 느낌은 아니었다.
함께한 시간도 무척 짧고 공유하고 있는 것도 없어 어쩔 수 없지만, 나 카무라의 딸이니 되도록 잘 대해주고 싶다.
“안내할게.”
"응."
나카무라의 말대로 조금 무뚝뚝하 긴 하지만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 서 가만있는데 나카무라가 료코를 보며 싱글싱글 웃는다.
딸바보답다.
엘리베이터가 7층 라운지에 도착했고 어머니와 셰프가 정성 들여 차린 저녁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
“와, 이거 대단한데요?”
나카무라가 휠체어를 능숙하게 테이블에 붙이며 감탄했다.
“힘 좀 썼죠. 하하하.”
“농담이 아니라 정말 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껄껄. 이거 즐거운 시간이 되겠구만.”
오늘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신 메인 요리는 슈바인스학세였는데 마늘소 스를 곁들여 풍미를 더하시는 등 한 국식 퓨전 요리에 가까웠다.
원래부터 족발을 먹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훌륭한 메인 요리였는데 사카모토나 히무라, 나카무라도 아 이스바인 (Eisbein: 돼지 정강이)을 맛있게 잘 먹었다.
“이야. 이거 엄청 쫀득한데요?”
“마늘 향이 진한 게 아주 걸작이군. 이런 슈바인스학세는 처음이야. 훌륭한 솜씨입니다, 부인.”
“입에 맞으시니 다행이네요. 많이 들 들어요.”
우리 가족과 히무라, 나카무라 부녀 그리고 사카모토가 대화를 할 때는 독일어다.
한국인과 일본이 만났는데 대화를 독일어로 나눈다니 뭔가 이상하다.
“아.”
그때 망설이던 료코가 음식을 입에 넣고 감탄했다.
그 모습을 본 나카무라가 굳이 불 편한 몸을 움직여 료코 앞에 슈바인 스학세를 덜어주었다.
그것에 채소를 더해 나카무라 앞에 가져다주고 묵묵히 식사를 하는 료코.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다.
‘무뚝뚝한 면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는 라 운지에 마련한 스테이지 앞에 모였다. 여홍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는 데 히사이시 리쿠의 여름이다.
편안히 듣기에 좋은 곡이라 기억하 고 있다가 가벼운 마음에 연주를 시 작했다.
즐겁게 연주하는 와중에 사람들을 둘러보았는데.
‘왜 노려보는 거지.’
나카무라 료코가 나를 노려본다.
‘속이 불편한가.’
화장실이 어딘지 알려줘야겠다.
연주를 마치자 사카모토 료이치가 흥이 났는지 내 연주를 이어받아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연주했다.
사카모토의 곡은 음을 많이 사용하 지 않으면서도 차분히 그 흘러넘치는 감성을 표현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가슴 한 편이 아려온다.
도진이가 내 손을 꼭 잡고 훌쩍인다.
사카모토가 연주를 마쳤고 우리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료코, 어때?”
“어?”
나카무라가 료코에게 연주를 청했다. 나도 료코가 어떤 연주를 하는지 듣고 싶던 차라 기대되었다.
“어……
나카무라 료코가 나와 사카모토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 버지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듯 했다.
사카모토가 껄껄 웃으며 료코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들려주게. 도빈 군도 듣고 싶은 눈치 같은데.”
료코가 나를 다시 보더니 사카모토 에게 말했다.
“하지만 비올라도 안 가져왔고……
“악기라면 얼마든지 있어.”
6층 내 층으로 잠깐 내려가 사이 즈별로 있는 비올라를 보여주니 료 코가 황당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하 나를 집어 들었다.
18인치짜리라 그녀의 작은 체구로 다룰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빠는 고집쟁이다.
기껏 독일에 왔으면서 내 집에 안 있고 도빈 군네 집에서 머문다.
분명 ‘아빠랑 있으면 료코가 불편 하잖니’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런 생각 조금도 없는데.
그런데 막상 도빈 군의 집을 방문 하니 왜 여기서 지내셨는지 알 것 같다.
세상에.
너무 좋은 집이라 눈이 돌아가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안녕.”
“안녕.”
대학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는 너무 놀라서 황급히 자리를 피했지만 오늘은 도빈 군과 제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음악가.
아빠가 들려주는 도빈 군에 관한 이야기는 판타지 같았다.
겨우 세 살에 일본에 기적을 가져 다주었고 여섯 살에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객원 연주자로 독주를 담당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일 좋아하는 지니위즈 시리즈에 삽입된 그의 음악은 지금 도 많은 사람이 음악을 시작하는 계기였다.
정말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옆으로 이동하니 작은 연주회장이 있었다.
도빈 군의 피아노를 직접 들을 수 있다니.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어서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
어마어마하게 격렬한 곡을 연주할 줄 알았는데 귀여운 곡이다.
‘저런 곡도 잘 연주하는구나.’
정말 바리에이션이 이렇게 넓은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 뒤에는 사카모토 선생님.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두 음악가 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니 무리해서 오기를 잘했다.
“료코, 어때?”
“어?”
아빠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당황해서 사카모토 선생님과 도빈 군을 보았는데 저런 대음악가 앞에 서 연주를 하라니.
그런 거 절대 무리다.
“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말을 어물거리는 사이 사카모토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그러지 말고 들려주게. 도빈 군도 듣고 싶은 눈치 같은데.”
언제나처럼 인자한 얼굴로 말씀하 시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도빈 군 앞에서 연주라니.
열심히 연습해서 훌륭한 비올리스 트가 된 뒤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 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비올라까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했는데 도빈 군이 피아노에 앉았다.
놀라서 그를 보았다.
“반주해 줄게.”
세상에.
아빠를 보자 속 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럼…… 비외탕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앙리 비외탕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야.36 2악장, 바르셀 로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혹시 모르면 어쩌지 싶어 말을 하 고선 후회했는데 도빈 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시선을 마주하는데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재능이 없다.
도빈 군의 음악이 좋아서.
함께하고 싶어서 시작하긴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나 그 옆에 있는 최지훈이라는 사람처럼 금방 세계 무대에 나갈 수는 없었다.
일본에서는 상을 받긴 했지만 해외 경험은 조금도 없으니까.
그래서 아빠와 엄마에게 부탁해 독 일로 유학을 온 건데 벌써 이런 자 리가 마련되다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분명 실망할 텐데.
그래도 이제 와 못한다고 할 수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도빈 군이 연주를 시작했다.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 선을 주었는데 나카무라 료코가 또 한 번 엄청나게 노려보았다.
대단한 의지다.
연주할 때가 되면 투지가 일어나는 모양. 고개를 끄덕이기에 연주를 시
작했다.
찰스 브라움이 ‘이 사람을 모른단 말이야?’라며 추천해 준 벨기에의 음악가 앙리 비외탕.
마침 오늘 아침에 듣고 감명받아 재미 삼아 연습했는데 마침 바로 연주할 기회다.
천천히 연주를 시작하자 이내 나카 무라 료코가 구슬프게 음을 자아내 기 시작했다.
‘괜찮네.’
프로 수준은 아니지만 분명 열심히 노력했다는 게 느껴지는 연주다. 정 확하고 현을 조절해 누르는 데 능숙하다.
더군다나 많이 연주해 본 곡인지 음을 표현함에도 두려움이 없다. 과 연 연주를 시작하기 전의 타오르는 눈은 이런 자신감인가.
한창 무럭무럭 성장하는 비올리스 트를 만난 듯해 기분이 좋아졌다.
연주를 마치자 수수한 박소 소리가 들렸다.
“훌륭한데.”
“우리 딸 잘하죠?”
고개를 푹 숙인 나카무라 료코가 뒤돌아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서둘러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사카모토 료이치가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전보다 늘었잖은가. 멋진 연주였네.”
“그렇지 않아요.”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능숙한 슬러스타카토였어.”
나카무라를 보며 말하자 그가 활짝 웃었다.
“그야…… 긴장했으니까.”
내 칭찬을 료코가 받아쳤고 갑작스 럽게 들어온 개그에 나와 사카모토 료이치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본 뒤에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구만. 아주 적절 한 농담이었네.”
부모님과 도진이는 무슨 말인지 이 해하지 못한 모양인지라 히무라가 오랜만에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다.
“비올라 유머예요. 슬러스타카토는 활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스타카토를 넣는 연주법인데 이게 꽤 어려운 걸로 알고 있거든요. 도빈이가 그걸 칭찬했는데 료코가 떨려서 자연스럽 게 된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네요.”
도진이와 아버지는 이해가 안 되는 지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비올라 유머를 할 줄 아는 비올리 스트야말로 진정한 비올리스트지.”
사카모토 료이치가 껄껄 웃었다.
“농담 아닌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