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82화
41. 무뚝뚝한 비올라와 찌질한 바이올린 (2)
썩 내키는 것 같지는 않지만 강의 실까지 안내해 준 찰스 브라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브라움은 어디서 강의 해요?”
“그건 왜 묻지?”
“놀러가려고요.”
“뭐, 뭐라고?”
찰스 브라움이 깜짝 놀랐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다.
“싫어요?”
“싫은 게 아니라.”
그의 눈을 보고 있는데 그가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정문 건너편 건물이다.”
“왜 저기 있어요?”
“2년 전에 새로 개설되어서 따로 건물을 쓰지 못해 부지 밖 건물을
산 거야. 내가 왜 이런 걸 설명하고 있는 건지.”
이제 막 개설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니. 연주회 등 개인 활동으로도 바쁠 텐데 후학 양성에 힘쓰는 찰스 브라움이 기특했다.
“좋은 일 하네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래.”
그렇게 브라움과 인사를 나누고 강 의실로 들어섰다. 다행히 늦지 않았는데 학생들이 벌써 자리를 많이 차 지하고 있었다.
반원형의 강당은 계단식으로 이루 어져 뒤에 앉아도 앞이 잘 보일 것 같았다.
‘빈자리가.’
가장 앞에 한 자리가 남아 앉았다.
무엇을 배울지 기대된다.
* * *
‘배도빈이잖아.’
‘배도빈이네.’
‘베를린 필의 악장이 왜 이런 곳에?’
배도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베를린 대학생들은 당황했다.
다른 장소였다면 사진을 찍는다거 나 사인을 청한다든지 그것도 아니 면 구경이라도 할 텐데 강의실에서 만나니 황당해서 속으로 놀랄 뿐이었다.
그렇게 강의실 안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이내 음악사 교수 프란츠 게 르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프란츠 게르그가 평소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학생들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깃들자 프란츠 게 르그는 이상하게 여기며 교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돌출된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4살 때부터 활동해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일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 계에 새로운 조류를 몰고 오는 장본 인이었기에.
프란츠 게르그는 음악사에 정통한 박사로서 또한 클래식 음악의 팬으로서 배도빈이란 존재에 대해 배도빈 본인보다 더욱 잘 알았다.
‘몰래카메라?’
프란츠 게르그가 강의실을 훑었다. 그러나 촬영하는 사람이라든가 카메 라는 보이지 않았다.
“크, 크흠. 마에스트로 배도빈?”
“네. 교수님.”
‘교수님라니!’
배도빈이 자신을 교수님이라 칭하자 프란츠 게르그는 기뻐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학기 초 학생명부에 배도빈의 이름이 있었는데 동명의 한국인이거나 본인이라 할지라도 학적만 올렸을 뿐일 거라 동료 교수들과 웃으며 넘 겨 버린 일이었다.
‘진짜였잖아!’
배도빈의 극성적인 팬이었던 그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강의실.
다른 학생들도 있었기에 그들의 공부할 시간과 기회를 방해할 순 없었다.
그는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했다.
“반갑습니다. 저번 자선 연주회는 즐겁게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배도빈과 간단히 인사를 나 눈 프란츠 게르그는 책을 펼쳤다.
그러나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뭘 강의해야 하지.’
갑작스러운 부담이 밀려들었다.
그의 이성과 지성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여러 걱정이 앞섰다. 배도빈이 수업을 재미없어해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었다.
반대로 배도빈이 자신의 수업에 잘 참여한다면 그 세기의 천재가 즐겨 듣는 강의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것 이었다.
‘처음부터 진도를 나가면 지루할 수도 있으니까.’
배도빈의 인터뷰 기사라면 모두 탐 독한 프란츠 게르그였기에 배도빈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꿰뚫고 있었다.
베토벤, 카레, 커피.
프란츠 게르그가 책을 덮었다.
“오늘은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모두 책은 덮어주세요.”
프란츠 게르그로서는 강의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팬심이 적절히 조 화를 이룬 최고의 선택이었다.
다행히 학생들이 책을 덮고 관심을 보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업 시간에 듣는 수업 내용 이외의 이야기는 무 엇이든 환영받았다.
“베토벤만큼이나 살아생전, 사후에 도 이야기가 많은 음악가도 없습니다. 그의 환경과 장애 그럼에도 음악사에 큰 기준이 된 음악을 남겼기 에 그럴 수밖에 없겠죠.”
프란츠 게르그는 천천히 서론을 꺼 냈다.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여러 낭설 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건데 몇 년 전에 그의 머리카락의 성분 검출을 통해 납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죠. 또 예나 교향곡1)도 좋
1) 프리츠 빌헬름 슈타인이 1909 년 예나에서 발견한 교향곡. 루이 판 베토벤이란 이름이 기입되어 있어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이라 알려 져 ‘예나 교향곡’으로 발표되었지만 1957년 프리드리히 비트의 교향곡 임이 밝혀졌다.
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시 목을 푼 프란츠 게르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사실이 밝혀진 것도 있지만 풀리지 않은 일도 많죠. 이를테 면 그가 편지에 적은 불멸의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 후보로는 줄리에 타 귀차르디, 테레제 브룬슈비크, 베 티나 아르님, 안토니 브렌타노 등이 있었지요.”
“교수님, 실례지만 질문 드립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네.”
“강의를 듣기 전에 베토벤의 연인들이 베토벤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중요하지요. 베토벤은 생에 여러 고난과 경험을 겪으며 그것을 음악 속에 녹여냈습니다. 음악 내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환 경을 고려하며 이해하는 것도 공부 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학생들이 드디어 프란츠 게르그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어가겠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에 영향을 끼친 사람 중에서는 안토니 브렌타노를 빼놓을 수 없겠죠. 베토벤은 디아벨리의 왈츠에 의 한 33개 변주곡이라는 어마어마한 곡을 만들어 안토니 브렌타노에게 헌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란츠 브렌타노, 안토니 브렌타노 부부의 딸에게는 피아노 소나타 30번을 헌 정하기도 했었죠.”
불쾌하다.
안톤 쉰들러 그 개자식이 내 서랍을 마음대로 뒤지다니.
뒤지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모양이다.
프란츠 게르그는 내가 남긴 세 통 의 편지를 통해 불멸의 연인이 누구 인지 무려 200년간 회자되었다고 말했다.
별 말 같지도 않은 거짓은 하도 많이 들어 무시하고 있었지만 남의 연애편지를 팔아먹다니.
그 사기꾼 놈을 다시 만나면 그 잘난 턱주가리를 잘게 다져줄 거라 생각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메
이너드 솔로몬은 72년 불멸의 여인 이 안토니 브렌타노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뭐라고!”
쾅!
옛 성격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내 어찌 친구의 아내를 탐한단 말인가.
화딱지가 나 소리를 질러버렸는데 교수에게도 학생들에게도 피해를 주 어 사과를 하고 강의실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기분이 몹시 상한 것은 어쩔 수 없어 화를 삭이고 있는데 이 대로 돌아가자니 찜찜하여 찰스 브라움이 강의를 한다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의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 풀릴 것 같아 강의실을 찾았는데 2층 계단 바로 옆 강의실 에서 강의 중인 찰스 브라움을 찾을 수 있었다.
바이올린 레슨을 하는데 강의실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방해하기 싫어 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데 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찰스 브라움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옆 학생에게 무엇인가를 말했고 그 학생이 나를 보더니 소리쳤다.
“Ach du lieber Gott!”
순식간에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고 찰스 브라움을 보자 그가 손으로 이 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다가와 문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구경하고 있었어요.”
“왜 내 강의를……
“브라움의 바이올린은 최고니까요.”
“너……
찰스 브라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저렇게 쑥스러워하는 걸 보면 요즘 사람 들은 참 면역이 떨어지는 듯하다.
인류의 보물이니 세기의 천재니 해 도 멀쩡한 나를 본받았으면 싶다.
“저기…… 두 사람 친하세요?”
어느새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오늘 친구가 됐어요.”
“아니, 그냥 아는 사이……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황당해서 찰스 브라움을 보니 그도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그냥 아는 사이라 하기엔 인연이 깊잖아요.”
불새, 크리크 콩쿠르 축하연,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오디션까지 생각 하면 당연한 일이다.
정작 그에게 공격받았던 내가 손을 내미는데 빼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나 좋아하잖아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나도 브라움의 바이올린 좋아하니까.”
“……얌전히 기다려.”
찰스 브라움이 강의실 뒤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요청대로 얌전 히 앉아 그의 강의를 듣고 있는데 참 세세한 부분까지 잘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장으로 활동했던 경험 덕인지 아니면 성격인지 학생들이 무엇을 이 해하지 못하는지 잘 파악하는 듯했다.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이다.
‘지훈이는 끈질기게 설명하면 이해 했는데.’
아무래도 최지훈이 잘 받아들인 듯.
채은이도 결국에는 내 말을 잘 이 해하지 못한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내가 가르치는 데 그리 소질이 없는 듯하다.
딴에는 상세히 설명하는데 결과가 그러니 말이다.
‘악장이 되어주면 좋을 텐데.’
내가 만들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린 독주자로서는 누가 뭐래도 찰스 브라움이 제격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그를 잘 따르고 가르치는 것도 잘하니 악장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은 모두 갖췄다.
답답하게 구는 것만 고친다면 더 좋겠지만 사람 성격이야 바뀌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고.
“그럼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어떻게 꼬셔낼까 고민하다 보니 찰스 브라움의 강의가 끝났다.
그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커피라도 할 텐가?”
“좋죠.”
그와 함께 강의실을 나섰는데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가 있었다. 조 금 숨이 찬 것 같은데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너무도 닮아 그녀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카무라 료코?”
반가운 마음에 불렀다.
“안녕.”
잘 지냈는지 안부라도 물어보려 했건만 간단하다 못해 건조하게 인사 한 나카무라 료코는 그대로 나를 지 나쳤다.
그것을 본 찰스 브라움이 씩 하고 웃었다.
“배도빈도 여자에게 차이는구나?”
“뭐라는 거예요. 아저씨처럼 굴지 말아요.”
“뭐, 뭐?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