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80화 (18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80화

    40. 사람, 음악, 돈(4)

    푸르트벵글러의 단호한 태도에 불 안해하던 단원들도 정신을 차렸다.

    주먹을 꽉 쥐어 떨리는 손을 다잡는 마누엘 노이어와 침을 크게 삼킨 한스.

    화장실에 갔던 나윤희는 얼굴과 머 리카락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는데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 했다.

    그 외 다른 단원 모두.

    저마다 평생을 함께한 악기를 쥐고 서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 누구라도.

    신이라도 적게는 20년, 많게는 60 년을 음악만을 위해 달려온 이들을 부정할 순 없다.

    케르바 슈타인이 단원들을 이끌고 무대로 향했다.

    자리한 이들은 곧 오보에 수석이 내는 음에 맞춰 악기를 점검했다.

    “알고 있느냐.”

    무대로 오르기 전 푸르트벵글러가 내게 말했다.

    “위대한 루트비히가 말했지. 음악이.”

    “더욱 아름답기 위해 범하지 못할 규칙이란 없다.”

    푸르트벵글러가 나를 보더니 씩 하 고 웃었다.

    “잘 알고 있구나.”

    200년 전에도 지금도 같은 생각이 니까.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명제다.

    “ 가자.”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무대로 향했다.

    따사로운 태양 아래 모인 3만 명 의 박수를 받으며 우리 베를린 필하모닉은 팬들에게 감사했다.

    우리가 음악가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자 의미를 준 이들이었기에 가슴 깊이 그리고 정중히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첫 번째 곡 베를린 환상곡을 연주 하기 위해 피아노를 앞에 둔 나는 푸르트벵글러에게 신호를 보냈고.

    준비를 마친 우리는 다시금 봄이 다가옴을 노래했다.

    잔혹한 바람 속에서도 빗발치는 눈 속에서도 끝끝내 무너지지 않는 굳 은 의지.

    그 의지가 이끌어간 끝에는 결국 따사로운 햇살이 비칠 거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피어오르는 플루트.

    천천히 그러나 무게감을 지키며 따 르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쉴 새 없이 이어간 첫 번째 연주 가 끝났을 때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경기장이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관객들의 벅찬 마음을 온몸으로 받 아들이며 두 번째 곡, 가장 큰 희망(F단조)을 준비했다.

    가장 큰 희망은 어렸을 적 사카모토 료이치에게 이끌려 이 세계의 음악을 처음 시도했던 곡이다.

    부활을 제외하고 첫 번째 앨범 곡 은 모두 다시 태어난 뒤 머릿속으로 만 생각했던 곡을 쏟아냈던 탓에 예 전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이 곡은 부활과 함께 이 시대의 나를 알리는 첫 번째 곡이라 마음이 많이 가는 곡이었다.

    오늘 연주를 위해 피아노를 삽입하는 과정은 그때의 설레는 마음을 상 기시 켰고.

    곧 묵직한 울림과 함께 연주가 시 작되었다.

    1악장 모데라토(Moderato: 보통 빠르기).

    제1바이올린의 주제 뒤에 바순이 무거운 분위기를 더해주고 몰아치는 타악부와 첼로.

    나도 함께 동참한다.

    힘차게 나아가는 첼로와 가슴을 찍 어내듯 돌출되는 타악기 사이에서 주제를 반복하는 피아노.

    긴장감을 이어간다.

    2악장 안단테(Andante: 느리게).

    교향곡의 2악장은 느리게 함에서 벗어나진 않았지만 C단조 교향곡 (운명)에서 활용했던 주제 변형을 극적으로 활용한 부분이다.

    현악5부를 대위시켜 이들을 활용해 제1주제를 늘이고 줄이는 등 변형시 킴으로써 곡의 긴장감을 더한다.

    ‘좋구나.’

    피아노로 현악기를 따라가며 푸르트벵글러를 보았다.

    그의 억센 팔이 움직일 때마다 뒤 이어 나오는 소리들. 그 소리의 조 화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도 분명 아름답다.

    그가 그리는 가장 큰 희망은 내가 의도했던 고요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긴장감이 넘친다.

    잠깐의 간격.

    아기의 울음소리, 누군가의 기침, 급히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이 있다.

    평범하고 편한 차림만큼이나 우리 의 음악을 편히 들어주었으면 한다.

    이어서 3악장 알레그리시모(Allegri ssimo: 매우 빠르게).

    음의 변화를 격렬하게 배치한 스케 르초 악장은 내가 만든 그 어떤 3 악장보다 빨랐다.

    횡적 진행과 종적 변화가 너무도 빠르기에 사실 당시 곡을 만들 때는 이것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필스와 로스앤젤레 스 필하모닉은 너무도 훌륭히, 내 의도에 따라 완벽히 해냈고.

    지금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것을 보 다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강약을 주면서 연주하고 있다.

    처음에는 빡빡한 정기 일정 속에서 새 곡을 연습해야 함에 학을 떼던 단원들이 이렇게나 훌륭한 연주를 하다니.

    감흥이 새롭다.

    ‘더 어려운 시도를 해도 괜찮겠어.’

    세계 최고의 필하모닉이니까.

    곡은 어느덧 4악장에 이르렀다.

    잠깐의 정적.

    그 많은 사람이 고요히 우리의 연주를 기다렸다.

    작은 소리 하나 없이.

    흔한 바람 한 점 없이 우리가 노 래하기만을 기다리는 찰나의 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도빈 군과 빌헬름이 재밌는 일을 한다고 하기에 찾아왔건만 마치 록 스타의 초대형 라이브를 보는 것만 같다.

    베를린 환상곡과 가장 큰 희망의 1부가 마치자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격해져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1부의 두 곡은 흥미롭게도 도빈 군의 가장 초기 곡과 최근 곡이었는 데 두 곡 사이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베토벤의 삶에 걸쳐 슈만, 슈 베르트가 활동하던 시절의 음악을 듣는 듯한 가장 큰 희망의 강렬하고 도 장중한 가장 큰 희망은 클래식이 아직 더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고.

    전혀 다른 구성의 베를린 환상곡은 배도빈이라는 음악가가 제시한 새로 운 형태의 클래식이었다.

    ‘넓구나.’

    대체 저 작은 몸 그 어디에 저렇게 넓고 깊은 세계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존재하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기호는 달라지니 나 역시 고집 없이 음악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도빈 군은 그런 나와도.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빌헬름과도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2부.

    피아노를 치우고 도빈 군이 악장 자리에 앉았다.

    캐논이 라.

    대포처럼 우렁차고 대나무처럼 곧 은 선명한 소리에 도빈 군보다 어울 리는 연주자가 또 있을까.

    그런 ‘인크리즈’와 ‘용감한 영혼’이었다.

    “브라보!”

    “브라보!”

    2부가 끝나고.

    사람들은 더욱 크게 기뻐한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힘찬 기운.

    평소의 정장 아닌 일상복을 입은 그들은 마치 축구 경기를 보는 것처 럼 자유롭게 도빈 군의 음악을 즐긴 듯하다.

    저렇게 힘찬 음악이니 야외니 당연 한 것인가.

    ‘용감한 영혼은 편곡이 상당했지.’

    클래식이 이렇게나 신나는 음악이었던가.

    가슴을 뛰게 온몸을 던져 열광할 수 있음에 나는 이 쉽고 직관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도빈 군이 얼마 나 많은 시간을 고뇌했을지 쉬이 짐 작할 수 없었다.

    쉬운 음악.

    어려운 것을 어렵게 전달하는 것은 쉽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럴듯하게 포 장하는 것은 더더욱 쉽다.

    그러나 진정 가치 있는 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 그것을 해내는 것이 이 시대의 음악가가 해 야 할 과제.

    나 사카모토 료이치.

    그런 음악을 하기 위해 평생을 바 쳤고 그러기 위해 많은 장르를 섭력 했으나 만족할 수 없었거늘.

    오늘.

    이 시대를 노래하는 음악가를 만남 으로써 만족할 수 있었다.

    커튼콜 뒤에도 관객들의 박수는 끊 이지 않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 원들은 동료와 시선을 나누었다.

    3만 명의 관객을 둔 압박감 속에 서 2시간 넘게 혼신을 다해 연주했기에 이미 지쳤을 텐데.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나가야겠지.”

    “물론이죠!”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한스가 소리 쳐 대답했다. 그들은 그 유별남에 한차례 웃었다.

    “드보르자크 9번 4악장 준비한다.”

    신세계로부터.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데 이보다 어울리는 곡도 또 있을까.

    배도빈이 앞장섰고 단원들이 다시 무대로 향했다.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고하기 위한 걸음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특별 자선 연주 회, 성황리에 열연]

    【3만 석을 가득 채운 음악 팬]

    “클래식이 그렇게 즐거운 건지 몰랐어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 라면 다시 한번 찾을 겁니다.”

    -31 세 직장인

    “엄마 따라서 갔어요. 좋았어요.”

    -6세 유치원생

    “배도빈의 음악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저는 매 번 그걸 느끼고 있어요.”

    -45세 사업가

    “그렇게 멋진 공연이 10유로밖에 안 하다니.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음 자선 연주회도 반 드시 찾을 거예요.”

    -37세 주부

    “가슴이 뛰지. 듣고 있으면 다시 음악을 하고 싶어진다니까.”

    -58세 정원사

    베를린 필하모닉의 특별 자선 연주 회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실외. 그것도 축구 경기장 크기의 대규모 연주에서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명확히 들려주기 어려워 음향 장 비를 동원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런 아쉬움은 이 특별 자선 연주회 가 지속되는 한 개선될 터였다.

    그보다 더 큰 성과는 클래식의 대 중화.

    클래식 음악이 대중화가 힘든 이유 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그 여러 이유를 하나의 단어로 압 축한다면.

    ‘굳이.’

    클래식 음악이 생활 곳곳에 자리한 것에 비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상함이 대중과 클래식 사이에 벽을 치고 있었다.

    격식을 차려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

    긴 연주 시간.

    비슷한 금액을 들인다면 유명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갈 수 있었기에 젊은 세대에게는 점점 더 클래식을 즐길 이유가 없어졌다.

    즐기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서도 아니고 연주자의 실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다가갈 이유와 동기가 없기 때문이었는데, 배도빈의 음악은 충 분한 동기가 있었다.

    십 년 전 추억의 영화를 통해.

    또는 몇 년 전 인상 깊었던 게임을 통해 사람들은 배도빈의 음악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반가움.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것을 연주하면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고 그로 인해 감동받았던 그때의 기 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클래식 음악을 모르고 가족 또는 지인에 의해 끌려왔던 사람들도 자

    신이 알고 있는 음악이 나오자 음악을 즐기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클래식 음악 연주회를 즐기는 방법이나 기본적인 매너는 몰랐다.

    그저 좋은 음악을 듣고 기뻐하고 울고 가슴 벅차 눈물을 홀릴 뿐이었다.

    그것이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그리고 사카모토 료이치가 추구하는 솔직한 음악이었고.

    쉬운 음악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