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77화
40. 사람, 음악, 돈⑴
영국의 최대 재벌가 버만 그룹의 차남 제임스 버만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 사업을 이끌고 있었다.
종합 콘텐츠 플랫폼 인터플레이.
제임스 버만의 인터플레이는 2010 년도부터 영화, 드라마, 만화, 음악, 소설 등 모든 문화 콘텐츠를 다루었고 곧 버만 그룹의 재력을 앞세워 세계적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동명의 버만 그룹 자회사 인터플레이는 플랫폼을 운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콘텐츠 생산까지 손을 뻗쳐 전 유럽인을 상대로 큰 성 과를 올릴 수 있었다.
시가총액 1,280억 달러.
인터플레이는 유럽뿐만이 아니라 북아메리카까지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그렇게 성공한 제임스 버만은 자신 의 취미 영역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 했는데.
어렸을 적 교양으로 바이올린을 익 혔던 그에게 고향을 연고로 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자랑이자 자부 심이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하 여 런던 필하모닉,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까지 런던의 빅4(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필하모 니아 오케스트라, BBC 심포니) 중 세 곳을 인수한 제임스 버만은 최고 경영자로서 악단을 직접 관리했고.
인터플레이와 악단 사이에 독점 계 약을 추진하여 인터플레이를 통해서 만 세 악단의 연주 영상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세 악단은 인터플레이에서 제작하는 영화, 드라마, 만화 등에 사용되는 음악을 제작하며 재정적으로 부 유해졌으며.
그것은 곧 악단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본래부터 세계적인 악단으로 명성 이 자자하던 그들은 세계 최고의 인 재들을 초빙했고.
마리 얀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나란히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는 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마저 런던으로 향하니.
2020년대에 들어서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이 유럽 클래식 업계에서 가장 각광받게 되었다.
제임스 버만과 인터플레이의 재력 은 인적 자원을 끌어들이는 데에만 소모되지 않았고.
콘서트홀 설비, 녹음 기술 혁신, 악기 구입 등의 내적 환경을 구성하는 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유명 엔터테인먼트 업체를 합병 인 수하여 환경적 인프라도 갖추었다.
무엇보다 인터플레이의 범세계적 마케팅은 여러 음악팬을 런던으로 집중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전통의 강자 베를린 필하모닉과 빈 필하모닉,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 트허바우 오케스트라 등이 최근 들 어 주춤한 것도 이러한 인터플레이 의 적극적인 정책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유럽 클래식 업계에 복 귀하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인터플레이가 지난 수년간 쌓아왔던 주도권이 단 한 명.
단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 판도가 뒤바뀌어버린 것이었다.
배도빈.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에 복귀 한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만 해도 제 임스 버만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뛰어난 음악가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인터플레이가 조성한 환경을 한 개인이 뒤집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오판했음을 배도빈의 복귀 무대를 통해 깨달았다.
배도빈의 복귀 무대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베를린 필하모닉 의 연주회를 기반으로 한 활동은 눈 에 띄게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반등을 주목한 인터플레이의 기업정책수 립소는 6개월 안에 런던의 시장 점 유율이 17%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 했고.
그것은 제임스 퍼만이 움직이기에 충분한 동기였다.
한 달째.
해먼 쇼익 등 인터플레이와 관련한 음악계 종사자들의 배도빈을 향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곧 베를린 필하모닉을 공격 하는 것이었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 중에는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하는 부류도 생겨났다.
정말 배도빈의 음악이 교양 없을지 도 모른다고 속은 것이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
공감이 배제된 예술은 일방적일 수 밖에 없고 예술로서의 가치가 없는 데 예술가와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 사이에는 정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하기에 팬은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춘 평론가나 권위자의 말에 의 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예술의 유통 과정 중간에 놓인 이들이 정보를 조작함으로써 말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장 카밀라 앤더슨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객석은 여전히 만석이었지만 기타 다른 부분에서는 조금씩 매출이 줄 어들었고 견고해 보였던 여론도 차 츰 변화의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런던의 약진으로 그간 주춤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으로서는 배도빈의 합 류로 인한 반등을 기대했는데.
예상했던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주었기에 현 상황에 대해 심각성을 느 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악단의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을 향한 비난에 대해 강경 대응하겠다 고 의사를 밝혔다만 소용이 없었다.
‘해먼 쇼익……
카밀라 앤더슨은 가장 먼저 이 이야기를 시작한 해먼 쇼익과 그를 뒤 따라 배도빈을 공격하기 시작한 평 론가들의 공통점을 찾고자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다.
오늘도 퇴근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차마 퇴근할 수 없었다.
‘도빈이가 올 때가 되었는데. 커피 한잔할까.’
그녀가 개인 사무실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중 과장대리 멀핀이 카밀라를 반겼다.
“국장님, 오늘도 추가 근무하시는 거예요?”
“그렇지, 뭐. 오늘 별일 없었어?”
“큰일은 없었어요. 저…… 여기.”
멀핀이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카밀라에게 보였다. 제법 두툼한 그것을 받으며 카밀라가 물었다.
“이게 뭐야?”
“집에서 따로 조사 좀 해봤어요.”
“멀핀••••••
멀핀이 정리한 서류에는 카밀라 앤 더슨이 조사하고 있었던 내용이 항 목별로 담겨 있었다.
악단 행정업무 때문에 직원들이 바 쁜 것을 알고 있어 홀로 조사를 해 왔던 카밀라 앤더슨은 멀핀의 도움 이 너무도 고마웠다.
“우리 일이잖아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럼 가볼게요. 아, 악장.”
서류를 전달한 멀핀이 사무국 문을 여는데 때마침 배도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멀핀. 잘 지내죠?”
“그럼요. 오늘 연주 최고였어요.”
배도빈과 멀핀이 간단히 인사를 나 누고 사무국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 자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커피 마실래?”
“카밀라의 커피는 환영이죠.”
사무실에 두 사람뿐이었기에 배도빈은 적당히 앉았다.
커피포트에 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불렀어요?”
배도빈이 물었다.
“요즘 어떤가 싶어서. 악장으로 지 내니 어때?”
“세프가 왜 폭군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아요.”
“ 하하하하.”
물이 끓자 뚜껑을 열어 잠시 식혀 두곤 카밀라가 돌아섰다.
“네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 라. 음악적으로는 원래부터 완성되 어 있었지만 악장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줄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라며 아쉬워 하더라.”
“카밀라.”
“음?”
“난 괜찮아요.”
배도빈의 말을 들은 카밀라는 순간 눈썹을 올렸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자신의 의도가 들통났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불특정 다수가 비 난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렵기에 카 밀라 앤더슨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보물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배도빈에게 위 로를 건네는 것보다는 자신이 얼마 나 대단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 해 주고자 불렀거늘.
배도빈은 이미 카밀라의 의도를 눈 치채고 있었다.
“정말 못 당하겠네. 그렇게 티 났어?”
“카밀라 말고도 요즘 다들 제 눈치를 보고 있어 좀 불쾌하거든요.”
카밀리가 적당히 식은 물로 커피를 내렸다.
“평론가들이 하는 말 따위 신경 쓰 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이 절 걱정해 주는 상황이 화가 나요.”
배도빈은 카밀라가 넘겨준 커피를 받아들곤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음악은 대화예요. 대화를 하는데 끼어들어 방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죠. 저와 베를린 필이 만족하고 팬들이 좋아한다면 그것으로 되었어요.”
어렸을 적부터 확고했던 배도빈의 음악관이었다.
그가 콩쿠르 참가나 상을 받지 않으려는 것을 익히 두 눈으로 직접 봐왔던 카밀라 앤더슨은 안도하였다.
“저와 대화한 팬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저랑 나눴던 대화를 의심 하게 된다면 그 또한 그들의 몫이겠죠. 저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더 믿는 거니까요.”
그렇기에 자신의 음악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소중하다.
배도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커피를 마셨다.
“역시 카밀라가 타준 커피네요. 맛있어요.”
“비싼 원두니까.”
두 사람은 작게 웃었고 잠시 간격을 둔 뒤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배도빈이 흔들리지 않음을 확인하였기에 안심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 했다.
“그래도 난 화날 것 같은데. 자기 가 만든 걸 곡해하거나 하면 말이 야.”
“전 음악가예요. 음악을 하는 사람 이지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줄 생각 없어요.”
“음악가는 음악으로 말한다는 뜻이야?”
“ 비슷해요.”
카밀라 앤더슨이 시원하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에 자리 잡 은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은 듯했다.
“……음악은 대화라. 좋은 표현인 것 같아.”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을 좋아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 많이 알고 싶어지잖아? 그런데 아는 게 적으니까 같은 경험을 한 사람하고 대화를 하는 거야. 베를린 환상곡을 듣고 얼마나 좋았는지 어 디가 좋았는지 말이야.”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야.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이 정리 한글을 찾게 되지. 좋아하니까. 더 잘 알고 싶거든.”
카밀라가 말하는 도중 사무국 문이 열렸다.
나윤희와 이승희, 마누엘 노이어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조심스레 그 주변에 섰다.
그들을 둘러본 카밀라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평론가들에 대해 좋게 생각해. 나도 네 음악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거든. 이건 왜 이렇게 했을까? 여기엔 어떤 의도가 있을까 하 고 말이야. 모두 좋아하니까 하는 생각인 것 같아.”
카밀라가 배도빈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일하는 이유도 그런 의미거든. 베를린 필의 멋진 연주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들 려주고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어서. 음악을 전문적으로 알지는 못 하지만 그건 할 수 있으니까.”
푸르트벵글러가 카밀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카밀라가 그 손에 자 신의 손을 겹쳐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 역할을 하려고. 네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내가 할 일이 있을 테니까.”
편하게 말하고 있지만, 카밀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베를린 필의 음악과 음악을 사랑 하는 순수한 사람들을 속여서 헛소 리를 하는 사람들. 내가 꼭 잡아서 혼내줄게. 우리의 대화가 계속될 수 있게.”
카밀라의 진심에.
배도빈이 웃었다.
“부탁할게요, 국장님.”
배도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모였다.
마누엘 노이어와 이승희가 회의를 주도했다.
‘파티를 해주자.’
‘카레를 만들어주자.’
‘편지를 써주자.’
‘맛없긴 해도 요리를 먹어주자.’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모든 사람이 찬성한 방법은 나윤희가 건의한 일 이었다.
“저…… 연주회는 어떨까요?”
“연주회라면 매번 하잖아.”
“아는 척하는 걸지도 모르는데. 그 게. 그…… 악장은 마음 써주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도리어 막 신경 써주면 단원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서 저…… 정기 연주회 말고 팬들이 듣고 싶은 악장의 곡을 연주 하는 자리를 마련하면. 그…… 즈, 즐거워하지 않을까……요?”
음악 바보인 배도빈이 좋아할 만한 이벤트였다.
단원들이 서로를 보았고.
“좋은 생각인데?”
모두 나윤희의 의견에 찬성했다.
비록 정기 일정과 간간이 있는 실내악 공연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으나 악장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허락은? 세프나 사무국에서 허락해 줄까?”
“ 아.”
“크흠.”
“세프.”
그들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푸르트벵글러가 나섰고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푸르트벵글러는 일부 단원을 데리 고 사무국 사무실에 있을 카밀라 앤 더슨을 찾았는데.
마침 배도빈과 카밀라가 대화 중이었기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왕이면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기에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그간 듣지 못했던 배도빈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저와 베를린 필이 만족하고 팬들 이 좋아한다면 그것으로 되었어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
푸르트벵글러와 단원들은 문을 열 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악장 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