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74화
39. 피아노 협주곡 1번 C단조(3)
사무국으로 향하는 와중에 푸르트벵글러가 물었다.
“면접은 어땠느냐.”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사실 반쯤은 합격을 생각하고 임했던지라 나윤희가 보여준 소극적인 모습은 조금 아쉽지만.
악장 오디션 때 들었던 그녀의 시 원한 바이올린과 곡 이해력, 독일어에 능하다는 점 등은 모두 합격선이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그녀의 의지를 파악하고자 마련한 자리였는데.
소심한 성격임에도 다행히 자기가 원하는 것을 놓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윤희 본인이 말한 대로 마냥 둔 탱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음악을 그렇게 시원하게 해내진 못했을 테니까.
“사람을 뽑는 건 말이다.”
푸르트벵글러가 목까지 풀어가며 짐짓 멋있는 척을 하려 했다.
“그 사람을 인정해서 합격시키는 일만을 의미하진 않는단다. 요즘 사람들은 직장을 바꾸는 것도 무능한 사람을 자르는 것도 쉽게 처리하는 것 같지만 나는 이 일이 그리 가볍 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면접자도 면접관도.”
옳은 말이다.
“사람을 고용하는 일은 지원자에게 도 책임이 부여되지만 나도 그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거든. 잘 기억해 두길 바란다.”
“그럴게요.”
푸르트벵글러의 사려 깊은 자세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옛 일이 떠 올랐다.
“그런데 저 뽑을 땐 왜 아무것도 확인 안 했었어요?”
“크흐흠!”
사무국에 확인도 안 해보고 합격시 켜 놓고선 노동법 때문에 안 된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라 물었더니.
푸르트벵글러가 갑자기 기침을 해 댔다.
“이, 인재를 찾았을 땐 서둘러 잡을 줄도 알아야 하는 거다!”
“훌륭한 변명이었어요.”
“변명이라니!”
그렇게 투닥거리며 사무국으로 향 한 뒤 오늘 면접 결과를 알려주었다.
“나윤희라. 알았어요. 연락해 볼게요. 제 기억으로는 꽤 질이 안 좋은 곳에서 활동하던 것 같은데.”
“질이 안 좋은 곳이요?”
“응. 소속사가 정산이라든가 꽤 문 제가 많이 들리는 곳이거든. 아, 맞네. 네이즈. 이쪽이랑 계약 해지할 때 아무래도 좀 복잡해질 거야.”
그런 문제는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 국이 잘 도와줄 거라 생각한다.
카밀라 앤더슨은 유능하니까.
“그럼 수고하게. 국장.”
“네, 고생하셨어요. 세프.”
평소답지 않게 격식을 차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서둘러 각자 갈 길을 가버렸다.
이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헛 수고를 한다.
“같이 가요.”
푸르트벵글러를 뒤쫓아 연습실로 향했다.
쉬고 있을 때 만들었던 피아노 협 주곡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위함이었다.
악보를 넘겨주자 푸르트벵글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음? 피아노 협주곡은 처음이더냐?”
나도 넘버링을 하다가 좀 놀랐는데.
첫 번째 앨범이 모두 바이올린 곡으로 소나타나 협주곡이었는데, 두 번째 앨범은 피아노 두 대를 사용한 소나타에 가까웠다.
‘가장 큰 희망’이나 ‘용감한 영혼’ 등 요청 받아 만든 곡들은 관현악곡 이었고.
비공식이지만 채은이를 위해 만들었던 연습곡 모음도 두 대의 피아노를 사용한 곡이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피아노 협주곡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되었어요.”
“피아노곡을 그렇게 많이 쓰고 처 음이라니. 별나구나. 어디, 들어보 자.”
푸르트벵글러의 요청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가볍게 들려주자 푸르트벵글러가 인상을 쓴 채로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
“단원들을 죽일 셈이냐?”
“왜요?”
“내가 보기엔 연주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곡으로 보이는구나.”
“베를린 필이라면 할 수 있어요.”
푸르트벵글러는 대답하지 않고 악보를 살피다가 직접 바이올린을 들었다.
카라얀 시절에는 악장 생활도 했던 만큼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내 피아노와 맞춰보니 혀를 내둘렀다.
초연임을 감안하면 무척 훌륭한 편 이라 생각했는데 푸르트벵글러는 엄 살을 부렸다.
“이 녀석아, 이런 걸 어떻게 연주 하자는 거냐. 정기 연주회로도 시간 이 없는데 이런 걸 하려 했다간 시 간이 얼마나 들겠어?”
“괜찮아요. 그 역할을 하는 게 제 가 할 일이잖아요.”
“끄웅.”
푸르트벵글러가 고민을 하더니 악보를 내려놓았다.
“……훌륭하구나. 파격적이야. 제목 은 있느냐?”
역시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드디어 곡에 대한 감상을 꺼냈다.
“다시 태어난 베토벤.”
“음?”
“베토벤이 다시 태어나면 이런 곡을 만들었을 것 같지 않아요?”
“욕먹기 딱 좋은 제목인 것 같구나.”
그냥 한번 해본 말인데 진지하게 말하니 조금 욱했다.
“베를린 환상곡이에요.”
“흐음. 좋지. 그럼 네가 연주할 때는 케르바 슈타인이 악장으로 서야겠구나.”
“왜요?”
“왜긴 왜야. 네가 피아노를 치면 바이올린은 누가 이끌겠느냐.”
푸르트벵글러와 내가 서로를 본 채 눈만 껌뻑였다. 그러다 이내 내가 입을 열었다.
“피아노 독주자를 불러야죠.”
“아니, 네 곡이니 네가 독주를 해 야지. 그게 무슨 말이냐.”
“전 악장이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악장을 세우고 네 가 피아노 치라는 말 아니냐.”
“……니나 케베히리를 데려오고 싶었는데.”
사실 채은이가 피아노를 취미로 하 게 되면서 배도빈 오케스트라의 피아노는 니나 케베히리에게 맡기려고 마음먹었는데.
베를린 환상곡은 그 실험이었다.
“그거 한 번만 하고 안 할 테냐. 그 아이가 안 오면 누가 연주하게?”
“ 아.”
그것도 그렇다.
“그럼 제가 할게요.”
캐논과 함께하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이번 피아노 협주곡 발표에서는 피아노를 잡아야 할 것 같다.
* * *
다음 날.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으로부터 합격 통보 전화를 받은 나윤희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저, 정말이에요?”
-네. 축하드립니다. 계약 진행을 위 해 몇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는데 혹시 이번 주 안에 방문 가능하신가요?
“지, 지금 갈게요. 네. 네. 감사합 니다!”
통화를 마친 나윤희는 감격에 젖었다. 떨어질 거라 확신하고 있었기에 더욱 반가웠다.
“설마 합격했어?”
나윤희의 매니저이자 네이즈 엔터 테인먼트 2팀의 이재은이 물었다.
“응!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언니, 잠깐만.”
이재윤이 서둘러 짐을 챙기는 나윤희를 잡았다.
“잘 생각해 봐. 이제 막 솔로로 인정받기 시작했잖아. 2~3년만 지나 면 연주회도 많이 잡히고 네이즈에 서도 프로모션 크게 해줄 텐데 기껏 5, 6천만 원 벌려고 거길 들어가야겠어?”
“••••••어?”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막말로 언니가 거기 들어가서 그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경쟁할 수 있을 것 같아? 악단이라 해도 자리싸움이 얼
마나 치열한데. 제2바이올린 부수석? 거기 평단원들은 이름이 없어? 다 거물이잖아.”
“하지만.”
“언니는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 언니라면 언니 같은 사람 뽑을 것 같아? 왜 뽑을 것 같아?”
“뻔한 거 아냐. 싸게 쓸 사람 필요한 거 아냐. 거기 근무 환경 최악인 거 못 들었어? 곡 하나 연습하는 데 몇 달씩 하는 거?”
“그건 연주 완성도를 위해서……
“또 답답한 소리한다. 그 시간에 연주회 한번 더 하면 돈이 얼마야. 왜 그래. 응? 정산 비율이 불만이었어?”
“그게 아니라.”
“네이즈가 여태 왜 인기 없는 언니를 기다려 줬는데. 이제 와서 손절 하는 거야?”
“재은아••••••
이제 되었다는 듯.
자기 할 말을 쏟아부은 이재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믿은 사람 에게 배신이라도 당했다는 듯.
상처받았다는 듯.
하고 싶은 헛소리는 모두 뱉은 주 제에 할 말을 참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행동에 나윤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네이즈 엔터테인먼트는 대학 재학 중에 국제 대회에서 3위를 한 나윤희에게 손을 내민 유일한 업체였다.
아버지의 치료비가 절실했던 나윤희로서는 네이즈 엔터테인먼트가 제 시한 계약금 5천만 원이 너무나 간 절했다.
그래서 체결한 계약이.
그녀에게는 독이 되었다.
정산 비율은 다른 음악가의 1/2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계약금이란 이름으로 받은 돈은 ‘갚아야 할 돈’이었다.
그나마도 5년 종속 계약 추가 1년.
그러나 나윤희는 당시에는 선택지 가 없었다고 생각하며.
그나마 아버지를 제때 치료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만족하며 네이즈 엔터테인먼트와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유럽과 지방을 오가며 살인적인 스 케줄을 감당했던 나윤희는 겨우 5천 만 원을 탕감했고 그때까지 단 1원의 정산금도 받지 못했었다.
그렇게 3년 만에 처음 정산 받은 420만 원.
나윤희는 아버지와 함께 짧게 유럽을 여행했고 다시 자신의 꿈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놓고 있었던 작곡을 시작했고 유명 지휘자들의 연주를 기록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아버지의 응원에 힘입어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오디션에 지원했는데.
재계약 시즌이 도래하자 네이즈 엔 터테인먼트에서는 조금씩 그녀에게 연주회의 기회조차 잡아주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재계약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고자 했던 치졸하고.
또한 흔한 업계의 수작질이었다.
거기에 네이즈 엔터테인먼트 2팀 대리 이재은은 나윤희의 소극적인 성격을 이용해.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기까지 하였는데.
그녀의 연주가 유럽에서 조금씩 인 정받고 있음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번에는 ‘계약금’ 2억 원과 10년 종속 계약.
그것이 네이즈 엔터테인먼트 2팀장 으로부터 받은 이재은의 목표였다.
“……재은아.”
나윤희가 그녀의 매니저를 불렀다.
“왜?”
“나 너 정말 좋아했는데. 왜. 왜 그렇게까지 말했어야 해?”
“언니 말 정말 이상하게 한다? 내 가 뭘 어쨌는데?”
나윤희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나, 나. 마, 말 더듬고 그래도 바보는 아니야. ……갈게.”
벌써부터 차오르는 눈물을 떨어뜨 린 나윤희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돌아섰다.
지난 6년간의 삶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견디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서.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계약 앞 에서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음에 나윤희는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