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73화 (17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73화

    39. 피아노 협주곡 1번 C단조(2)

    ‘똑 부러지게. 목소리 크게 하자.’

    나윤희가 며칠간 거울을 보며 연습했던 표정을 지으며 면접관에게 인사했다.

    “아안, 녕하세요.”

    그러나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인사를 이상하게 해 버렸고.

    ‘어떡해. 망했어.’

    나윤희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좌절 하고 말았다.

    밝고 똑 부러지고 싶어서 되뇌었던 행동들은 면접관들과 눈을 마주하자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박력 넘치는 눈빛에 나윤희는 시선조차 회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선을 회피한 곳에는 배도빈이 있었다.

    ‘배, 배도빈이다. ……귀여워.’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 중에 배도빈의 팬이 아닌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악장 오디션 때 멀리서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처음이라 나윤희는 또 가슴이 콩닥 거렸다.

    “반가워요, 나윤희 씨. 멋진 미소네요. 편히 앉으세요.”

    “가, 감사합니다.”

    케르바 슈타인은 그런 나윤희가 더 긴장하지 않도록 친근히 대했다.

    케르바 슈타인은 배도빈이 복귀하 면서 제2바이올린 부수석 자리가 채워주어 무척 반가웠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간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악장(제1바이올린 수석)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제2바이올린을 이끌어왔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케르바 슈타인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그의 기구한 운명은 니아 발그레이와 그 시절 또 다른 악장이었던 필립 리먼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악단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는데.

    악장 두 명의 공백으로는 도저히 운영이 불가능했기에 푸르트벵글러가 제2바이올린 수석이었던 케르바슈타인에게 이례적으로 악장직을 수 여했던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진급’이란 개념은 없었거늘.

    그러한 특혜를 받은 케르바 슈타인은 동료들로부터 시기나 질투는커녕 위로를 받게 되었다.

    악장으로서 참가할 때는 제1바이올린에서 활동함과 동시에 제2바이올린을 신경 써야 했고, 그러지 않을 때는 제2바이올린에서 일했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일의 강도가 너무나 심했던 탓이다.

    제2바이올린의 부수석이라도 있으면 그의 피로가 덜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문제는 푸르트벵글러가 고집을 부 려 ‘배도빈의 자리’를 채워주지 않아 이제 40대밖에 안 된 젊은 음악 가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새겨질 정 도였다.

    하여 배도빈이 복귀하자 가장 기뻐 한 것도 케르바 슈타인이었는데.

    배도빈이 한 달 만에 악장이 되어 버리니 조금씩 빠지기 시작한 머리 털마저 쥐어뜯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집이라면 세계 제일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도 탈모가 진행되고 있는 악장이 스스로 머리털을 쥐어뜯는 것을 보고는 같은 대머리로서 사태 의 심각성을 깨달아.

    제2바이올린의 부수석, 나아가서는 제2바이올린의 수석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사람을 물색하던 도중 찾은 사람이 악장 오디션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 여준 나윤희였다.

    케르바 슈타인이 나윤희를 반가워 하는 것은 당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시켜야 해.’

    케르바 슈타인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보였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모 두 악장 오디션 때 나윤희 씨의 특 출함을 발견해서 연락을 드린 거니 까요. 형식적인 자리라고 생각하세요.”

    케르바 슈타인의 말에 나윤희는 조 금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심히 불편 하다는 표정을 지어 그러지 않아도 험상궂은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슈타인, 그게 무슨 말인가. 형식적 이라니. 쓸데없는 말은 말게.”

    “세프께서도 이미 마음에 들었으니

    부르신 거잖아요.”

    평소라면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껌 뻑 죽는 케르바 슈타인도 오늘만큼 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나윤희에게는 두 사람의 대 화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가, 갑자기 왜 싸우는 거야.’

    고집의 푸르트벵글러.

    나윤희를 놓칠 수 없는 슈타인.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피가 말라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배도빈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질문을 하였다.

    “저번에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이 되고자 지원하셨어요. 그 동기에 대 해 여쭤볼게요.”

    악장이 되고자 했던 나윤희가 제2 바이올린 부수석으로 만족할 수 있을지.

    또는 제2바이올린 부수석을 하고 싶은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아, 네.”

    숨을 고를 나윤희가 대답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것을 꿈꿨어요. 여러 악기 가 하나의 곡을 연주하기 위해 호응 하는 게 좋았습니다.”

    ‘아, 안 돼.’

    케르바 슈타인은 깜짝 놀랐다.

    나윤희가 절대 해서는 안 될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 고 싶었다니. 뻔해도 그렇게 뻔한 대답도 없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생각하는 단원으로 서의 첫 번째 조건은 다름 아닌 간 절함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어야만 해.’

    그들이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명확해야 했다.

    각자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에 함께하기 위한 최우선 조건.

    ‘최고의 연주를 위한 최선’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오케스트라를 동경했다니.

    다른 악단이라도 상관없다고 받아 들일 수도 있었다.

    “하하하. 어렸을 적부터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을 많이 들어보셨나 보죠?”

    바꿔보고자 질문을 보다 명확하게 하였는데.

    나윤희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로부터 항상 들은 말.

    사람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굳게 새겼기에 솔직히 대답 했다.

    “그건 아니지만……

    ‘야!’

    케르바 슈타인의 미소 띤 얼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암스테르담의 연주를 많이 들었어요. 오이겐 요홈의 베토벤 교향곡이나 마리 얀스의 진중한 지휘가 너무 좋았습니다.”

    푸르트벵글러의 얼굴이 잔뜩 찌그 러졌고 그 험악한 표정을 본 케르바 슈타인의 미소는 와장창 깨져 버렸다.

    하필이면 마리 얀스.

    런던, 빈과 함께 언론에서 지겹도 록 베를린과 비교하는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의 상임 지휘자 이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적수’ 로 여기는 몇 안 되는 인물을 좋다 고 하다니.

    케르바 슈타인은 도대체 베를린 필하모닉에 들어오고 싶은 건지, 나윤희의 진정성마저 의심되었다.

    “그리고.”

    한편 나윤희는 면접관들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포기하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2010년에 처음으로 돈을 벌었거든요. 연주회 정산으로. 저…… 투자를 받았던 거라 많이는 못 벌었지만. 그걸로 아버지랑 같이 유럽 여 행을 했는데. 아, 아버지는 유럽에 오신 적이 없으셨거든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케르바 슈타인은 좌절하고 말았다.

    몇 년 만에 찾아온 기회이거늘.

    면접자가 푸르트벵글러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만 늘어놓았다.

    “그때…… 베를린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를 들었어요. 아버지는 오케스트라가 처음이셨는데 1년 전부터 티켓을 준비하느라 엄청 기대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들은 에로이카가 너무 좋았어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버릇 처럼 말씀하셨거든요. 베를린의 에 로이카를 다시 듣고 싶다고. 그래서 저도.”

    말수가 적은 그녀로서는 평소 일주 일에 말할 분량을 넘어섰기에 지친 목을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저도 그렇게 멋진 연주를 하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 아.’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왜 내뱉었을까.

    버릇처럼 나와 버린 말에 나윤희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푸르트벵글러와 케르바 슈타인의 얼굴은 많이 풀어져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하고 싶다는 나윤희의 마음이 전해지면서 그 녀가 말이 서툴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배도빈이 나섰다.

    독일어가 아니라 한국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잔뜩 긴장한 나윤희 가 덜 긴장하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제2바이올린 부수석 자리는 사람 들과 소통하는 일이 잦아요. 아시겠지만 케르바 슈타인 악장이 제2바이올린까지 담당하고 있다 보니 부수 석이 역할을 잘 수행해 줘야 해요.”

    “아, 네.”

    “나윤희 씨의 실력은 오디션을 통해 인상 깊게 봤지만 오늘 면접을 통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타인에게 생각을 명확히 전달하는 데 어려움 이 있다면 부수석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배도빈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윤희 가 다시 한번 절망했다.

    확실히 배도빈의 말대로 그녀는 여 태 소극적인 성격으로 한 집단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고 무대에서의 쇼맨십도 떨어져 다 소 밋밋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소심하기만 했더라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것 이다.

    “마, 맞아요. 저는 말도 잘 못 하 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지만 포, 포기하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유 럽에 혼자 와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지 못했을 거예요.”

    배도빈은 나윤희의 말을 잠자코 들 어주었다.

    “소심하긴 해도 음악을 좋아하니 까. 좋아하는 걸 위해서라면 하, 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나윤희를 말을 들은 배도빈이 펜을 내려놓았고 푸르트벵글러는 그녀에 게 면접이 끝났음을 전달했다.

    나윤희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한 뒤 면접실을 나와 베를린 거리를 걷 기 시작했다.

    ‘또 저질렀어.’

    그렇게 연습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았기에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등신.’

    그 베를린 필하모닉이 먼저 연락까지 해 준 기회를 망쳤다고 생각하니 자신을 모자른 애라고 탓하게 되었다.

    ‘……도빈이는 그렇게 어린데 엄청 똑 부러졌지.’

    자꾸만 넘치는 눈물을 연신 닦아낼 뿐이었다.

    나윤희라.

    그렇게 시원시원한 연주를 하는 사람이 막상 면접장에서는 전혀 달라 꽤 놀랐다.

    말하는 법을 제대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긴장한 탓인지.

    서두가 너무 길어 말을 제대로 이 해할 수 없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건 그녀가 자기 성격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음악을 좋아하기에 계속 해서 도전하고 있다는 점만은 마음 에 들었다.

    성격이야 쉽게 고칠 수 없지만 자신에게 매몰되어 아무런 노력조차 안 하는 머저리들과는 다르다.

    말을 더듬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힘겹게 꺼내는, 그리고 마무리 하려는 모습에서.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베를린 필하모닉과 얼마나 함께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나윤희를 배려하고자 한국말로 면접을 나누었던 내용을 푸르트벵글러 와 케르바 슈타인에게 전달해 주었다.

    “……어땠어요?”

    케르바 슈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내 생각부터 말해보라는 뜻 이기에 입을 열었다.

    “같이 일해도 좋을 것 같아요.”

    면접을 보면서 적은 것을 푸르트벵글러에게 보여주곤 말을 이었다.

    “실력이야 어차피 확실하니까 제쳐 두고. 이력이 좋아요. 시카고 심포니 협연, 암스테르담 협연, 개인 연주회 11회에…… 작곡도 공부했네요. 자 선 연주회도 했고. 저렇게 어수룩한 사람이 젊은 나이에 하기에는 많은 일을 다양하게 했는데. 그만큼 노력 했다는 뜻일 테니까요.”

    “가능성을 보자는 뜻이냐.”

    “네. 음악을 좋아한다면 중간에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아요.”

    푸르트벵글러가 고민을 하는 듯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소통에 있어서는 제가 도와줄 수 있죠. 중요한 건 그녀가 유능하다는 점이겠죠. 또 베를린 필하모닉에 좋은 추억을 가져서 함께하고 싶다는 점과요.”

    케르바 슈타인의 말을 들은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채용하도록 하지. 고생했네. 도빈이는 잠깐 남아서 같이 사무국에 들리 도록 하자.”

    케르바 슈타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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