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69화 (16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69화

    38. 노력하는 사람(3)

    내가 기억하던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무대 위로 차분히 걸어 올라온 그 의 얼굴에는 예전의 건방진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객석을 향해 덤덤하게 인사를 한 뒤 베를린 필하모닉의 반주자(내가 여섯 살 때 입단 오디션을 도와주었던 피아니스트)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차분한 와중에 떨리는 현.

    피아노와 함께 장난을 치듯 시작하는 이 곡은 내 바이올린 소나타 10 번, G장조다.

    바이올린 소나타는 9번 이후 10년 정도 건들지 않았는데 루돌프와 로 데가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어 주기로 하여 만든 곡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9번이든 10번이든 연주자를 고려하며 작곡했다는 점에서 조금 색다른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이내 할 수 없게 되었다.

    찰스 브라움은 3/4 박자의 1악장을 너무도 편안히 연주하였다.

    듣는 사람이 안도할 수 있도록 기 교나 속주에 연연하지 않고 파이어 버드의 아름다운 음색을 들려주고 있었다.

    첫 번째 내 연주, 그러니까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이 E현의 높은 곳을 활용해 고음역을 다루었다면.

    두 번째 찰스 브라움은 G현의 부 드러움을 십분 활용하였다.

    에스프레시보(Espresivo: 감정을 담 아서)와 돌체(Dolce: 달콤하게)를 많이 삽입한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파 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성진행에 대해 깊은 사색을 했어 야만 가능한 아름다운 연주였다.

    니나 케베히리가 찰스 브라움이 변 했다고 말한 것도 나를 걱정한 것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이미 단순한 연주자를 넘어 내 곡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자 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이렇게나 벅찬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화려한 모습에 집착했던 철부지 황 태자가 7년간 성숙하여 온화한 왕이 되었음에 조금씩.

    조금씩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체 얼마나 자신을 밀어붙였을까.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바이올린과 함께했을까.

    그의 노력을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탐나잖아.’

    저 사람에게 제1바이올린을 맡긴다 면 어떻게 이끌까.

    독주곡을 준다면 어떤 느낌으로 연주할까?

    내 피아노와 협주를 한다면 즐겁겠지. 니나의 말대로 그의 바이올린은 나보다 낫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3일에 걸쳐 진행된 첫 번째 심사는 마지막 참가자가 연주를 마치고 두 시간 뒤 곧장 점수가 공개되었다.

    아직 베를린 필과의 협주곡이 과제 로 남아 있었기에 절반에 해당하는 점수일 뿐인데.

    박선영과 최지훈은 야단법석을 떨 며 좋아했다.

    “와! 도빈아, 만점이야. 만점!”

    “역시 배도빈이네! 응?”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두 사람을 보곤 슬쩍 웃은 뒤 나도 모니터를 확인했다.

    스크롤을 돌려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점수를 보는 와중에 찰스 브라움도 눈에 띄었다.

    Charles Braum: 46

    “어?”

    찰스 브라움이 50점이 아니라니.

    “역시 고득점이네, 찰스 브라움.”

    최지훈이 얼굴을 붙이곤 화면을 함께 보았다.

    나는 최지훈의 말에 놀라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다.

    “고득점이 라니?”

    “응? 고득점이잖아.”

    50점 만점의 테스트에서의 점수로 보면 그렇지만 찰스 브라움의 연주를 떠올리면 턱없이 낮은 점수다.

    “무슨 소리야. 너도 같이 들었잖아.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달라지긴 한 거 같더라. 왜 그러는데?”

    최지훈이 정말로 이해를 못 하는 듯해서 히무라에게 물었더니 히무라 역시 찰스 브라움의 연주를 잘한다는 수준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내 바로 뒤의 연주를 듣곤 너무나 행복했거늘. 나보다 나은 연주자가 나왔다고 기뻐했거늘.

    아무래도 두 사람 다 당시에 제대 로 듣지 않은 모양이다.

    다음 날.

    협주곡 오디션은 하루 간격을 두기 에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향했다.

    오늘은 연습도 딱히 없었기에 올 필요는 없었지만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세프.”

    “오, 그래. 마침 잘 왔다. 오렌지 주스 마실 테냐?”

    푸르트벵글러가 당이 왕창 들어간 오렌지 주스를 흔들어 보였다.

    “애가 아니라고요.”

    “그래서 안 마실 테냐?”

    “따라 봐요.”

    역시 나이를 먹으면 단 게 끌린다. 푸르트벵글러가 능글능글한 표정을

    짓고는 나를 살폈다.

    “왜 왔는지 맞춰볼까?”

    “찰스 브라움 때문에 왔어요."

    “……재미없는 놈 같으니.”

    “세프도 알고 있었으면 대체 왜 그런 평가를 내린 거예요?”

    “어쩌겠나. 적어도 연주만큼은 단원들과 함께 판단하기로 했는데.”

    “그럼••••••?”

    푸르트벵글러가 숨을 길게 내쉬더 니 입맛을 다셨다.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잔을 모두 비웠는데 그제야 생각을 정리 한 모양이다.

    푸르트벵글러가 대답했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곤 그리 평이 좋지 않아. 처음에는 나도 심사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화를 냈네만. ……모르겠다는 걸 어쩌겠나.”

    “네 연주야 만장일치로 완벽하다 했네만. 솔직히 말하면.”

    “찰스 브라움이 저보다 나아요.”

    “그래. 같은 생각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나를 모 욕하려는가?

    마음 같아서는 한 사람씩 붙잡고 다그치고 싶으나 현재 오디션 참가 자 입장에 있는 내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분명 잘못된 상황임을 알기 에 답답해졌다.

    푸르트벵글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훌륭한 연주라고 해서 꼭 모든 청 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건 아니 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여요.”

    그보다 홀륭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기에 그의 음악이 이해받지 못함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푸르트벵글러가 내 잔에 오렌지 주 스를 따르며 말했다.

    “네 연주 뒤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무슨 이야기인지 들을 준비가 되었기에 푸르트벵글러도 자신의 생각을 풀기 시작했다.

    “격렬한 9번 소나타를 다른 사람도 아니라 네가 연주했었지. 이미 사람들의 넋을 흔들어 놓았단 말이야. 그 바로 뒤에 차분한 10번 소나타를 바이올린의 음색에 집중해서 연주했고. 관객이든 다른 사람이든 어떻게 받아들일까?”

    “잘하지만 크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을 거야. 네가 이 다디단 오렌지 주스를 마신 뒤에 생과일주스를 맛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다.

    일반 관객이라면 모를까.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이나 최지훈 은 그런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

    “이해가 안되지?”

    “ 당연하죠.”

    “하지만 그게 사람이다. 내가 단원 들의 평가를 받아들인 것도 결국엔 그 때문이야. 결국에는 듣는 사람이 어떻게 판단했는지가 중요하지. 어 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가를 분석 하고 개선하는 것은 연주자의 몫이 야.”

    그건.

    옳은 말이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찰스 브라움은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생각이 있다면 다음 연주에서는 변화가 있겠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머리를 정리하는데 푸르트벵글러가 또 하나 의문점에 대해 명쾌히 설명해 주었다.

    “내일도 첫 번째인데. 궁금하지 않냐. 왜 항상 첫 번째인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베를린 필은 널 기준으로 심사를 하고 있다는 뜻 이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잘 생각해 봐라. 네 연주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깊게 생각할 것 없었다.

    점수를 매겨야 하는 입장에서는 아마도.

    “제가 너무 뛰어나니까요.”

    “그래.”

    납득되었다. 나는 대단하니까.

    잔을 내려놓았다.

    “가볼게요. 내일 봐요.”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날.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

    대기실에서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 고 있는데 찰스 브라움이 다가왔다.

    “잠깐 괜찮나?”

    “ 앉아요.”

    자리를 내어주니 그가 옆에 앉았다.

    “난 네게 지지 않았어.”

    “그래요.”

    “그렇다고 이기지도 못했어. 결국 선택은 듣는 사람이 결정하는 거니까.”

    옳은 말이다.

    그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넌 분하지도 않냐? 이런 말을 하는데.”

    “사실이니까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내가 억지를 부리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아. 내 음악을 할 뿐이야. 오늘 네 뒤에서도 난 내 음악을 할 거야. 그러니.”

    “거기까지.”

    찰스 브라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을 직시하며 명확히 말했다.

    “음악가라면 당연한 일이에요. 무대 위에서 말하는 것도 음악가가 할 일이고. 만약 당신이 아직 내게 인 정받고 싶어 그런 말을 한다면.”

    “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 난 당신을 동정하지도 추잡하거나 찌질한 놈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찌질하다는 말 직접 듣는 건 처음이네.”

    “자각은 하고 있나 보네요.”

    “조금.”

    둘 다 웃음이 터졌다.

    그런 뒤 이제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할 때가 되었다.

    “당신은 더 나아갈 수 있어요. 나 도 그렇고. 더 멋진 바이올린을 들 려주길 바랄게요.”

    그와 마지막으로 시선을 교환하고 무대로 향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자신의 개인 대기 실에서 막 나왔고 그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과 함께했다.

    나와 함께할 사람들.

    찰스 브라움의 바이올린 연주가 나보다 낫다고 해서.

    또 그의 연주를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달라질 이유는 없다.

    나는 나만의 연주를 할 뿐이다.

    그러는 과정에 찰스 브라움이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서로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찌질한 친구라도.

    내게 또 다른 영감을 주었으니까.

    0